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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안녕~, 피맛골”

[Seoul Serenade] “안녕~, 피맛골”

조선시대 한국사회는 크게 양반과 상민 집단으로 나뉘었다. 양반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모든 이를 상민으로 여겼다. 두 집단은 각기 자신만의 미덕과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양반은 주로 유교적 전통에 기초한 나라의 높은 이상과 정신적 가치를 대변했으며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다. 동시에 그들은 거드름을 피우고 형식을 중시했으며, 대개는 ‘정직하게’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상민들을 경시했다.

어떤 면에서 양반은 다른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동에 빌붙어 사는 게으른 집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양반들이 ‘고상한’ 삶을 영위했다면 상민들은 말 그대로 ‘척박한’ 삶을 살았다. 상민들은 물론 양반처럼 세련되거나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평소 험한 말을 하거나, 밥이나 김치를 게걸스럽게 먹는 등의 ‘거친’ 매너는 양반 다수가 느끼는 경멸감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더 관대한 시각에서 보면 상민들은 놀랍게도 양반의 그런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만의 흥겨운 삶을 영위했다. 판소리, 탈춤, 줄타기 등에서는 활력이 샘솟는 그들의 해학과 천연덕스러운 세계관이 잘 묻어난다. 양반들조차도 상민들이 조선사회의 존립에 필수적인 생산의 근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새로운 건국과 함께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는 보다 유연하고 경제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구조로 대체됐다. 조선의 양반 자리는 돈 많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차지했다. 그들 중 부정한 방법으로 그 위치에 오른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반면 상민 정신은 ‘서민’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한국사회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층과 서민층 간의 긴장이 지속됐다. 태극기의 음극과 양극처럼 서로 조화를 유지하기보다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간극이 계속 심화되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 이길지는 늘 자명하다. 필자가 1996년 이후 줄곧 살아온 서울 도심의 종로만큼 두 계층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맛볼 수 있는 곳도 드물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 종로 바닥에서도 서민문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피맛골을 들 수 있다. 이곳은 그동안 도시개발의 틈바구니에서 늘 걸림돌이 됐고 마침내 마지막 흔적마저도 사라지기 직전이다. 한국의 서민과 일부 언론도 피맛골의 몰락을 슬퍼하곤 한다. 나도 자랑스러운 서민의 한 사람으로서(아니면 심정적으로는 영원히 구제가 불가능한 ‘상놈’ 중 한 명으로서) 서글픔이 뼛속까지 스며들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피맛골이 종로의 서민들을 아직도 호령하려는 옛 양반들의 ‘혼령’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려 한다. 한국인이라면 익히 알 듯 피맛골은 한때는 종로1가에서 종묘, 더 나아가 종로5가까지 이어진 ‘역사적인’ 골목이었다. 그 역사가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골목의 이름 속엔 기존 질서에 대한 상민계층의 냉소적인 저항정신이 깃들어 있다.

피맛골은 말 그대로 “말을 피하는(避馬) 골목”이라는 뜻이다. 그 길은 종로의 상민들이 조선 조정의 고위관리나 지체 높은 사람들(양반)이 말을 타고 지나갈 때마다 의무적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땅에 엎드려 절해야 하는 엄격한 사회적 의무를 피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한다. 따라서 피맛골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상민은 양반이 지나가면 무조건 하던 일을 멈추고 항상 몸을 낮춰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일종의 반기다(양반이 지나갈 때마다 굽실대는 행위는 분명 성가시고 공허한 요식행위로 여겨졌으리라).

세월이 지나면서 피맛골은 일종의 ‘사교 중심지’로 바뀌어갔다. 대개는 서울의 힘없고 못사는 사람들을 겨냥한 값싼 술집과 음식점이 모인 곳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피맛골을 서민들의 진정한 안식처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서울의 도심재개발 계획에 따라 피맛골의 여러 구간이 파괴되고 서구 스타일의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종각역 옆에 위치한 SC제일은행 건물과 맞은편에 위치한 삼성증권의 종로타워가 좋은 예다(서민문화가 막강한 금융업계에 맞설 힘은 없다). 그리고 현재 종로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괴물처럼 생겼다는 평가를 받는 업무용 고층빌딩 ‘종로타운’이 종로1가의 피맛골 상당 구간을 차지하며 2년 전 문을 열었다.

종로타운의 개발회사인 르메이에르(영어로는 “The Best”라는 뜻)는 마치 보존주의자들의 요구에 양보라도 하듯 옛 피맛골 주변 지역에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피맛골을 마주 보는 거대한 세븐일레븐이나 치장이 요란한 서구식 카페가 600년 역사에 빛나는 피맛골의 문화적 유산과 전통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종로타운’의 건설은 피맛골의 전면적 파괴의 서막에 불과했다. 지난해 여름 이후 청진동 대부분이 허물어져 내렸고 대신 고층건물을 위한 터 다지기 공사가 시작됐다. 지난 5월 초엔 피맛골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구역마저 절반 넘게 철거됐다. 더구나 요사이엔 종로2가와 종로3가로 이어지는 피맛골 구역 대부분이 요상한 노래방, 호프집, 그리고 은밀한 모텔들의 온상이 된 사실을 아시는지?

그래도 교보빌딩 바로 뒤편에 있는 골목은 남아 있는 피맛골의 마지막 볼거리라 할 만하다. 60년 세월이 곳곳에 쌓여 있는 열차집과 30년 전통의 ‘대림’을 포함해 추억이 서린 술집 몇 곳이 아직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열차집이 자리한 3층 건물의 주인은 개발사 측과 가격을 협상 중이다. 행여 몇 달 안에 이 건물마저 팔린다면 피맛골에서 가장 유명한 집들마저 서민의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피맛골에 대한 나의 추억은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 고층빌딩군이 하나 둘씩 들어서면서 종로통은 훨씬 더 ‘차가운’ 곳으로 변해 버렸지만 피맛골에 대한 내 기억은 ‘따뜻한’ 것으로 남아 있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인터넷 카페 중 하나가 열차집 바로 위층에 문을 열었다. 그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열차집 주인인 윤해순씨와 우제은씨의 아들인 윤상건씨가 바로 그 카페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인터넷 카페는 여러 해 동안 한국에 사는 외국인(엑스팻)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커피와 와인 바까지 갖춘 그곳은 엑스팻들의 사교장소였으며 요즘 흔해 빠진 PC방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1998년 말과 99년 초 내가 ‘맥시멈 코리아’(1999)란 책을 썼을 때만 해도 나는 컴퓨터가 없어 이곳에서 진을 치고 텍스트를 타이핑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동시에 전 세계의 친구와 가족들에게 내 글에 대한 반응을 떠볼 때도 나는 이곳을 즐겨 찾았다. 펑크 그룹 ‘오프스피링’의 히트곡 ‘프리티 플라이’가 실내에 울려 퍼지고 내 아드레날린이 용솟음치던 때 나는 전 세계로 e-메일을 보냈다.

몇 년 뒤 나의 두 번째 책 ‘발칙한 한국학’(2002)의 출판 계약식도 그 열차집에서 가까운 ‘서린낙지’집에서 열렸다. 혓바닥을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 고추 맛 때문에 땀을 몇 바가지나 흘렸건만 그날 우리가 먹은 낙지 맛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1951년 문을 열어 196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열차집은 어쩌면 광화문 일대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막걸리집인지도 모른다.

가게 주인은 지금도 오후 서너 시만 되면 녹두를 직접 갈아 빈대떡을 만든다. 여주인 우씨에 따르면 친근감이 드는 낡은 소나무 의자와 촘촘히 들어선 테이블은 1970년대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당시 이곳의 단골손님은 이 일대에서 일하던 말단 공무원과 기자들이었다. 단돈 몇 천원이면 요기도 하고 목을 축일 겸 막걸리를 실컷 마실 수 있기에 이곳의 터줏대감들은 실은 ‘상민’이었다.

70~80년대 독재의 칼날이 시퍼렇던 시절, 그들은 늘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몸을 한껏 ‘낮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막걸리처럼 하얗게 칠한 열차집 벽에다 자신들의 넋두리를 낙서로 표현했다. 최근 그곳에 들렀을 때는 친구의 등 너머로 보이는 중년남자 세 명이 벽에다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썼다.

나로선 그들의 마지막 방문이 최고의 순간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피맛골에서 내가 가장 즐겨 찾는 또 다른 가게의 주인은 1978년부터 남편과 함께 ‘대림’이라는 생선구이 가게를 운영해 온 석송자씨다. 1996년 말 열차집과 바로 이웃한 그 집에서 나는 친구인 새라, 리자와 함께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 후 석씨 아줌마는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늘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생선을 굽거나, 이웃 가게 주인들과 밖에서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노출’을 다소 즐기는 듯한 석씨의 가게 벽엔 TV에 출연한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석씨 아줌마 정도라면 한국을 알리는 ‘민간 문화대사’로서 한국 정부에서 표창장이나 메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사실 한국의 가게 주인들은 외국인 손님들을 무뚝뚝하게 대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녀는 1년 365일 내내 피맛골을 지키면서 외국인 관광객이나 한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나 같은 엑스팻들에게 오직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한국의 ‘영웅’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의 존재다. 피맛골이 수시로 최루탄 가스에 휩싸이던 1980년대 석씨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도 한몫했다.

이 집의 단골손님이었던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쫓길 때마다 그녀는 이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굽는 석쇠 옆의 비좁은 연탄창고는 학생 대여섯 명을 숨기기에 충분한 장소였다고 그녀가 말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양반들의 행차보다는 국가권력에의 복종을 강요하는 경찰의 곤봉과 심문을 피하는 일이 더 급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 모든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피맛골이 이제 곧 허물어져 내린다니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다. 만일 운이 좋다면 석씨 아줌마가 가게에서 직접 장구를 둘러매고 부르는 ‘아리랑’과 특히 그녀의 고향인 경기민요도 들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피맛골 재개발 때문에 걱정이 돼 더 이상 노래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서린낙지를 포함해 피맛골 입구에 있는 많은 식당들은 이미 길 건너편의 유리와 강철로 된 종로타운 건물로 이사 가고 없다. 그러나 열차집 주인의 아들인 상근씨는 내게 “이곳 분위기는 이상해졌고 우리가 예전의 막걸리집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열차집 분위기에 더 맞는 다른 골목을 물색 중”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다른 골목을 찾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옛 도시 중심가의 멋진 뒷골목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종로의 오랜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서민문화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의 무분별한 재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감상적”이거나 “낡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중심가 일대의 상민적인 ‘과거’와 서민적인 ‘현재’를 가급적 많이 지우려 한다. 자신들의 눈과 더 넓은 세계의 시각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겠다며 말이다. 가령 청계천 복구를 생각해 보자. 조선시대 청계천도 서울의 상민들이 모이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빨래를 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러나 요즘엔 사랑 받던 서민문화의 상징인 황학동 벼룩시장마저 그곳을 떠나고 더 많은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말았다. 그 사이 청계천 자체도 지나치게 ‘포스트모던’하고 엉성하게 서구적인 변신을 하면서 전통적인 한국의 얼굴이 갖던 자연미가 너무 많은 성형수술과 화려한 치장으로 파괴됐다.

청계천과 관련해 유일하게 “복구”된 게 있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서울 엘리트층의 상징적인 지배뿐이다. 물론 이 같은 과정은 좀처럼 서울이나 한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네를 고급화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일반화하고 거의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거환경의 고급화에 어울리는 번역은 “양반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서울의 역사적인 심장부에서 “문화보존”에 대한 공식적인 태도를 잘 요약하는지 모른다. 2001년 이후 서울시청은 역사적으로 양반동네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에 남아 있는 전통한옥의 보존과 복구에 큰 예산을 책정했다. 그리고 올해 초 이미 ‘한옥문화과’까지 발족시켰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옥 보존정책은 주로 북촌이나 관광객이 북적대는 인근의 인사동 같은 “고급동네”에 주로 국한됐을 뿐 전통적으로 문화수준이 낮은 청진동 같은 지역은 보존 노력에서 거의 소외됐다. 그 결과 청진동만 해도 지난해 재개발(일부에 따르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수십 채의 집이 불도저에 쓰러졌다.

피맛골에서 조금 벗어난 청진1길에는 그토록 사랑스러운 한옥 한 채가 들어서 있었다. 지어진 지 거의 100년 된 그 기왓집(시인통신)은 1982년 문을 연 이래 시인 등 문인들이 즐겨 찾던 술집이었다. 그 단층 건물은 진정한 예술작품이자 완벽하게 보존된 집이기도 했다. 술집 벽에는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글씨와 그림, 시들로 장식돼 있었다.

말 그대로 서울의 집합적인 꿈과 욕망을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표현한 콜라주라고 할만하다. 등단시인인 주인 한귀남씨의 아들 윤석호씨는 이장희의 ‘그건 너’와 산울림의 ‘가지마오’ 등 한국의 고전적인 록, 포크, 팝 음악을 두루 갖추고 손님들을 맞이했을 때가 늘 행복했다.

그러나 단지 그곳이 전통적인 상민동네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보존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해 이젠 사라지고 없다. 고관대작의 말을 피하기란 이 동네에선 꽤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불도저를 피하기란 훨씬 더 어려웠던 것 같다.

(필자인 제이 스콧 버거슨은 ‘더 발칙한 한국학’의 저자이며 www.kingbaeksu.com을 클릭하면 만날 수 있다. 기사 작성을 도와준 이순호, 안영상씨 등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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