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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디에 투자하란 말인가?”

“대체 어디에 투자하란 말인가?”

어려운 경제가 정치지도자의 결단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우문 같지만 지금 한국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여당 대표와 기획재정부 장관이 잇따라 기업들에 투자를 요청하고 나섰다. 신문들도 쌓아둔 돈(유보금)을 거론하며 기업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겉으로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는 기업들은 속앓이만 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제5단체장들과 만나 인사말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시곗바늘 반대 방향으로 이희범 무역협회 회장, 윤 장관,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지난달 19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신년기자회견을 지켜본 기업인들은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박 대표는 회견 첫머리를 “대기업 여러분들께 호소 드린다. 투자해 주시라. 여러분들 회사에는 100조원 넘는 투자 가능 자금이 있다고 들었다”며 “여러분이 투자해야 수많은 근로자에게 희망이 생기고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했다.

정국을 책임지는 여당 대표로서 경제상황의 급박성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무) 정신까지 언급하면서 “투자 환경이 좋을 때는 누가 투자를 못 하겠느냐”며 “설령 여러분이 투자해서 이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은 여러분 가슴에 사랑과 명예의 훈장을 달아드릴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오늘 즉시 금고문을 열어주시기 바란다”고까지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당장 금고문을 열고 투자하라는 ‘위협’으로 들릴 수도 있다. 박 대표는 5일 뒤인 지난달 24일 경제단체장들과의 비공개 면담에서 “어려울 때 대기업들이 국민의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앞장서 투자한다면 국민은 사랑과 존경의 메달을 가슴에 달아드릴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경제계 인사들을 불러놓고 직접 주문한 셈이다. 같은 날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도 “기업들이 고용과 투자의 중심역할을 해 달라”고 경제5단체장에게 요청했다. 이번에는 사실상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장관이 한 말이라 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기존 설비도 남아도는데 웬 투자?

경제가 어려워지고 특히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피해가 먼저 돌아오면서 정치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는 대기업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시중의 단기부동자금 규모는 좁게 보면 200조원, 범위를 넓게 잡으면 최대 50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상당액이 법인자금인 것으로 금융권은 추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단기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 설정액은 지난달 19일 현재 124조3158억원으로 연일 사상 최대치를 경신 중이다. 이 중 70% 정도는 법인자금으로 분류된다. 또 은행의 실세요구불 예금 잔액은 지난 1월 말 기준 63조6879억원으로 지난해 11월 이후 3개월 연속 증가세며, 증권사의 자산관리계좌(CMA) 잔액도 지난달 13일 현재 35조2343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은행의 수시입출금식예금(MMDA) 180조원과 양도성예금증서(CD) 및 환매조건부채권(RP), 표지어음 등 시장성 수신 잔액 120조원도 크게 보면 시중의 단기유동성에 포함되는 지표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550여 개 상장사의 내부유보금이 360조원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이 중 상당액이 기업들의 자금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신문들도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대기업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일부 신문은 칼럼이나 사설에서 기업 총수들의 사면과 투자를 연관 지어 문제 삼기도 하고, 대기업의 용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기업의 투자 없이 경제가 살아나기 힘들다는 논리는 납득이 간다. 한 경제 전문가는 “정치권이나 정부 입장에서는 그런 말을 할 만큼 현 상황이 어렵다”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기업들의 입장은 좀 다르다. 공식적으로는 “정부와 잘 협력해 난국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부드럽게 응수했다. 사석에서는 좀 다른 생각이 나온다. 한 대기업 임원은 “정부의 그런 이야기가 부담스럽다. 계열사별로 복사용지와 종이컵까지 줄이는 판에 투자가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생산축소, 공장 가동 중단 등 기존 설비도 다 못 쓰는 판에 돈을 풀어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전무는 “정부에서 대기업의 투자를 강조하는데 어디다 투자하라는 것인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는 물론 은행, 증권, 소매업체까지 대규모 인력감축과 공장폐쇄를 하고 있고, 일본의 도요타, 소니도 감원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은 고용을 유지하고 투자를 지속하는 등 이미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경련이 집계한 600대 기업의 올해 투자규모는 86조8000억원으로 지난해(89조원)보다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2007년(75조원)보다는 16% 정도 늘어난 금액이다. 이 전무는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감안하면 이 정도 투자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민간 경제연구원의 한 임원은 “불황이라 재고가 늘고 생산설비가 남아도는데 투자하라는 것은 기업에는 치명적이고 국가적으로도 낭비”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는 기업의 유보자금을 여유자금으로 보고 있지만 매출이 줄고, 금융환경의 불확실성이 늘고 있는 지금은 생존자금으로 봐야 한다”며 “그런데도 정부가 마치 대기업이 돈이 있으면서 투자를 안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회불안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투자할 수 있는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승철 전무는 “내수산업이고 고용효과가 큰 의료, 교육, 관광업에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정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앞장서서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기업의 ‘야수적 충동’부터 살려야

또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도 정부 주도로만 할 것이 아니라 민간이 참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등 투자할 만한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기업 측에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기도 한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지난달 24일 박희태 대표와의 비공개 면담에서 “재정지출 중에서 경기부양책을 위한 지출이 GDP의 5.8%밖에 되지 않는 51조원”이라며 “GDP의 5.7%에 불과한 이 비율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 중국에 비해서도 상당히 낮다”며 정부가 경기부양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했다.

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정부가 사회적 일자리나 재취업훈련, 사회보장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면서 이 위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기업들은 투자하지 말라고 해도 투자한다”면서 “불황 때 투자했다 망하고 호황 때는 돈이 없어 투자를 못하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국가경제를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또 정치권에서 경제위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수십 년씩 기업을 해온 사람들이 그 말 한마디에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CEO 출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정부치곤 순진한 생각이다. 흔히 기업인들이 불확실성 속에도 과감하게 뛰어드는 ‘야수적 충동’이 있어야 경제가 번영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야수적 충동을 강조한 케인스도 “기업인에게 호의적인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경제적 번영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기업은 투자할 곳을 찾고, 정부는 투자에 방해되는 요인을 찾는다면 ‘야수적 충동’이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반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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