거수기 벗어나 적극 참여 중‘견제’ 지나쳐 CEO 흔들기도
거수기 벗어나 적극 참여 중‘견제’ 지나쳐 CEO 흔들기도
지난해 10월 포스코의 이사회에 포스코건설 상장과 관련된 안건이 올랐다. 이구택 회장까지 보고된 안건이었다. 집행 임원은 큰 무리 없이 안건이 통과되리라고 낙관했다. 막상 회의가 진행되자 한 사외이사가 “포스코의 여러 비상장 회사 가운데 포스코건설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현금흐름이 좋은 포스코가 굳이 포스코건설까지 상장해 자금을 유치해야 할 당위성을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임원이 머뭇거리자 “포스코의 장기적 청사진도 보여주지 않고 밥상에서 반찬을 집듯 포스코건설을 택해 상장을 검토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따졌다. 결국 포스코건설 상장과 관련한 논의는 포스코의 미래 전략을 살펴본 후 검토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흥미로운 일은 다음 이사회에서 일어났다. 그 임원은 사외이사의 주문에 따라 상장 안건과 함께 회사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글로벌 에너지 기업 포스코’다. 그 방안 중 하나로 국내외 에너지 기업 인수가 포함됐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이때부터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는 사외이사가 경영에 깊숙이 관여해 기업의 비전에까지 큰 변화를 준 예다. 국내에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사외이사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 경영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1998년에 도입됐다. 이후 모든 상장회사는 의무적으로 사외이사를 둬야 했다.
2000년 개정 증권거래법에선 자산 2조 원 이상 대형 상장법인은 총 이사 수의 절반 이상(최소 3인)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것을 의무화했다. 사외이사는 시행 초기부터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다. 경영진의 독단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 찬성 일색의 ‘거수기’ 역할만 한다고 비판받았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전체 주권상장법인 1403개 회사 중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반대한 적이 있는 회사는 12개에 불과했다. 사외이사가 수정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는 회사는 28개였다. 민간 경제연구소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일부 대기업에선 사외이사 제도를 준조세처럼 여긴다”고 꼬집었다. 사외이사가 별 역할을 하지 않거나 못하게 돼 일부 기업에서는 사외이사 제도를 귀찮고 비용만 들어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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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성 갖춘 사외이사 회사를 살린다 = 요즘 들어서는 그러나 포스코에서처럼 사외이사가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전문성을 갖춘 경영자가 다른 기업의 사외이사로 선임돼 그 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경우도 있다. 상장 A 사의 2대주주는 동종 업계 해외 경쟁자 B 사다.
B 사는 얼마 전 A 사의 중국 현지법인을 매입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A 사가 거절하자 B 사 임원은 A 사의 이사회에 참석해 A 사의 “주요 경영 사항에 대한 자료를 내놓으라”며 우회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A 사의 사외이사 가운데 한 명이 나섰다. 그는 국내 금융회사 CEO다.
그는 B 사의 임원에게 국내 상법 체계를 설명한 후 “이사로서 회사의 경영 파악을 위해 자료를 제공받는 것은 정당하지만, B 사에 넘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B 사가 서면으로 비밀준수에 대해 확약한 뒤에야 해당 자료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외이사의 활약 덕분에 A 사는 외국인 주주의 압박을 물리칠 수 있었다.
A 사 관계자는 “이런 일을 처음 당해봤다”며 “노련한 사외이사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안도했다. 해당 기업의 업종은 물론 기업 경영과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회사에 도움을 주는 사외이사도 있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하나은행 이사회 의장도 겸임한다.
김 회장은 하나은행 경영에 가장 도움이 된 사외이사로 송상현 전 서울대 법대 학장(현 국제헌법재판소 판사)을 꼽는다. 김 회장은 “송 전 학장은 종종 금융회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선견지명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휘자 금난새 씨는 S&T그룹의 지주회사인 S&T홀딩스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평규 회장이 이끄는 S&T그룹은 S&T중공업(옛 통일중공업), S&T대우(옛 대우정밀), S&T모터스(옛 효성기계) 등 주력 계열사가 대부분 인수된 기업이다. 게다가 강성 노조로 유명하다. 최 회장은 노조의 성향을 누그러뜨리는 방법 중 하나로 음악을 택했다. 매일 식사 때마다 사내 방송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내보냈다.
사내 음악회도 개최했다. S&T그룹은 클래식 음악을 담은 ‘선무 방송’과 관련해 금난새 씨에게 자문한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포브스코리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금난새 씨 덕분에 노조가 한결 차분해졌고 노사 마찰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흡족해했다. 헤드헌팅 업체의 한 관계자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게 비전문 사외이사의 강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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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외이사 역할은 오너 하기에 달렸다 = 2005년 SK㈜는 재무구조 개선이 상당히 시급한 과제였다. 차입금이 많아 부채비율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때문에 당시 SK㈜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울산 공장의 설비를 일부 매각한 후 차입금을 갚고 이를 다시 임차하자는 안건을 이사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사외이사인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대학원장이 반대 의견을 냈다. 서 교수는 회계전문가의 시각에서 계약서에 불리한 조건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CFO가 강하게 반발했다. 심혈을 기울여 보고서를 준비했고 해당 안건은 이미 최태원 회장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격한 논쟁이 벌어지자 이사회 멤버의 눈길이 의장인 최 회장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최 회장은 나서서 갈래를 잡기는커녕 한발 물러나 설전을 지켜봤다. 결국 서 교수가 판정승을 거뒀고 안건은 보류됐다. 서 교수는 “일반적으로 오너가 있는 회사에선 사외이사가 반대표를 던지기 힘들지만 SK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최 회장의 깊은 내공”을 가장 큰 배경으로 꼽았다.
오너가 있는 회사의 경우 사외이사가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오너의 강력한 의지가 필수다. 최 회장은 한국에서 사외이사 제도를 가장 효율적으로 경영에 활용하는 총수로 평가받는다.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SK의 사외이사 제도를 벤치마킹 하라고 지시할 정도다. 최 회장은 서울 서린동 SK㈜ 본사 사옥 25층에 사외이사 집무실까지 만들었다.
사외이사가 회사 경영 활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최 회장은 또 사외이사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직접 사외이사들에게 회사 현황을 설명한다. 일본에선 사외이사의 힘이 우세한 회사로 소니가 꼽힌다.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전 회장은 일찌감치 미국식 지배구조를 도입해 사외이사 제도를 활성화했다.
이데이 회장은 사외이사에게 실질적인 결정권을 부여하며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화살은 이데이 회장에게 날아왔다. 2005년 사외이사들이 소니의 부진을 이유로 그를 내보내고 미국법인 사장인 하워드 스트링어를 CEO로 추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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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사외이사, 볼멘 CEO = 사외이사는 제도의 취지인 ‘견제와 균형’에 충실하려면 때에 따라서는 CEO를 해임하고 새로운 인물을 선임해야 한다. 그 방법은 임기가 만료된 CEO 대신 다른 인물을 새 CEO 후보로 추천해 주총에서 선임되도록 하는 것이다. 국민은행의 사외이사들은 지난 7월 KB금융지주 회장으로 강정원 국민은행장 대신 황영기 씨를 추천했다.
지주회사회장 후보 추천위원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됐다. 당시 국민은행 이사회의 구성을 보면 사외이사 측의 힘을 짐작할 수 있다. 사내이사는 강정원 행장을 비롯해 5명인 반면 사외이사는 9명이나 됐다. 국민은행의 사외이사 비율은 이사회 구성원의 2분의 1 이상으로 규정한 은행법의 기준을 초과한 수준이었다.
앞서 지난해 8월 강 행장의 연임도 사실상 사외이사가 결정한 사항이었다. 그때 행장후보추천위원회 또한 전원 사외이사로 이뤄졌다.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이 KB금융지주의 CEO를 국민은행과 관련 없는 인물로 앉힌 데 대해 금융계에선 지금까지도 말이 많다. 국민은행 사외이사를 지낸 한 인사는 “사외이사의 기본 역할은 CEO에 대한 견제와 평가”라며 “국내에서 그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는 곳은 국민은행 외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회사 임원이었던 다른 인물은 “국내 모든 기업이 국민은행의 사외이사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외이사가 정말 CEO를 견제하도록 하려면 국민은행에서처럼 CEO의 승계와 평가에 대한 권한까지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영기 씨를 KB금융지주 회장으로 선임함으로써 강 행장에 대한 ‘견제성 평가’를 내린 것은 잘 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의 황영기 씨 추천은 자신들의 이전 의사결정과 상충한다는 지적도 있다. “사외이사들이 강 행장의 경영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연임시킨 지 채 일 년도 안 됐다. 게다가 다른 변화가 없는데도 이전 결정을 뒤집으며 사실상 불신임한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금융회사 CEO를 역임한 한 금융계 인사의 비판이다.
국민은행의 사외이사 9명은 최근 전원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로 올라갔다. 지주회사에 사외이사가 있을 땐 자회사에서는 사외이사를 두지 않아도 되지만, 국민은행은 사외이사 4명을 새로 선임했다. KB금융지주 이사회는 사외이사 9명과 사내이사는 3명으로 구성됐다. 숫자를 기준으로 할 때 사외이사들이 국민은행 때보다 훨씬 강해진 셈이다.
CEO를 검투사에 비유한 황영기 회장이 드센 사외이사들 속에서 자신의 뜻을 어떻게 펴 나갈지 주목된다. 막강한 사외이사를 모시고 있는 회사에서 가장 불만인 사람은 다름아닌 CEO다. 금융 공기업을 경영했던 한 인사는 “사외이사가 최고경영자를 평가하기 때문에 CEO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외이사들의 등쌀에 CEO로서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더 답답했던 건 중요한 안건이 올라오면 사외이사들이 책임지지 않으려고 의사결정을 미루는 행태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회사에서 자신의 이론을 실험하려는듯 이사회에서 쉽게 아이디어를 내는 교수 사외이사도 기피 대상”이라고 말했다.
한 은행의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사회에서 제기된 사안은 그냥 넘어갈 수 없고 실무진부터 책임자까지 검토해서 사후에 보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외이사 섭외 1순위로 꼽히는 일부 고위관료 출신들도 비난의 대상이다. 국내 대기업 관계자는 “관료 출신 사외이사는 혹시 모를 회사의 리스크에 대비해 뽑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뽑힌 사외이사는 해당 기업의 경영 전략은 물론 현재 사업 포트폴리오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사외이사 제도와 관련해 ‘견제’는 ‘효율’과 상쇄 관계란 주장도 나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 7월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와 기업가치 간의 관계’란 주제의 보고서를 내고 “사외이사의 비율이 높은 회사일수록 경영 성과가 좋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반면 지배주주의 지분이 클수록 경영성과가 양호했다”고 강조했다.
>> 사외이사 그들만의 리그 = KB금융지주는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게다가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 4명이 모두 사외이사다. KB금융지주의 사외이사 자리가 비면 사외이사들이 거기에 비슷한 성향의 인사로 채우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다.
은행법에 따르면 새 사외이사는 사외이사가 2분의 1 이상 차지하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서 추천돼 주총에서 선임되면 된다. 하나은행 이사회는 사내이사 4명, 사외이사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은 7명인데, 이 가운데 사내이사 측에서는 윤교중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이 참여한다.
하나금융지주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6명 가운데 사내이사가 2명이고, 김승유 회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사외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새 사외이사를 뽑는 KB금융지주와 달리 하나은행에서는 사내이사 측의 ‘견제’를 받아 균형을 이루는 셈이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은 얼마 전 하나은행과 같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 들어가려 했으나 사외이사들이 황 회장을 받아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집중된 힘은 남용될 위험이 있다. 사외이사 자리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인사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서윤석 교수는 “사외이사가 개인적인 명성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어 “사외이사는 소속된 회사에 대한 ‘절제된 열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견제자는 누가 견제할 것인가? 즉 사외이사를 평가해 결격 사유가 있다면 해임까지 할 장치가 있는가? 사외이사 제도 도입 10년을 맞아 새롭게 제기되는 의문이다.
사외이사 연봉 현대차 8700만 원 최고 사외이사 연봉은 얼마나 될까? 2008년 3월 기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유가증권과 코스닥시장을 합쳐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0개 기업의 지난해 사외이사 연봉은 평균 4346만 원으로 나타났다. 이 중 현대자동차의 사외이사 연봉이 8700만 원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이어 하나로텔레콤 8208만 원, SK텔레콤 7700만 원, KT&G 7676만 원, 국민은행 7100만 원, LG전자 7000만 원 순이다. 현재 상법에서는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의 보수를 주주총회에서 정하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주총에선 이사들의 보수 총액만 정한다. 개별 이사의 보수는 이사회에서 내규로 정한다. 따라서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거나 입김이 센 회사의 경우 사외이사들이 자신의 보수를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외이사 연봉은 미국에서도 논란 거리다. 2004년 포브스는 미국 194개 기업의 이전 6년간 주가상승률을 동종 업계의 평균과 비교했다. 그리고 주가상승률 상위 기업들과 하위 기업들의 사외이사 연봉을 분석했다. 하위 5개 기업 사외이사들의 평균 연봉은 6만9887달러로 상위 5개 기업 사외이사들 연봉의 1.6배였다. 포브스는 사외이사 연봉과 주가상승률의 반비례 관계에 대해 “하위 기업의 사외이사는 자신을 ‘따뜻한’ 자리에 앉혀준 CEO에게 맞서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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