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먹거리’의 상징이 되다
‘안전한 먹거리’의 상징이 되다
"내 가족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만들고, 내가 잘 모르는 상품은 팔지 않습니다.”
‘바른 마음 경영’을 하는 남승우 풀무원 사장에게 윤리 경영과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그는 풀무원에서는 윤리라는 말 대신 투명성이란 용어를 쓴다고 했다.
“윤리란 말은 모호할 뿐더러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기업에 기대할 건 일반적인 윤리가 아니라 투명 경영과, 공정거래법에서 말하는 공정 경영입니다. 회계와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고 협력업체와 윈윈하는 경영을 하라고 요구해야죠.”
윤리 경영을 너무 이상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풀무원의 사훈은 바른 마음이다. 남 사장이 만들었다. 이 회사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도 ‘바른 마음(TISO) 경영’이다. TISO는 신뢰(Trust), 정직(Integrity), 연대의식(Solidarity), 개방(Openness)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바른마음경영은 이 네 가지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 바른 마음을 표방하다 보니 식품 안전과 관련한 사건이 터지면 타격이 더 크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풀무원은 어떻게 대응할까.
“진실을 밝히는 수밖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발표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죠. 바른 경영을 표방하고서 제대로 하지 않으면 리스크가 더 큽니다. ‘바르게 한다고 해 놓고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몇 년 전 풀무원이 농약 친 채소로 유기농 녹즙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였다. 소비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풀무원은 해당 농가를 대상으로 잔류 농약 검사를 실시한 후 결과를 그대로 공개했고, 오보를 한 방송사의 사과를 받아냈다. 1996년 풀무원 유기 농산물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고 한 소비자 단체가 발표했을 땐 백화점에 풀무원 브랜드로 유기 농산물을 납품하는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 후 정부가 유기농 사업에 대한 규정을 마련했고, 풀무원은 다시 유기농 신제품을 내놓았다. 99년엔 풀무원 두부에서 유전자 조작(GM) 콩 성분이 검출됐다고 소비자보호원이 발표했다. 당시 국내엔 GM 작물에 대한 공인된 검사 기법이 없었다. 풀무원은 일본에 샘플을 보냈다. 자체분석 결과와 마찬가지로 불검출이란 통보를 받았다.
남 사장에게 TISO에 준거한 경영을 하라고 귀띔해준 사람은 윤석철 서울대 명예교수(한양대 석좌교수)다. 지난여름 한 경제주간지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사상가로 뽑은 윤 교수는 남 사장에게 멘토 같은 존재다. 윤 교수가 쓴 책을 통해 그와 처음 만난 남 사장은 95년부터 해마다 그를 초빙해 임원 세미나 등을 열고 있다.
“투명한 회계, 투명한 지배구조, 직장 내 남녀 평등 같은 것이 TISO 경영에서 나왔습니다. 풀무원에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 시대 경영자라면 누구나 내면화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들이죠.”
투명 경영은 필요하지만 과연 비즈니스 논리에도 맞는 것일까.
“그렇게 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또 단기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리스크가 있어요. 장기적으로는 실적도 좋아질 것으로 봅니다.”
남 사장은 새벽 5시40분이면 일어나 7시 회사에 도착한다. 퇴근은 오후 5시 30분쯤 한다. 아침형 CEO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엔 그러나 야행성이었다고 한다. 새벽까지 책을 보다 눈을 붙이느라 오전 수업은 제쳤다. 그랬던 그를 첫 직장이었던 현대건설이 아침형 인간으로 개조했다.
새벽 6시 회의를 하는 회사를 다니는 동안 생체리듬이 바뀐 것이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임원은 될 줄 알았다고 했다. 풀무원에 몸담게 된 것은 경복고 동기인 원혜영 민주당 의원(현 원내대표)을 만나게 되면서다. 당시 시국사범이던 원 의원은 사회운동가인 아버지 원경선(풀무원농장 원장)씨가 유기농법으로 기른 야채를 팔려고 서울 압구정동에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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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직판장이 두부와 콩나물을 생산하는 ‘풀무원유기식품’으로 발전했다. 원 의원은 효소식품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가 세운 회사 ‘풀무원효소식품’에 친구인 남 사장이 투자를 했다.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현장에서 10개월 일해 번 돈이었다.
그 후 남 사장이 이 회사로 아예 자리를 옮겼고, 이 풀무원효소식품이 풀무원유기식품과 합쳐져 오늘의 풀무원이 됐다. 원 의원과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친구 따라 강남 간 격이죠. 우연히 원 의원을 만났다가 그의 권유로 투자를 했습니다. 한동안 낮엔 현대건설 직원, 밤엔 풀무원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그 회사가 부도 위험에 처하는 바람에 눌러앉았죠. 정작 원 의원은 정치판으로 가버리고. 저는 ‘수영장 이론’을 믿습니다. 말하자면 수영장 옆을 지나다가 떠밀려 빠진 셈이죠.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그런 식이라고 봅니다. 결혼, 사업, 전공 선택 등. 첫 직장인 현대건설에 입사한 것도 무슨 역사적 사명을 띠고 들어간 건 아닙니다. 사법시험에 네 번 낙방하고서 법관 꿈을 접고 나니 멀리 떠나고 싶더라고요. 사우디에 가고 싶었습니다.”
회사 경영을 맡고 나서 신선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공급한다는 풀무원의 정신을 받아들였지만 풀무원이 지향하는 이런 가치가 자신의 성향과 잘 맞는다는 것도 당시엔 잘 몰랐다고 했다. 풀무란 대장간에서 쇠를 뜨겁게 달굴 때 바람을 불어넣는 기구. 녹슬어 쓸모 없는 잡철도 풀무질을 해대며 두드리면 유용한 농기구로 거듭난다.
한국전쟁 후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떠돌던 사람들을 풀무질을 통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원경선 원장은 자신의 유기농 공동체 농장에 풀무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법학 공부는 뜻밖에 식품사업에 유용했다. 개념 법학을 하면서 쌓은 훈련은 논리를 세우고 가치를 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그는 말했다. 남 사장은 법학 전공자가 선택할 만한 업종으로 식품과 금융을 꼽는다. 정직하고 원칙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분야는 전통적인 규제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업종 모두 신뢰가 중요합니다. 식품은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고 금융은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번 금융위기의 본질은 금융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 관리의 실패입니다. 파생상품을 설계한 사람들이 책임을 저버렸고, 금융감독 당국은 미 식품의약국(FDA)이 하듯이 파생상품을 관리하지 못해 발생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식품 분야의 멜라민 파동 같은 거예요. 파생상품이라는 새로운 리스크가 생겨났을 때 이를 제대로 규제했어야죠.”
풀무원은 지난해 산업자원부가 주최하고 산업정책연구원이 주관하는 2007 코리아 브랜드 콘퍼런스에서 대한민국 브랜드대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풀무원은 국내 최초로 유기농을 시도한 풀무원 농장 시절부터 따지면 32년 된 브랜드다. 아흔넷의 현역 농사꾼인 원경선 원장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풀무원은 재료를 정직하게 고르고 제조 공정의 위생 상태에 많은 신경을 썼다.
유기농 식품 기업이란 비전을 제시한 남 사장은 80년대 말부터 일본 회사들을 벤치마킹했다. 10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일본에 120번 출장 다녔다고 했다. 당시 방문한 공장이 약 400곳. 해당 기업에 기계를 납품하는 회사의 기계를 사주는 조건으로 그 기업의 사장을 소개받았다. 주로 중소기업이었는데 다섯 회사 방문하면 네 곳은 공장을 보여줬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도 생식품업을 하는 회사는 거의 중소기업이다.
“당시 일본에 가면 우리와 하도 격차가 커 언제 따라가나 했습니다. 기술, 위생 상태, 업무에 임하는 전문성 등이 우리와 비교가 안 됐죠. 그게 20년 전 일인데, 지금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풀무원의 브랜드 가치는 얼마나 될까. 풀무원 측은 한 브랜드 컨설팅 업체에 평가용역을 맡기려 알아봤더니 몇 억원 든다고 해 아직 뽑아본 일이 없다고 밝혔다. 남 사장이 생각하는 브랜드란 평판이다. 브랜드 가치가 높다는 것은 평판이 좋다는 뜻이다. 기업의 성과는 일반적으로 재무제표로 평가되지만 궁극적으로 브랜드에 반영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벤치마킹하러 일본 출장 120번
“식품 소비는 보수적이라 사람들이 브랜드를 잘 안 바꾸는 편이죠. 풀무원은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를 담아낼 수 없으면 다른 브랜드를 씁니다. 그래서 수입 콩으로 만든 두부와 수입 참깨로 짠 참기름엔 찬마루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단체급식 사업엔 ECMD란 브랜드를 쓰고 있죠. 해당 브랜드의 고유한 가치가 담기지 않는데 그 브랜드를 쓰는 건 소비자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기만 행위입니다. CEO로서 진정성이 없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죠.”
풀무원과 찬마루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그는 풀무원 두부와 찬마루 두부의 차이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식품 소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이들이 소비를 주도하는 한 언젠가 사람들이 따라가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풀무원이 지향하는 가치와 풀무원의 구성원이 지향하는 가치가 수렴하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복지 수준이 높지도 않은 풀무원에 사람들이 남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보상 수준, 근무 조건, 그리고 기업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만족이죠. 우리는 건강과 우리 사회 내지는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중시하는 사람,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을 타깃 고객으로 봅니다. 그런 고객을 주 고객으로 삼고 이들을 확대해 나가는 게 풀무원의 비전이죠. 이런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연대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풀무원은 이 비전을 ‘로하스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정리했다. 로하스(LOHAS: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란 자기 자신의 건강과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생각하는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한다. 은퇴 후 비영리기구(NPO)에서 경영 업무를 맡아보는 게 남 사장의 꿈이다. 24년째인 CEO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돈버는 일 말고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데 활용해 보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1원 단위까지 치열하게 따지는 기업 말고 사회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NPO에서 비정형의 가치를 다뤄보고 싶습니다.”
그는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를 좋아한다. 네 번의 사시 낙방은 그에게 새옹의 아들이 낙마한 것에 견줄 만한 아픔이었다. 인생의 실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5년 동안은 사시 합격자가 발표되면 간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30년이 흘러 그는 대표적인 유기농 식품 기업의 오너가 됐다. 사업을 하기 위해 식품공학 석사가 됐고, 내친 김에 식품생물공학 박사학위까지 땄다. 법조계로 나간 그의 법대 동기들은 지금 다 재야에 있다.
“법조의 길을 포기한 지 5년 됐을 때 돌이켜 보니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풀무원 시작하면서 다시는 변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죠. 그 후 고시 공부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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