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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CEO들

고개 숙인 CEO들

미국의 경제뉴스 전문방송 CNBC의 제임스 크레이머(미국의 유명증권분석가로 최근까지 주식시장 낙관론을 펼쳐 왔다)는 “어딘가엔 항상 호황 시장이 있다”는 말을 곧잘 한다. 한 부문이나 지역이 가라앉으면 어딘가 뜨는 곳이 늘 있게 마련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뜬 것은 비관주의뿐이었다. 39번째 모임이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이번이 마지막이 될 공산이 크다. 다보스 중심가인 프롬나데에서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아느냐며 영생을 얻을 사람의 명단(Book of Life)에 이름을 올렸느냐고 물었다.

전통적으로 세계 금융계와 정계 엘리트들이 모여 즐겁게 대화하는 이곳에서 그런 종말론적인 사고를 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보스 맨’은 그 속성과 직업상 낙관주의자다. 이 리조트 타운엔 늘 자신감이 흘러 넘친다. 그러나 올 한 해 위험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웃음을 보이는 곳이라곤 인적이 드문 스키장뿐이었다.

나는 메모장, 블랙베리, 소형 캠코더, 노트북 컴퓨터로 무장한 채 앞날을 낙관하는 최고경영자(CEO)를 찾기 위한 72시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WEF 개회 전날,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가 CEO들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앞으로 1년 동안 수익이 오를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불과 5명 중 1명꼴이었다(21%).

이론상 그들 중 최소 몇 명은 다보스를 찾았을 것이다. 경제위기를 무사히 넘긴 사람들만 이 회의에 참석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많은 CEO가 마치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마냥 얼굴이 해쓱했다. 다수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 항공기를 타는 ‘모욕’을 감수하면서 이곳에 발을 내디뎠고 이내 종말론의 물결이 그들을 덮쳤다.

헤지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로부터 역사가 니올 퍼거슨에 이르기까지 모두 치밀하게 구성된 재앙의 스토리를 들려줬다. 퍼거슨은 미국이 앞으로 10년간 극도의 정체를 겪을 운명이라는 대담한 전망도 서슴지 않았다. 경제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절망적인 미래를 읊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그래서 경제학을 ‘우울한 학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올해엔 대표적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처럼 경제위기를 정확히 예언했던 사람들이 주요 연사로 승격됐다. 산소가 희박한 이 알프스 산맥의 유행은 사람을 숨막히게 한다. 지난해엔 지속가능성과 탈동조화(미국경제가 정체돼도 신흥시장이 성장할 수 있다는 이론)가 주요 화제였다.

올해는 모두 도산과 불황을 이야기했다. CEO들은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에 쉬 눈에 띄었다. 돈을 많이 벌수록 더 편한 옷차림을 하는 풍경은 다보스 회의 참석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희한한 특징 중 하나다. 기자와 학자들은 CEO와 금융계 거물들과 어울릴 것이라는 기대에서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맨다.

CEO와 금융계 거물들은 기자나 학자들을 상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캐주얼한 차림을 한다. 그러나 나는 CEO들을 만나면서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느낌이었다. 겉도는 대화, 거북한 침묵, 존재에 대한 고뇌가 두드러졌다. 항공사·자동차·물류업계 CEO들의 만찬에선 참석자들이 버터 대신 차라리 독버섯을 식탁에 올리자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청산 절차를 밟고 있는 전자제품 유통업체 서킷 시티의 최대 경쟁사인 베스트 바이의 CEO 브래드 앤더슨은 짐짓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타고난 낙관주의자이지만 단기적인 전망은 어둡다”고 그가 말했다. 사모펀드의 한 거물에게 미래를 낙관하는 CEO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스티브 슈워츠먼이 꽤 즐거워 보이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이벌을 향한 비아냥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슈워츠먼이 CEO를 맡고 있는 블랙스턴 그룹은 지난 1년 사이 주가가 75%가량 떨어졌다. 동료와 함께 있는 슈워츠먼을 만나 다시 미래를 낙관하는 CEO를 아느냐고 물었다.

터키 업체들이 제법 버티는 듯하고 인도네시아 쪽도 있을지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인도네시아 CEO를 찾아보라”고 슈워츠먼이 조언했다. 그런 인도네시아 CEO는 만나보지 못했지만 한 인도 제조업체의 CEO는 금융위기 덕에 부품값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직 종사자들의 인맥관리(networking) 사이트 링크드인의 CEO 레이드 호프먼은 2009년에 수익과 고용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인맥 형성은 경기변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가 도산한 뒤 “그 직원들이 모두 우리 사이트에 가입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고도 했다. 덴마크 풍력터빈 메이커 베스타스의 CEO 디틀레브 엥겔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레 앞날을 낙관했다.

이미 세계 최대의 풍력 에너지 시장인 미국이 대체 에너지 사용 의무화와 인센티브를 더 확대할 전망이라서 향후 규모가 더 커질 듯하다는 얘기였다(그러고 보면 정말 언제나 뜨는 시장은 있는 모양이다). 베스타스는 콜로라도에 공장을 건설 중이며 미국 내 고용인원을 현재 1300명에서 2010년 말엔 40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유럽의 재하청업체 다수를 중국으로 돌려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미국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불참한 이번 모임에서(오바마 정부의 참석자 중 밸러리 재럿 백악관 선임 보좌관이 가장 고위직이었다) 대범하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정말 심각하게 더 악화되고 있다는 게 압도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희망의 불씨일지도 모른다. 어느 모임에서 인도의 부호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다보스에서 어떻게 의견이 모아지든 지난 수년간 한 번도 맞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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