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로레알’ 사로잡은 25살 중소기업
100살 ‘로레알’ 사로잡은 25살 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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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강호’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퇴직자 신분. 그는 갈 곳도, 머무를 곳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동아줄마저 끊길 판이었다. 1984년 윤재구 KCI 회장(76·당시 미원상사 전무)은 눈앞이 캄캄했다.
청년 시절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미원상사에서 정년퇴직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51세 때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가족도 “이제는 푹 쉬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기업인은 경영일선에서 뛰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 ‘퇴직자’ 신분으로 전락한 윤재구 회장은 자신의 인생열차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 뜻이 없었다.
퇴직 이듬해인 1985년 그는 주위의 숱한 만류를 무릅쓰고 KCI(당시 건창화학)를 설립했다. 말이 좋아 회사지 실은 165㎡(50평) 규모의 창고가 본사. 직원은 단 두 명뿐이었다.
“출발은 비록 초라했지만 아이템은 확실했죠. 샴푸·린스·매니큐어 원료를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이 원료를 독자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세계에서도 몇 개 안 됩니다.”
정년퇴직자의 야심 찬 도전
그러나 원료 개발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개발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었고, 자금·인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돈키호테식’ 도전 대신 ‘개구리 경영법’을 택했다.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 몸을 바짝 움츠리듯, 넉넉한 개발자금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기 위해선 ‘밥벌이’가 먼저였다. 먹고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던 것. 그가 찾아낸 ‘밥벌이 아이템’은 세제 계면활성제. 계면활성제는 일종의 유연제로, 물과 기름을 섞어주는 원료라고 생각하면 쉽다. “세제 계면활성제를 월 4~5t 생산·판매해 회사 운영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죠. 원료 개발비용을 빼고도 직원 두 명에게 넉넉한 월급을 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따라 원료개발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됐죠.”
KCI가 설립된 지 5년 만인 1990년. 이들은 첫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름하여 매니큐어용 원료 ‘레진(Resin)’. 이는 매니큐어의 광택과 접착력을 유지시켜주는 핵심 원료다. 국내에선 최초, 해외까지 포함하면 세 번째 개발이었다. 품질에 자신감을 가진 윤 회장은 곧장 ‘레진 샘플’을 세계 40여 개국에 뿌렸는데, 뜻밖에도 미국 굴지의 화장품 업체가 답변을 보내왔다.
“검토 결과 품질이 좋으니 납품하라.” KCI는 그해 월 16t의 레진을 이 업체에 납품했고, 연 96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했다. “우리 제품을 써 달라고 선물을 보낸 것도 아니고, 하물며 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았어요. 그냥 샘플을 보냈을 뿐이었죠. 그래서 ‘품질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KCI의 첫 개발품 매니큐어용 원료 ‘레진’은 그야말로 효자제품이다. 이를 발판으로 KCI의 수출 물꼬가 트였을 뿐 아니라 안정적 매출 기반도 마련됐기 때문이다. KCI 레진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42%. 명실상부한 세계 1위다. 국내시장은 100% 독점하고 있다. 매니큐어 원료 시장을 뚫은 윤 회장에게 남은 목표는 이제 샴푸·린스 핵심원료 ‘폴리머’(보습 및 정전기 방지 원료)의 개발. 이는 KCI가 사활을 건 프로젝트였다. 세계 수요가 연간 1만t에 이르는 폴리머를 생산하지 못하면 제2, 제3의 성장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았다.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다국적 기업 ‘다우케미컬’만 생산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윤 회장의 사전엔 포기란 없었다. “안다고 잘하는 게 아니라 몰라도 하려고 하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폴리머 개발에만 쏟아 부었다고 한다.
개발인력도 두 배 이상 늘렸다. 뼈를 깎는 노력은 알찬 열매를 맺는다고 했던가? 1995년 KCI는 폴리머 개발에 성공했다. 1991년 개발을 시작한 후 4년 만의 쾌거였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매니큐어 레진 때와 마찬가지로 샘플을 세계 각국에 보냈죠. 그런데 세계 화장품 1위 업체 ‘로레알’에서 미팅을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회사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죠.”
하지만 천운은 윤 회장을 외면했다. KCI의 폴리머는 로레알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불합격은 수차례 계속됐다. 곳곳에서 ‘포기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윤 회장은 꿋꿋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신조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폴리머 연구개발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러길 7년째, 로레알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왔다. “품질검사에서 합격했다. 이제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업력 100년의 회사 로레알이 아직은 신생기업(당시 업력 16년)에 불과한 KCI의 기술력을 인정한 셈이다.
KCI는 현재 로레알에 연 200t의 폴리머를 수출한다. 세계 곳곳에 위치한 로레알의 15개 샴푸·린스 생산공장에 폴리머를 공급하는 국내 유일의 회사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다우케미컬에 이어 2위(15%)를 달리고 있다.
KCI 신성장동력은 ‘유채’
로레알의 납품업체로 선정된 후 KCI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글로벌 생활용품기업 P&G·유니레버·존슨앤존슨의 거래업체로 선정됐다. 이 회사가 개발·생산하는 폴리머(제품명 PQ10)는 세계 일류 상품 중 하나로 각광 받고 있다. 글로벌 화장품 원료 유통회사 프랑스 로디아와 ‘PQ10 구매계약’을 체결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매출도 2003년 91억원에서 2008년 224억원으로 매년 20%가량 성장했다. 올해는 300억원의 매출이 기대된다. 최근 5년간 이익률(법인세전)이 19%에 이를 정도로 수익성도 좋다. 매출의 85%를 차지하는 수출실적도 지난해 189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29%(146억원) 늘었다. 재무건전성이 좋은 것도 강점.
이 회사의 부채비율은 63%(2008년 말 기준)에 불과하다. 윤 회장은 “로레알에 폴리머 수출을 시작한 후 매출(수출액), 순이익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며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24년 연속 흑자기록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KCI가 글로벌 혹한기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기술중시경영’ 덕분이다. KCI의 연구개발(R&D) 투자비중은 매출액의 5%가량이다.
80명의 직원 중 연구개발인력이 무려 20명에 달한다. ‘인재중시경영’도 KCI의 쾌속질주에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연봉 수준은 대기업 못지않다. 자녀 양육비(20만원), 부모·처부모 교통비(각각 5만원) 등 복지혜택도 많다. 정년도 보장된다.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75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 KCI는 올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른바 ‘유채 프로젝트’를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기술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미 보유한 유채 관련 특허만 3개. 유채를 이용해 BTAC(계면활성제의 일종)·바이오디젤(대체 원료)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도 확보했다. 윤 회장은 “유채를 활용해 바이오디젤 원료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에 언제든지 대체에너지 사업추진이 가능하다”며 “유채 프로젝트는 KCI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 회장의 꿈은 KCI를 세계 최고의 생활화학 전문기업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최고’의 해석이 남다르다. ‘넘버 원(number one)’이 아니라 ‘온리 원(only one)’이다. KCI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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