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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일수록 기본으로 공부에 길을 묻다

위기일수록 기본으로 공부에 길을 묻다

2007년 5월 삼성경제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구글의 에릭 슈미트 CEO는 오전 7시에 강연장을 가득 메운 800여 명의 한국 기업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그는 “경영자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게 한국 경제의 원동력인 듯하다”고 말했다. 복잡다기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CEO는 현 상황과 새로운 흐름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먼저 감지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재계의 화두인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수준에 그친다면 뒤처진다. CEO가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기업이 크든 작든 결국 CEO의 지식과 경험, 통찰과 결단력이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움의 깊이뿐 아니라 폭도 중요하다.

경영 이론만 익혀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수두룩하다. 예술과 철학, 문학, 역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배움이 필수 코스로 바뀌고 있다. 회사를 경영하는 단계를 넘어 인생을 경영하는 경지로 접어드는, 말하자면 ‘도’를 터야 하는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위기 속에 허덕이는 요즘 CEO는 ‘열공(열심히 공부)’ 중이다.

리더십 같은 경영 이론과 온갖 정보는 물론 자신을 비롯한 회사 안팎의 사람들까지 다시 찬찬히 뜯어보고 되새기고 있다. 한편으론 한가해 보일지 모르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른바 ‘공부하는 CEO’로 유명한 네 명의 CEO를 직접 만나 이들의 지혜를 나눠봤다. 사진 김현동·정치호·오상민 기자




학습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웅진그룹 윤석금(64) 회장은 평소에 “CEO는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백과사전 판매원에서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의 총수로 발돋움한 그는 첫 회사인 웅진출판을 세운 1980년 이후 해마다 관심 분야의 강의를 듣고 공부를 했다.

일주일에 평균 이틀은 교육을 받았다. 국내 최고경영자 과정과 조찬 강연회에도 거의 다 참석했다. 강의를 듣지 못할 때는 녹음한 테이프를 듣기도 했다. 윤 회장은 새로운 강의를 접할 때마다 경영 현장에 응용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 얼마 전에는 IGM 세계경영연구원 조찬 강연에서 아날로그인 CCTV를 대신할 디지털 영상 저장장치(DVR)를 개발해 성공한 아이디스의 사례를 접했다.

2008년 12월 15일 열린 IGM 세계경영연구원의 최고경영자 과정 송년회에서 만난 윤 회장은 “이런 중소·벤처기업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 하면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윤 회장은 공부하며 얻은 아이디어로 큰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외환위기 때 경기가 급랭하면서 정수기·비데 판매가 크게 줄어 그룹이 흔들렸다. 그는 그러나 당시 한 달에 2만 원을 받고 정수기를 빌려주는 렌털 사업을 시작해 위기를 극복했다. 인간개발연구원 조찬 강연회에서 들은 일본 가전기업의 렌털 사업 사례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윤 회장은 직원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웅진그룹이 한 해 공식적으로 쓰는 사내 교육비는 100억 원에 이른다. 예컨대 2006년부터 각 계열사 상무보급 임원을 대상으로 MBA 과정을 열었다. 임원들은 매주 월요일에 세 시간 동안 최신 경영 흐름과 마케팅 전략 등을 배우며 현장에서 적용 가능한 방법을 찾는다.

2008년 2월에는 참여, 공유, 개방이 기본 철학인 웹 2.0 개념을 마케팅에 적용한 사례를 적극 활용했다. 웅진쿠첸에서 소비자가 참여하는 광고를 기획한 것이다. 요리사 출신 가수 알렉스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신청한 소비자 100명에게 웅진쿠첸 밥솥으로 지은 밥을 제공하는 장면을 광고에 담아 인기를 끌었다.



5명 단위의 독서 토론 모임 활성화

윤 회장은 요즘 들어 미술 모임에서 좋은 디자인을 고르는 안목을 키웠다.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이 2008년 가을에 주도해 만든 이 모임에서 그는 한 번에 세 시간씩 20회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미술사 등을 배웠다.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박귀석 보덕건설 사장 등 10여 명의 CEO가 함께 했다.

윤 회장은 “코카콜라의 붉은색처럼 고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만한 색이나 디자인을 찾아내는 안목이 공부하지 않고 생기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2009년에도 공부와 직원 교육을 중단하지 않을 생각이다. 요즘 같은 위기일수록 공부에 투자해야 기업의 경쟁력이 커진다는 지론이다.

다만 회사 안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늘리고 조찬 세미나 등은 골라서 참석할 계획이다. 윤 회장은 “새해에는 경영 목표를 무리하게 잡거나 무모한 새 사업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며 “공부나 교육도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독서 토론 모임을 구상하고 있다.

2008년까지는 서울과 파주 등 각 계열사가 있는 지역에서 한 번에 20~30명의 팀장이 참여하는 독서 모임인 ‘문봉독서대학’을 열었다. 2009년에는 이 모임을 조금 바꿔 5명 정도가 참여하는 독서 모임을 여러 개 만들 계획이다. 말할 기회를 많이 주기 위해서다. 책은 경제·경영·베스트셀러로 고르려고 한다. “영업이란 직원들이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잖아요. 독서 모임에서 토론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고객과 시장이 영원한 스승



김효준 BMW그룹코리아 사장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고에 진학했던 김효준(52) 사장은 불혹의 나이에 방송통신대를 마쳤다. 그는 이어 2000년에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2007년에 한양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새삼스레 ‘간판’이 필요했을까? BMW그룹코리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라 굳이 학위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는 “현장에서 배우고 실천한 걸 후학에 전수하는 ‘지식의 이전’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는 공부를 할수록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이미 책에 잘 정리돼 있는 데다 교수들이 그걸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름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온 셈이었지만 공부를 하는 또 다른 핑계(?)도 생겼다.

그렇다고 강의실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학문적 지식에서 비롯된 통찰을 경영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진짜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여긴다. 다만 “어떻게 소화해서 실천하느냐는 오로지 CEO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김 사장은 배움은 어떤 상황에서 어려움을 헤쳐가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도구라고 비유한다.

요즘 같은 위기 때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늘 고민해도 언제나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는 “배움은 행여 위기를 극복할 지혜나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그것에 근접할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공부 교재는 다양한 사람과 산업이다.

성공과 실패의 숱한 사례를 유심히 듣고 살피면서 타산지석 또는 반면교사로 삼는다. 얼마 전 옛 헌병대인 육군수사단에 변화와 혁신이란 주제로 강의하러 갔다가 육군수사단 관계자가 “우리 고객은 피의자와 피해자 가족”이라고 하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김 사장은 고객에게 많이 배운다.

기업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니 사라고 하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객의 불평이 훌륭한 교과서이자 스승이다. 김 사장이 곧잘 아침 시간에 고객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듣는 것도 그래서다. 한번은 미국에서 공부한 어느 여교수가 BMW를 타던 유학 시절과 견줘 BMW코리아 서비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김 사장은 한 달 뒤 딜러 300명을 소집해 그 교수의 조찬 강연을 듣게 했다. 또 어떤 때는 고객의 불만을 학습 차원으로 바꾸기도 한다. 실무자가 어떻게 처리하고 대책을 세우는지 지켜보고 그 과정을 사례로 축적한다. 시장의 흐름과 변화는 좀 더 짜릿한 공부 대상이다. 본업인 영업과 직결돼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에 뉴7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400명의 초우량 고객에게 친필 초청장을 보내고 6주에 걸쳐 개별 시승 이벤트를 벌였다.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론칭 쇼 덕에 250명이 차를 구입했다. 시장에서 흔히 얘기하는 1대 1 마케팅을 벤치마킹 해 마련한 행사였다. 김 사장은 “모두 어렵다고 할 때 특별한 고객을 골라내고 브랜드 파워와 아이디어로 이들을 사로잡는 게 진짜 살아있는 공부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조찬으로 시작해 저녁 공부 모임으로 하루를 보내는 ‘재미 없는 삶’을 산다는 그는 “오페라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경영이나 오페라나 종합예술이란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란다. 2008년 11월에는 금액은 말할 것도 없고 판매대수에서도 혼다코리아를 앞질러 수입차 시장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2009년에는 큰 성장을 기대하지 않는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새로운 성장 계기와 고객을 창출하는 데 관심이 많다.



책 속에 답이 있다




이강호 한국그런포스펌프 사장
이강호(58) 한국그런포스펌프 사장은 2008년 10월 30일 정부와 경제 5단체가 주관한 ‘기업가정신 주간 선포식’에서 지속경영학회 회장상을 받았다.

이날 행사는 금융위기의 파도를 넘는 데 중요한 기업가 정신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 사장은 90년에 한국그런포스펌프를 맡은 후 한 해도 빠짐없이 매출을 늘려왔다.

한국그런포스펌프는 국내 고급 펌프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한다.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삼성동 아이파크 등 지난 10년 사이 지어진 국내 30층 이상 고층 빌딩의 90%에 이 회사 제품이 들어갔다.

지난 17년간 성장세를 이어왔지만 건설 경기가 얼어붙은 2009년은 만만찮은 해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장은 요즘 CEO의 리더십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2년 전에 읽었던 일본의 경제 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의 저서 <진실 리더십> 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다시 읽고 있다. 오마에 겐이치는 경제 위기는 심리적 요인이 크다며 불안감부터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CEO는 직원이 자신을 믿고 따라올 수 있도록 기업의 목표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구성원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그의 책을 읽고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2009년에 기존 계획대로 두자릿수 매출 성장률을 달성할 계획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금융위기나 건설사 부도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TV나 신문으로 자주 접해 알고 있는 얘기를 강조해봤자 불안감만 커지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처럼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며 사기를 북돋운다.

이처럼 이 사장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책을 꺼내 해답을 구해왔다. 육사 출신으로 카리스마가 강한 이 사장은 31세 때 무역회사인 하림통상 뉴욕지사장을 맡았다. 그는 “미국에서 현지법인 사장들과 경쟁하면서 책 속의 경영 전략과 경제 용어가 현실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경영 실전에 필요한 공부를 했다.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이 대표적이다. 7개 과정을 수료한 그는 2008년 봄에는 KMA 한국능률협회의 ‘와튼스쿨 최고경영자 과정’을 다녔다. 6개월간 한국에서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의 교수에게 배우고 미국에서 수료를 했다. 한 걸음 더 떼 아예 해외 대학에 직접 가서 배우기도 했다. 영국 애슈리지경영대학원, 미국 스탠퍼드대, 스위스 국제경영대학원 등의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쳤다.

그는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CEO가 갖출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유익하다”고 말했다. 특히 해외 대학의 과정은 세계 곳곳에서 모인 CEO와 정보를 나누며 인맥을 쌓는 좋은 기회였다. 이 사장은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제경영학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인 그런포스펌프 사장이 되면서 국제 경영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2000년에 동국대에서 국제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국대와 연세대에서 겸임교수를 지냈다. 그의 공부 열정은 끝이 없다. 그의 한 달 일정은 세계경영연구원의 평생교육모임인 MMP, 삼성경제연구소 조찬 세미나, 한국능률협회 최고경영자 조찬회 등으로 가득 차 있다. CEO로 일한 이래 가장 오래된 과목은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과 단 둘이 배우는 외국어 강좌. 무려 17년이나 됐다. 강사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 10년은 일본어를 배웠다. 이후 7년째 중국어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최신 사례 중심 강의가 인기
CEO들의 눈과 귀를 모으는 공부 과정은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대한민국 CEO만의 고유 문화로 자리 잡은 조찬회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강의를 하는 최고경영자 과정과 달리 대부분 한 달에 한 번 열린다. 경제연구소나 경영대학원, 기업 단체 등이 주최하는 조찬 모임에서부터 비공개 모임에 이르기까지 연간 3000건이 넘는 조찬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 CEO 조찬 세미나에는 1000여 명에 이르는 CEO와 임직원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다. 국내외 최신 경제겙嚥?흐름 등을 많이 다룬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주최하는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는 34년간 한 주도 빠짐없이 열렸다. 중소기업 CEO, 교수, 변호사 등 평균 100여 명이 참석하는데 경제겙嚥돛?물론이고 사회, 문화 분야 관련 강의도 자주 연다.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도 인기다. 특히 CEO 대상의 전문 교육기관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들은 최신 경영 사례를 많이 소개하고 있어 현장을 중시하는 CEO들에게 인기가 많다. 초기 과정을 주도했던 대학에서는 인문학 등으로 강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IGM 세계경영연구원의 최고경영자 과정은 인맥 형성보다 공부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지식클럽’이라는 과정에서는 강의 후 술자리를 가질 경우 퇴학 조치도 불사할 계획이다. KMA 한국능률협회의 와튼-KMA 최고경영자과정은 유명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의 교육 과정을 국내에 도입했다. 와튼스쿨 교수가 직접 와서 최신 경제 동향, 마케팅 전략 등을 교육한다.

수강자가 질문하면 교수와 다른 학생이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기후변화리더십 과정의 교육 내용은 기후변화 대처 방안에 중심을 둔다. 2기 과정에서는 정준양 포스코 사장이 직접 포스코의 기후변화 대응 사례를 발표했다.

- 신버들 기자



공부는 CEO의 숙명



김종훈 한미파슨스 사장
국내 최대 건설 감리회사인 한미파슨스를 이끄는 김종훈(60) 사장은 “CEO에게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한다. 자신을 아침형 인간이라고 소개하는 김 사장은 하루를 CEO 조찬 포럼, 독서, 박사 학위 논문 준비로 시작한다. 김 사장이 매달 잡는 일정은 모두 36개.

이 가운데 조찬 모임이 17개다. 한국능률협회, 삼성경제연구소, 서울시 창의포럼, 상공회의소, 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공학한림원에서 여는 조찬 모임에 참석한다. 따끈따끈한 경영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데다 다른 CEO를 만나 고민과 대안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CEO는 자기 사업의 세부 지식과 관련 업계의 동향과 흐름을 꿰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다 요즘은 다른 산업의 변화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융·복합 시대라 전혀 엉뚱한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라도 내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에요. CEO가 피곤할 수밖에 없어요.”

조찬 모임이 없는 날에는 논문 준비로 하루를 연다. 김 사장은 2004년 서울대 건축대학원 박사 과정에 등록했다. 틈틈이 공부해서 지금은 학위 논문만 남았다. 논문 제목은 ‘성공한 건설 프로젝트의 인자 분석’. 김 사장은 “잘 된 건설 공사를 분석하면 공통으로 나타나는 요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첩에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을 정도로 정신 없이 바쁘지만 그가 절대 빠지지 않는 두 가지 모임이 있다. 한국능률협회에서 주관하는 ‘지혜의 향연’과 삼성경제연구소의 ‘메디치21’이다. 두 모임의 공통점이자 특징은 인문학 강의라는 것이다. 지혜의 향연은 철학을 논하는 조찬 모임이다. 칸트, 헤겔, 괴테 같은 대사상가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다.

메디치 21은 김 사장이 가장 탁월한 강사로 꼽은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진행하는 강의다. 김 사장은 “CEO는 논리적 사고와 더불어 인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며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부족한 요즘이라 생각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는 인문학 강좌가 반갑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이런 강의와 더불어 김 사장이 평생 공부 스승으로 삼는 것은 바로 책이다. 그는 2006년에 배낭에 책을 가득 넣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산 속에서 두 달간 하루에 한 권씩 읽으며 회사의 진로 등을 고민했다. 그는 지금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주말에 시간이 나면 독서 삼매경에 빠지곤 한다.

그가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조서환 KTF 부사장의 <모티베이터> 다. 군에서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아온 저자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김 사장은 독서의 감동을 나누고자 회사의 모든 직원에게 인터넷 서점 계좌를 만들어 줬다. 직원들은 매년 15만 원 상당의 책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다.

단 매달 적어도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 김 사장은 고역이라고 여기는 직원도 있지만 직원 자신은 물론 회사에도 유익하다는 생각에 고집스럽게 직접 독후감 검사를 하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독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김 사장과 직원들이 책이나 공부 내용을 토론하는 모임도 활발해졌다.

이 회사는 차·부장급이 참여하는 시니어 원탁 모임과 아래 직원이 참여하는 주니어 원탁 모임을 매달 연다. 서로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자리다. 또 말단 사원부터 김 사장까지 모두 모여 토론하는 미래전략토론회도 매달 개최한다.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은 종종 회사 경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2008년 초 미래전략토론회에서 국내 건설 경기가 어려울 테니 해외로 적극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난상토론을 거친 끝에 김 사장은 외국인 직원을 늘리고 해외 마케팅을 강화했다. 이런 덕에 한미파슨스는 얼마 전 리비아에서 30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냈다.

예술·인문학에 빠진 여성 CEO

여성 CEO들은 약방에 감초 역할을 넘어 많은 공부 모임이나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양귀애(62) 대한전선 명예회장, 이어룡(56·사진), 대신증권 회장, 이화경(53) 롸이즈온 대표 등이 ‘열공’하는 CEO로 유명하다.

이들은 음악, 그림, 책 등에서 삶의 활력을 회복하거나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어 경영에 활용하곤 한다. 양귀애 명예회장은 오페라를 공부하고 이를 경영에 접목한다. 그는 수요일마다 예술의전당에서 오페라 강의를 듣는다. 2008년 12월 15일 IGM 세계경영연구원 최고경영자 과정 송년회에서 만난 양 회장은 “임직원들도 음악을 자주 접하고 신바람이 나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룡 회장은 미술 공부에 빠졌다. 2008년 가을부터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이 주도한 미술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교수를 초빙해 유럽과 미국의 미술사를 배웠다. 이 회장은 요즘 평소 임직원에게 미술에서 업무에 필요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다양한 그림, 조각 작품 등을 보라고 권한다.

오리온그룹의 외식 사업 부문 계열사인 롸이즈온의 이화경 대표는 경제겙嚥돛?물론 인문학 서적 등을 탐독한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부인인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오리온그룹에서 한 달에 두 번 정도 독서 토론 모임을 열고 있다. 각 계열사 팀장이 10명씩 돌아가면서 참석해 책에서 읽은 내용을 경영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 신버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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