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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본연의 모습으로…

럭셔리 본연의 모습으로…

현재의 금융붕괴를 경기하강, 침체, 불황 등등 어떤 완곡어법으로 불러도 좋다. 하지만 그 어두움 속을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일은 참으로 침울한 고역이다. 그런 위압적인 불안 속에서 ‘럭셔리’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삶이 제공하는 좀 더 나은 부분들이 주는 작은 즐거움으로 활기를 되찾는 일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그럼에도 럭셔리와 우리의 관계는 이미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보자.

소유물들을 이용해 지위를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싶은지 알려주는 공공연한 방식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과거엔 ‘성공이 성공을 낳는다(Nothing succeeds like success)’는 옛 격언이 요트, 제트기, 미술품 같은 전리품의 획득을 통해 끊임없이 보강될 필요가 있었다.

메릴린치의 마지막 회장 존 테인이 집무실 리모델링 비용으로 120만 달러를 쓴 일도 18개월 전이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행동이 필리핀의 전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구두업계에 보낸 ‘영웅적’인 지지(3000켤레나 됐다고 한다)와 로마를 집어삼키는 불길을 보며 악기를 연주한 로마 황제 네로의 뻔뻔한 행위 사이의 어디엔가에 속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오랜 시간 일하고 떼돈을 버는 일을 미덕이라고 이해했다(사실은 오해다). 한동안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현상유지’의 공모자였다. 세계의 거부들이 보란 듯이 흥청망청 돈을 써대면서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고대 로마의 경기장에 온 듯 넋을 잃고 구경했다.

유명인사 문화가 확산되면서 우리는 그들의 눈꼴사나운 사치를 눈요기 삼으며 그들의 용모와 습관을 모방하려 했다. 우리는 마치 다중언어 전문가처럼 어떤 언어로 된 브랜드도 올바로 발음하려 했다. 그러면서 럭셔리는 점차 하나의 상품으로 변질됐다. 더 많은 사람이 그 대열에 합류하도록 ‘럭셔리의 대저택’은 출입 문턱을 기꺼이 낮춰줬다.

만약 초고급 상품을 구입할 처지가 못 된다면 초보자용 코스에서 시작하면 됐다. 내가 ‘초보자용 럭셔리’라는 말을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 이런 럭셔리의 상품화가 명백한 모순어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위나 재산을 숭배하는 속물이다. 따라서 진정한 럭셔리를 원한다. 세련되고 신비로운 무엇,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원한다고 모두가 갖지는 못하는 무엇을 말한다. 어쩌면 심리적 연약함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럭셔리가 좋은 장사가 되지는 않는다. 근년 들어 럭셔리 부문이 호황을 누렸지만 부분적으로는 비교적 감당할 만한 가격 덕분이었다.

브랜드가 부적 같은 의미를 띠면서 브랜드 그 자체가 목표가 됐다. 루이뷔통을 예로 들어보자. 뷔통은 19세기 파리에서 여행용 가방을 만들었다. 그가 독창적이고 실용적이며 우아한 여행용 가방을 만든다는 명성이 자자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그 명성이 브랜드의 힘에 압도됐다.

지금 루이뷔통 브랜드는 여행용 가방만이 아니라 잔돈 지갑부터 고급 패션까지 다양한 상품을 거느린다. 브랜드가 그 고유의 ‘안심 지역(comfort zone: 특정 행위를 불안 없이 행하는 심리적 공간 한계)’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그 브랜드가 원래의 전문 분야를 초월해서도 정당성을 누린다는 사실을 고객에게 확신시키려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루이뷔통은 남들이 샘내는 입장에 있다. 새로운 사업 영역을 확보하려는 원정을 오래전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루이뷔통이 내보내는 광고를 보라.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원래 브랜드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마케팅에서 말하는 ‘핵심 역량(core competency)’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내용이다(열대 섬을 배경으로 파나마 모자를 쓴 숀 코너리를 등장시키며 “전설로 변하는 여정도 있습니다”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받은 명품 자동차 시장도 마찬가지다. 벤틀리는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 온 브랜드다. 벤틀리 자동차와 그 차를 몬 사람들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냈다. 한동안 벤틀리의 멋진 검은색 빈티지 터보 자동차 한 대를 직접 소유하려고 진땀을 빼기도 했다. 결국 금전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벤틀리의 프란츠 조세프 패프겐 회장은 잘 알려진 원래의 핵심역량으로 돌아가는 전략으로 금융위기에 대처한다고 말했다. 벤틀리의 경우 그런 전략이 무엇을 의미할까? 멋진 새 장치를 개발하는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보다 개성 있는 수제품 자동차를 만드는 독특한 기술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물론 벤틀리도 최첨단 기술을 마다하지 않지만 브랜드의 특성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사용한다. “기술을 먼저 개발한 뒤 그 기술을 원하는 고객을 찾기보다는 고객이 원하는 자동차를 제공해야 한다”고 패프겐 회장이 말했다. 럭셔리 업체들이 현 위기를 무사히 넘기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노선이다.

요컨대 브랜드의 전통과 명성으로 상품을 재편성하는 과정을 말한다. 브랜드 확장에 착수하기보다는 독특한 방식으로 특별한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까지는 불황과 무관한 사회 계층이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지금은 의심을 산다. 특히 돈 있는 사람들조차 세상의 눈초리를 의식해 부의 과시를 꺼리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케이크 생각이 갑자기 난다(사치와 허영의 대명사였던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리는 국민을 보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럭셔리 피라미드의 최고점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일화적 증거가 나온다. 얼마 전 스위스 명품 시계 위블로의 장 클로드 비버 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금융위기의 타격을 피할 길은 없지만 10만 스위스 프랑(약 1억1000만원) 이상 가는 시계를 팔기가 그보다 낮은 가격대의 시계보다 더 쉽다고 말했다. 또 이탈리아 나폴리의 최고급 맞춤 신사복점 주인 마리아노 루비나치는 부자 고객 중 일부가 새 옷을 꾸준히 주문한다고 귀띔했다. 금융위기의 심리적 타격을 일단 소화하고 나면, 그리고 재정 피해를 정확히 따져보고 나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현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동굴 속에 살던 인간이 최초로 동물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를 배우자의 목에 걸어주었을 때부터 우리는 때때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실생활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로 보상해 주기를 즐겼다. “아내나 약혼자에게 또 다른 다이아몬드 반지를 왜 사주겠느냐?”고 제네바 보석상 쇼파드의 공동사장 카롤린 슈펠레가 수사적으로 물었다.

“물론 금융위기로 다치지 않은 사람이 있고 그들이 사랑에 빠지면 미래의 아내에게 멋진 반지를 사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럭셔리를 갈망한다. 단지 우리의 욕구가 절제력을 벗어났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제 재조정기가 다가온다.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고 진정한 럭셔리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만든 ‘브랜드 잡동사니’들을 말끔히 쓸어내는 시기다.

특별하고 희귀한 럭셔리는 우리에게 마술을 부린다. 누구나 쉽게 접근해서 진부해지면 그 마술은 힘을 잃는다. 언젠가 전설적인 파리의 수제 맞춤 브랜드 샤르베의 주인 안-마리 콜방에게 향수 판매대리점을 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구입하게 되죠.”

그녀는 지나친 친숙함이 럭셔리의 진부화를 부추겨 그 마술적인 힘을 빼앗아 간다는 점을 간파했다.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럭셔리도 그렇다. 그러나 옛 영화 ‘오로지 최고일 뿐(Nothing but the Best)’에 나오는 좀 더 냉소적인 대사가 더 마음에 든다. 1964년 제작된 그 영화에서 앨런 베이츠가 출세하려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로 나와 삶의 영원한 진실을 토해낸다.

“현실을 직시해야지. 세상은 더럽고 악취가 진동해. 하지만 그 속에 굉장한 무언가가 있어.” 난 그 대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라틴어로 번역해 내가 만드는 계간신문 핀치스 쿼터리 리뷰의 모토로 삼았다. 지금 세상이 특히 더럽고 악취가 진동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그 굉장한 무엇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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