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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나”

“DJ와 나”

뉴스위크 한국판은 고 김대중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미국의 전직 외교관, 언론인, 학자 등 5명의 회고담을 싣는다. DJ 납치 사건 당시 미 중앙정보국 서울지국장으로 DJ의 미국 망명을 도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1989~93년), 리처드 L 스나이더 전 주한 미 대사(1974~78년)의 아들로 87년 DJ의 가택연금 해제 이후 그를 밀착 취재한 대니얼 스나이더 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서울특파원, 80년 광주항쟁 당시 외신기자로 시위현장을 취재한 앤드루 나고르스키 전 뉴스위크 홍콩지국장, 뉴욕 사회과학연구협회(SSRC) 동북아협력 안보프로젝트 소장으로 DJ를 수 차례 만난 리언 시걸 전 미 프린스턴대 교수, 그리고 30년 넘게 한반도 문제에 천착하며 DJ를 여섯 번 인터뷰한 도널드 커크 전 CBS라디오 서울특파원 등이 글을 보내왔다.

미 중앙정보국(CIA) 서울지국장으로 일하던 1973년 8월 DJ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됐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나는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 대사에게 DJ 납치는 한국 중앙정보부(KCIA) 소행이라고 보고했다.

하비브 대사는 즉각 KCIA의 행동에 강하게 항의하며 DJ의 석방을 요구했다. 밧줄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소형 보트에 태워져 바다에 수장될 뻔했던 DJ가 자택 부근에서 풀려난 데는 이렇듯 하비브 대사의 공이 컸다. 1980년 말 DJ는 5월 광주항쟁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신군부에 의해 사형이 선고됐다.

그해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해럴드 브라운 국무장관과 나를 서울로 보내 전두환 대통령에게 DJ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1981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과 한국 간에 타협이 이뤄졌다. 전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레이건 대통령과 만찬회동을 갖는 대신 DJ의 사형선고를 무효화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멤버였던 나는 전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한 세부 계획 수립을 도왔다. 그 후 DJ는 석방됐고, 미국에 정치적으로 망명할 길이 열렸다. 나와 DJ의 첫 만남은 1980년대 중반 워싱턴에서 이뤄졌다. DJ를 처음 본 순간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우리의 직접적인 관계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후 1989년 내가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하자 DJ는 나의 첫 광주 방문을 도왔다. 당시 광주 미 문화원은 반미시위대의 화염병 투척으로 몸살을 앓았다.

나는 광주를 네 번 방문해 광주 시민에게 미국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야만적인 광주항쟁 진압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DJ는 나를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했다.

당시 나는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으로 재직했다. DJ는 내가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하던 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깃발을 북한 땅에도 꽂자”고 촉구했다.

DJ 제안에 따라 나는 평양을 다섯 차례 방문했다.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도 그렇게 해서 성사됐다. 2009년 8월 11일 나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가 DJ의 쾌유를 빌었다.

그를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이희호 여사는 나를 따뜻하게 맞으며 남편을 살리는 데 내가 일익을 담당했다며 고마워했다. 나는 1952년 이후 계속 아시아에서 일하며 아시아의 지도자 수백 명을 만났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국가주석과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

한국의 민주화 시위가 세계 이목을 끌었던 격동의 1987년 여름, 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젊은 기자로 한국 문제를 담당했다. 그 덕분에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기 직전까지 간 그해 6월 말부터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됐던 12월까지 나는 한국이 독재정권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고 정치적 자유를 향해 나아가던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 전환 과정에서 DJ는 강력하면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던 정치인이었다. 1987년 6월 25일 오후 나는 DJ와 처음 대면했다(그 전까지는 전화로만 대화가 가능했다).

전두환 정권이 DJ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동교동 자택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을 철수시킨 직후였다. 얼마 후 DJ는 나 같은 서구 기자들과 빈번하게 만났다.

대개는 이희호 여사가 준비한 아침식사를 들면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DJ에게 그런 만남은 미국에 널리 확산된 자신의 과격한 이미지를 벗어낼 기회이자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서구 언론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자리였다. DJ는 모든 위대한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인물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의지는 확고했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야망을 지녔으며 전통적인 지도력이 갖는 한계도 드러냈다. 이런 점은 1987년 대선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해 12월 초 나는 여의도광장에 운집한 수십만 인파가 내려다보이는 연단에 DJ와 함께 올라갔다.

대중들의 지지 열기는 광장을 휩쓸고 지나가는 차디찬 바람에도 식을 줄 몰랐다. 뜨거운 지지열기에 DJ는 깊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느낌 때문에 김영삼 후보와의 경쟁을 떨쳐버리고 야권 후보를 단일화하는 작업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 이 실패는 결국 노태우 후보의 박빙의 승리로 이어졌다.

복잡성은 DJ의 대미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DJ는 상당수 지지자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미국이 맡은 역할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거기엔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군사통치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도 한몫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J는 미국이 결정적 순간에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음을 알고 있었다(실제 미국은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령 선포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미관계는 DJ에게 매우 개인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다. 미국이 한 차례 이상 그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단순히 기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작고한 리처드 L 스나이더 전 주한 미 대사(1974~78년)의 아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한국과 관련한 미국의 외교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82년 DJ는 일시적 망명을 위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에게 구명운동을 해준 데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도 그 편지를 읽고 크게 감동했다. 내가 DJ를 마지막으로 본 때는 몇 해전 동교동 자택에서였다. 걸음걸이는 더 느려졌지만 정신은 여전히 맑았다. 나는 DJ에게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이 한 역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의 “막후 외교(quiet diplomacy)”가 때로는 군사정권의 국민탄압을 누그러뜨리거나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데 효과적이었음을 수긍했다. 그러나 DJ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그 같은 정책을 잘못된 정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런 정책 때문에 한국민은 미국이 독재정권을 눈감아줬다고 여기게 됐으며 아직도 그런 정책이 한·미관계의 발목을 잡는다고 설명했다.

DJ에게 정치는 항상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도덕성과 연관돼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게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결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 지도자는 매우 찾기 힘들다. DJ는 살아 생전이나 서거한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 있다. ■

뉴스위크 홍콩지국장으로 근무하던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그 후 벌어진 격변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수시로 서울을 들락거렸다. 당시 DJ는 좀처럼 접촉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보니 자신에 대한 온갖 억지 혐의를 전화 인터뷰를 통해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의 추모기간이 끝날 무렵 정승화 계엄군 사령관이 DJ를 한국전쟁 발발 전 공산주의자에게 협력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나중엔 DJ가 친북단체들과 교류한다는 이유로 일본 조총련의 자금지원을 받는다는 혐의까지 덧씌웠다.

이에 대한 DJ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의 태도는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순전히 나를 해치려는 음모”라고 그는 말했다. 확실히 그것은 음모였다. DJ는 곧 교도소에 수감됐고,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누가 봐도 미리 짠 각본에 따른 결론임이 분명했다.


당시 나를 포함한 외신기자는 DJ와의 인터뷰가 일절 금지됐다. 그러나 갈수록 성난 군중을 진압하려는 군부는 말 그대로 ‘얼굴 없는’ 집단이었다. 막상 권력은 잡았어도 그 후 벌어진 내분으로 절박한 처지에 내몰렸다.

정작 자신들의 탄압으로 폭력사태가 발생했는데도 거꾸로 DJ가 폭력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그를 수감시키고도 여전히 불안감에 시달렸다. “총을 든 많은 병사가 들이닥쳐 남편을 끌고 갔다”고 이희호 여사는 내게 말했다.

그런 말이라도 해줄 사람은 이 여사뿐이었다. 그 후 얼마 안 가 광주항쟁이 발생했지만 DJ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강하게 느껴졌다. 광주항쟁이 군부에 진압되던 당시 외신기자로는 드물게 시위 현장을 취재한 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이 보여준 결연한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 학생은 잽싸게 시위군중 속으로 사라지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대 오늘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DJ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결국 DJ는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DJ가 대통령 재임 당시 한 일을 두고 아직 엇갈린 평가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DJ는 어두운 군사독재 시절 뜨거운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남았다.


DJ는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거나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털어놓을 기회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엔 항상 그가 자리잡고 있었다. ■

나는 세 차례에 걸쳐 DJ와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내가 만난 많은 지도자와 달리 그는 국제 문제에 이해가 깊었으며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도 보좌관이 준비하는 ‘요점정리’가 따로 필요 없었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변화를 향한 그의 소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그의 지혜와 비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나를 포함한 많은 미국인에게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북 포용정책의 지속뿐임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험난한 과정에 DJ는 전혀 환상을 갖지 않았다. 다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용기와 결단력을 지녔을 뿐이었다. 선견지명을 가진 위대한 지도자 한 명을 세계는 잃었다.■

1972년 시카고 트리뷴 기자로 첫 남북적십자회담을 취재하러 한국 땅을 디뎠을 때만 해도 DJ를 찾기란 매우 쉬웠다. 조선호텔 앞에서 아무 택시기사를 붙들고 동교동 자택으로 가자고 하면 15분 내로 도착했다. 그때도 별명이 DJ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꺼이 외신기자들과 만나 박정희 정권의 문제를 지적했다.


1년여 뒤 다시 그를 만났을 때는 훨씬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도쿄의 호텔방에서 벌어진 납치 상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에도 DJ는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했지만 이번엔 납치 사건의 전 과정을 생생히 들려줬다.

당시 DJ는 주로 과일로만 차려진 아침식탁에 외신기자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자신이 직접 쓴 글씨를 내게 준 적도 있다(액자에 담은 그 글씨는 지금도 워싱턴의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다).

그 후 오랜 기간에 걸쳐 DJ를 여섯 차례 인터뷰했다. 1979년 10월 박 대통령 암살 뒤인 ‘서울의 봄’ 당시 그는 외신기자들을 동교동 자택으로 자주 초대했다. 군사재판, 투옥, 미국 망명 후 하버드대에서 펠로십을 할 때도 기꺼이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내가 유에스에이투데이지에서 일하던 1984년 8월 신문사 부근의 한 식당에서 DJ와 함께 식사하자는 연락이 한 측근으로부터 왔다.

DJ가 내게 귀국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매우 흥분됐다(하지만 유에스에이투데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 신문은 외국 소식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듬해 DJ가 귀국하기 전 버지니아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는 내게 귀국에 따르는 위험을 설명하며 민주개혁의 필요성과 조국을 위한 자신의 비전을 밝혔다.

DJ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열린 두 차례의 송별식에도 나는 참석했다. 그중 펜타곤 부근의 대형 한식당에서 열린 송별회에선 미국의 여가수 메리 트래버스가 ‘이제 제트기로 떠난다네(I’m Leaving on a Jet Plane)’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나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취재하러 다시 서울을 찾았다.

그 후 한동안 DJ를 만나보지 못하다가 1990년 여의도 평화민주당 당사에서 그를 다시 인터뷰했다. 늘 그렇듯 DJ는 자신의 입장을 기탄없이 밝혔다. 그러나 평소 자신이 나쁜 인상을 느꼈던 재벌 문제에 관해 질문하자 독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향후 대선운동 과정에서 또다시 불거질 비판을 의식한 듯했다.

1992년과 97년 대선기간엔 유세 중에 DJ를 자주 보았다. 더욱 더 기억에 남는 순간은 94년 5월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DJ가 연설할 때였다. 당시 DJ는 결코 대통령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북한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지만 DJ는 북한과도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DJ는 분명 자신이 성취하고 싶어하는 목표를 이미 세워둔 듯했다. 일부 사람은 그를 “늙고 한물간 정치인”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 DJ는 북한 문제와 관련한 다른 해법을 갖고 있었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2001년 1월엔 중앙일보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과 함께 펴내는 영자신문 중앙데일리의 첫 편집국장으로 부임한 새뮤얼 애브트 및 데이비드 이그나시우스 IHT 편집국장과 함께 DJ를 15분간 예방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예방은 45분간의 긴 인터뷰로 이어졌다.

나는 DJ가 한 모든 말을 미친 듯 받아 적었다. 그러나 너무 아쉽게도 젊은 보좌관 한 명이 나중 DJ가 한 말을 직접 인용하는 형식으로 기사를 쓰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기사는 결국 인용부호 하나 없이 나갔다.

나는 DJ가 물러난 뒤에도 그와 접촉을 유지하려 애썼다.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한 뒤인 2006년 10월 미 CBS-TV 뉴스의 서울특파원 앨런 피지가 DJ 인터뷰를 따내자 나는 CBS라디오의 서울특파원 자격으로 청와대를 함께 방문해 DJ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러곤 이듬해 9월 DJ가 다시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DJ는 연설이 끝난 뒤 기자들의 질문에 성심껏 답한 뒤 출구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와 악수하러 다가갔지만 휠체어를 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건강이 그토록 악화된 상태에서도 그토록 열정적인 연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DJ를 마지막으로 본 시기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2009년 1월 그가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연설할 때였다.

자신의 주된 주제인 북한과 화해하는 방법에 관해 연설하는 그의 모습에서 또다시 놀라운 활기가 느껴졌다. 그 자리엔 이희호 여사도 함께했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박지원 전 비서실장도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때도 DJ는 기자들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했다. 나는 김정일이 아직 답방을 하지 않은 이유와 그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관해 질문했다.

그러나 DJ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직전 아내와 어쩌면 아들들에게 자신의 꿈을 귓속말로 들려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설령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도 분명 머릿속으로는 평화로운 통일조국 한국의 모습을 그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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