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수갑 풀고 상생의 미학 찾아라
규제 수갑 풀고 상생의 미학 찾아라
|
골목길 상권 전쟁, 그것도 대형 유통사와 영세 수퍼마켓의 전면전. 비교하자면 헤비급과 라이트급 권투선수의 격돌이다. 패를 읽을 필요도 없는 싱거운 싸움이라는 얘기.
승리를 확신한 대형 유통사는 해마다 기업형 수퍼마켓을 골목길에 배치하고 있다. GS수퍼의 점포 수는 현재 118곳. 2007년 대비 40%가량 늘었다. 롯데슈퍼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점포 수도 각각 150여 곳에 이른다.
여기에 더 무서운 놈이 ‘골목길 앞으로’를 외치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3월 “연내 이마트 소형 점포를 30곳 이상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마트는 동작구 상도동·대방동과 송파구 가락동에 330㎡ 규모의 소형 점포 부지 3곳을 확보, 올해 안에 ‘이마트 에브리데이’를 개장할 계획이다.
골목길 상권전쟁 “왜”
영세 수퍼마켓 업자는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나 눈물과 읍소 빼곤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한 수퍼마켓 업자는 “대기업이 무슨 이유로 골목길까지 장악하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대형 유통사는 왜 동네 골목길을 노리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돈벌이 수단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형 유통사는 지금 신형 엔진을 달아야 할 때다. 주력으로 삼았던 마트의 성장세가 눈에 띄게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 마트 3사의 지난해 매출 증가율은 -0.2%로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4분기엔 -6%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2006년, 2007년엔 각각 1.9%, 3.8%였다. 반면 기업형 수퍼마켓의 상황은 180도 다르다. GS수퍼의 2008년 매출액은 8700여억원으로 전년비 16% 성장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와 롯데슈퍼도 각각 전년비 73%(2007년 2300억→2008년 4000억), 39%(2007년 5878억→ 2008년 8200억) 늘었다.
대형 유통사의 골목길 진출 전략엔 ‘빈 금고’를 채우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셈이다. 또 대형 마트의 부지확보·신설허가가 까다롭다는 점도 이들의 수퍼마켓 시장 진출을 재촉한다. 혹자는 다시 묻는다. “수퍼마켓이 돈이 된다고? 헤비급이 라이트급 무대에 와서 챔피언 벨트 따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껏해야 푼돈 긁어모으기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이정희 한국유통학회장(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은 “가격보단 편의를 중시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며 “가까운 곳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물건을 살 수 있다면 금상첨화로 여기기 때문에 기업형 수퍼마켓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푼돈 긁어모으기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기업형 수퍼마켓은 제약요소가 많지 않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며 “숫자로 능히 빈 금고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형 수퍼마켓은 마트의 대안
|
그렇다면 기업이 돈벌이를 위해 수퍼마켓을 하겠다는데 왜 난리법석일까? 논란의 핵심은 골목길 경제가 죽을 수 있다는 우려다. 대형 유통사의 기업형 수퍼마켓은 골목길 수퍼마켓과 100% 동일 제품을 판다.
여기에 막강한 자금력을 무기로 1+1행사·세일이벤트·배달서비스를 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5월 300개 수퍼마켓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형 수퍼마켓 입점이 주변 중소유통업에 미치는 영향’ 결과를 보면, 영세 수퍼마켓 하루 평균 매출액이 129만원에서 85만원으로 줄었다.
일일 평균 고객 수도 128명에서 81명으로 감소했다. 이뿐 아니라 골목길 수퍼마켓 79%가 “기업형 수퍼마켓 입점 후 경기가 악화됐다”고 답했다. 이만하면 골목길 경제가 ‘마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수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김경배 회장은 “기업형 수퍼마켓이 입점할 때마다 영세 수퍼마켓은 경영위기에 직면했다”며 “대형 유통사의 골목길 진입은 영세상인에게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여기까진 차라리 다행이다. 그래도 경쟁할 순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점은 이런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당한 권리금을 제공해 목 좋은 골목길 수퍼마켓을 빼앗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 “기업형 수퍼마켓 때문에 길바닥에…”
전북 익산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수퍼마켓 건물주가 ‘기업형 수퍼마켓이 입점할 예정이니까 나가달라’고 일방 통보했기 때문이다. 주인에게 왜 그러냐고 따졌다. 돌아온 것은 싸늘한 대답. “모 유통사에서 보증금과 월세를 두 배가량 올려준다고 했다.”
A씨는 지금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다. 정부가 기업형 수퍼마켓의 출점속도 제한을 추진하고, 의원들이 기업형 수퍼마켓 허가제 전환, 영업시간·취급품목 제한 등 규제법안을 쏟아내는 것은 이런 이유다. 영세상인을 보호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이런 규제가 상책이냐는 점이다.
기업형 수퍼마켓의 비중은 전체 소매업 매출의 1%에 불과하다. 점포 수도 0.05%에 미치지 못한다. 중소유통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매출 신장률이 높은 또 다른 유통업태 온라인쇼핑, 편의점을 제외하고 기업형 수퍼마켓만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를테면 형평성 논란이다.
규제는 합당한가, 아닌가?
숙명여대 서용구(경영학) 교수는 “기업형 수퍼마켓을 마구잡이 식으로 규제하면 유통 선진화를 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정희 유통학회장도 “기업형 수퍼마켓을 무조건 규제했다간 후일 기업형 미장원이 등장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형 수퍼마켓을 규제한다고 소비자가 꼭 골목길 수퍼마켓을 이용하란 법도 없다.
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가 (소형 점포 시장에) 진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상공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작정 대형 마트를 저지하기보다는 소상공인 스스로 어떻게 고객들을 위해 발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규제가 상책이라고 해도 또 다른 골칫거리가 남는다. 이른바 방법론 논란이다. 무엇보다 어떤 대안이든 대형 유통사와 골목길 수퍼마켓 업주를 만족시키기 어렵다. 허가제 도입 주장에 대해선 벌써부터 ‘법적 대응’이라는 강력 발언이 나온다. 출점속도 조절 규제안도 양쪽의 불만만 키울 가능성이 작지 않다.
영세 수퍼마켓 업주들은 ‘어차피 진입할 텐데, 늦추는 게 중요하겠는가’라고 비판하고, 대형 유통사는 ‘출점을 미루는 동안 발생하는 비용 손실은 누가 책임질 건가’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기업형과 골목길 수퍼마켓의 품목을 제한하자는 주장에 대해선 아예 “가당치도 않다”는 주장이 많다. 이정희 학회장은 “만약 품목을 분류한다고 했을 때, 대형 유통사와 골목길 수퍼마켓의 품목을 어떻게 나누겠는가”라고 지적했다.
규제도 문제, 방법도 문제
|
이정희 학회장은 “진짜 문제는 기업형 수퍼마켓이 아니라 이들과 영세상인이 공정하게 경쟁하기 힘든 환경”이라며 “양쪽이 공정 경쟁할 수 있는 기준과 룰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대형 유통사가 때만 되면 펼치는 덤핑 판매·불법 판촉 활동 등을 강력 규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학회장은 “이런 맥락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참에 지역 상권에 대한 사전영향평가를 실시하자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업형 수퍼마켓이 골목 상권에 도움이 되면 진입을 허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보하자는 것이다. 일종의 사업심의조정제도다.
서용구 교수는 “기업형 수퍼마켓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작게는 골목별로, 크게는 지역별로 검토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지역 상권에 도움이 되는 기업형 수퍼마켓만 진입시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소 뻔한 얘기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생 의지다. 이런 분열상황을 돌파하는 지름길은 대형 유통사와 골목길 수퍼마켓 업주가 하루빨리 공조의 끈을 강화하는 것이다. 세종대 전태유(산업유통학) 교수는 “일본의 경우 시장에 새롭게 진입하려는 업체는 반드시 기존 업체와 대화를 통해 공조 여부를 타진한다”며 “상생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기업형 수퍼마켓의 출점은 누구를 죽이는 행위가 돼서는 안 된다. 골목 상권을 함께 키우는 쪽으로 전개돼야 한다. 대형 유통사와 골목길 수퍼마켓 업주가 상생의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AI에 외치다, “진행시켜!”… AI 에이전트 시대 오나
2한국에도 중소도시의 새로운 기회가 올까
3로또 1146회 1등 당첨번호 ‘6·11·17·19·40·43’,…보너스 ‘28’
4“결혼·출산율 하락 막자”…지자체·종교계도 청춘남녀 주선 자처
5“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설 것”
650조 회사 몰락 ‘마진콜’ 사태 한국계 투자가 빌 황, 징역 21년 구형
7노르웨이 어선 그물에 낚인 '대어'가…‘7800t 美 핵잠수함’
8'트럼프의 입' 백악관 입성하는 20대 女 대변인
9주유소 기름값 5주 연속 상승…“다음주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