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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이념 장난’에 지역 살림 휘청

얄궂은 ‘이념 장난’에 지역 살림 휘청

풍경 하나만으로 뭇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 강원도 고성이다. 그러나 이런 절경도 이데올로기 앞에선 일순간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고성은 줄어드는 관광객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이곳에서 통용되는 ‘생의 법칙’은 그래서 쉽고 간단하다. 바로 평화다. 남북화해는 고성 경제를 살리는 열쇠다. DMZ는 살아 있었네, 고성 경제편이다.
▎단풍을 기다리며 고진동 계곡의 단풍을 구경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한 번 본 사람은 모두 최고의 단풍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조우혜

▎단풍을 기다리며 고진동 계곡의 단풍을 구경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한 번 본 사람은 모두 최고의 단풍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조우혜

높은 성(高城)에선 하늘도, 땅도, 바다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강원도 고성의 가장 높은 곳 717관측소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이다. 적벽산·벽돌산·가마봉이 작심한 듯 에워싸고 있는 금강산 동쪽 마지막 봉우리 구선봉은 우아한 기품이 있다.

바로 밑에 위치한 수심 1m의 감호는 수줍게 일렁이고, 오른편에선 동해가 당차게 출렁인다. 바다 위엔 복선암·작도·외추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그야말로 비경이다.



절경 뒤에 숨어 있는 단절의 흔적

▎북한산 전통술들 통일전망대 매점에 진열된 북한산 전통술들이다. 저 술들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의 맛과 향기가 남아 있을까? ⓒ김환기

▎북한산 전통술들 통일전망대 매점에 진열된 북한산 전통술들이다. 저 술들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전통의 맛과 향기가 남아 있을까? ⓒ김환기

그러나 제아무리 빼어난 경치면 무엇 하랴? 군사분계선에 막혀 봉우리에 오를 수도, 바닷물에 몸을 담글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방 감탄사를 내지르는 것뿐이다.

속 편하게 발 디딜 조그만 땅조차 없다는 얘기다. 남북 분단은 천혜의 환경을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는’ 비운의 땅으로 전락시켰다. 충격적인 것은 더 있다. ‘아홉 신이 놀았다’는 구선봉엔 북측의 갱도 진지가 구축돼 있다.

군(軍) 관계자에 따르면 감청시설이 들어서 있는 봉우리도 있다. 뭇사람을 홀릴 만한 절경. 하지만 그 뒤편엔 단절의 흔적이 너무도 또렷하다. 남쪽 최북단의 조그만 군(郡) 고성의 얄궂은 비애다.

강원도 동북부에 위치한 고성. 북쪽으론 금강산, 동쪽으론 동해와 연결된다. 서쪽엔 금강산, 향로봉을 연결하는 태백산맥이 쭉 뻗어 있다. 해안선엔 송지호·화진포 등 바다호수가 장관을 연출한다. 예로부터 고성은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어여쁨으로 명성을 떨쳤다. 남한 최북단 바다호수 마을 화진포와 관련된 시 구절을 보자.

가득 찬 호수에 물결도 잔잔하니 아름다운 배에 비단 실은 것 같네

무릇 호수의 경치를 알아야 하니 신선 이름 아니라 꽃 이름 붙였네

백 가지 꽃피는 호수 맑은 물이라 화진포 한쪽을 다투는 것 같네

때로는 거센 파도가 일어나더니 잠시 후 고요한 거울이 되노라

(송도삼절 최립의 시)

호수 명칭에 꽃 이름을 붙여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고성. 고성군이 ‘자연경관 등을 최고 자원으로 육성하자’는 목표를 세운 이유다. 푸른 청정 환경 그리고 문화유적을 잘 살려 군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 고성군의 70% 이상은 임야다. 농경지는 8%에 불과하다. 농경으로 지역경제를 육성하기엔 불모지가 너무 많다. 기업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올 8월 현재 이 군에 둥지를 튼 사업체는 2542곳에 불과하다. ‘자연을 관광자원화하겠다’는 군의 야심 찬 목표는 어쩌면 이런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지 모른다.



DMZ박물관, 세계적 명소로

▎안보전시관의 관람객들 통일전망대와 함께 있는 안보전시관 내부를 관람객들이 돌아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각종 영상물과 함께 총격전 소리와 포성이 끊임없이 들린다. ⓒ김환기

▎안보전시관의 관람객들 통일전망대와 함께 있는 안보전시관 내부를 관람객들이 돌아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각종 영상물과 함께 총격전 소리와 포성이 끊임없이 들린다. ⓒ김환기

군은 무엇보다 화진포·송지호·광포호 등 바다호수의 관광자원화에 전력을 기울인다. 화진포 관광지엔 41억원을 들여 생태박물관을 짓고, 송지호 인근엔 호수 순환도로를 개설한다. 삼포·문암 관광지 주변엔 다목적 광장을 설치하고, 해안도로 개설도 연내 추진할 계획이다.

산불 피해지 98㏊를 산림 자원화하는 저탄소 미래 숲 조성작업도 눈길을 끈다. 왕벚나무가 아름답게 깔리는 녹색거리도 1억원을 투입해 조성한다. 문화유적 복원사업으론 왕곡마을(국가중요민속자료 제235호) 가옥 보수, 건봉사(지방기념물 제51호) 대지전 복원, 문암 선사유적지(국가중요사적지 제426호) 유적 공원화 등이 있다.

군 관계자는 “관광객 중심의 맞춤형 투어를 만들기 위해 자연환경과 문화유적지 등을 연계해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보관광도 한몫 거든다. 고성군은 그간 금강산 육로관광, 남북 동해선도로 및 철도출입국사무소, 한국전쟁체험관, 통일전망대와 화진포 역사안보전시관,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김일성 별장 등을 안보관광자원으로 활용, 관광객을 유치했다.

올 8월엔 2년6개월여 공사 끝에 DMZ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445억원(국비 220억원, 도비 225억원)을 들여 13만9114㎡ 부지에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됐다. 전시관·영상관·다목적센터 등 각종 관광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데올로기, 절경을 삼켰다”군은 DMZ박물관 개관의 여세를 몰아 ‘DMZ평화통일대제전(가칭)’도 창설할 계획이다. DMZ를 중심으로 남북 고성군의 통합 염원을 담을 수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고성을 DMZ 관광거점으로 도약시키겠다는 꿈도 깔려 있다. 군 관계자는 “고성은 DMZ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라며 “이를 통해 남북 통일시대를 대비한 세계적 관광명소로 자리 잡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고성경제가 활짝 펴기 어렵다. 각종 지표를 보면 그렇다. 고성군의 연 재정규모는 2000억원을 조금 넘는다. 재정자립도는 12.6%로, 강원도 18개 시·군 가운데 15위다. 군사시설보호구역은 65%에 이른다. 게다가 남북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이다. 지난해 금강산 육로관광이 막히자 고성 경제가 추락을 거듭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단체 관광객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고성군 현내면 국도 7호선 주변 음식점들은 금강산 육로관광이 중단되자 폐업 위기에 몰렸다. 음식업중앙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 7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뒤 1년간 문을 닫은 이 지역 음식점은 전체(697곳)의 38%에 이르는 264곳이다.

피해액도 어마어마하다. 고성군이 피해액을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음식점들은 월 27여억원을 손해 봤고, 종사자 7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남북관계 경색이 고성 경제를 완전히 짓밟았다는 얘기다. 고성군이 지방세 징수를 미루고, 군비 6억6000여만원을 들여 산림 가꾸기·산불 감시 관련 일자리를 만든 이유다.

정부에 특별교부세 지원을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군 관계자는 “고성 경제는 남북관계에 따라 냉온탕을 오간다”며 “금강산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물론 있지만 단점도 그만큼 많다”고 말했다. 남북평화가 고성 경제를 뒷받침하는 핵심 변수라는 것이다.

2007년 고성 고진동 계곡에선 ‘어린 연어 방류행사’가 열렸다. 방류된 연어들은 군사분계선을 유유히 넘어 남강으로 향했을 게다. 하지만 언제 되돌아올지 모른다. 기약 없는 길을 떠난 셈이다. 연어들의 귀환을 기다리기 지쳤는지, 어린 연어 방류 터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남북 분단의 냉혹한 현실에 심신이 닳아버린 고성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고성은 남북이 공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곳에서 통용되는 ‘생의 법칙’은 평화다. 평화무드가 흐르면 고성 경제엔 봄바람이 깃든다. 반대로 평화가 깨지면 침체의 늪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데올로기가 신이 내린 풍경을 집어삼키고 있는 게 고성의 현실이다. 고성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꼿꼿하게 세워 놓은 이념의 벽, 그것이 문제다. 그 벽이 얇아지고, 그 벽이 무너지는 날, 고성은 그제서야 진짜 평온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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