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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스포츠계의‘동방불패’ 신화

국제 스포츠계의‘동방불패’ 신화

“당시 외신 기자들 사이에선 한국 대통령보다 영향력 있었던 뉴스메이커였어요.”

최상훈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뉴욕타임스의 국제판) 특파원은 현역 시절의 김운용(78)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제 스포츠계의 거물로 꼽혔던 김 부위원장의 위상은 그만큼 대단했다. 1986년 IOC 위원에 처음 선출된 이래 2년 만에 집행위원을 거쳐 다시 4년 뒤엔 부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제경기연맹 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분과 위원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가 대한체육회, 대한태권도협회,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등의 수장으로 20년 가까이 국내 스포츠계를 좌지우지했을 때 일부 인사가 그의 독주체제에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다.

김운용 부위원장의 재임 기간 중 한국의 위상은 커다란 비약을 이뤘다.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를 유치했으며, 태권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 동시입장 등 역사적인 성과도 일구었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둘러싼 ‘스캔들’에 휘말려 불명예스럽게 올림픽 무대에서 퇴장했다. 같은 해 그는 대한체육회장에서 물러나 업무상 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돼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지난해 8월 15일 사면조치로 복권됐다).

8월 중순 서울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운용 부위원장은 고령의 나이에도 힘이 넘쳐 보였다. 요즘은 일본 게이오대학 법학부 방문교수, 조선대 석좌교수를 맡아 강의와 집필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스포츠 역사의 산 증인인 자신의 스포츠 외교에 대해 묻자 그는 “영어와 체력이 기본”이라고 입을 열었다.

기자는 막연히 그를 태권도 선수 출신의 스포츠 외교가로 잘못 알았지만 외교 현장에서 그의 이력은 IOC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중학교에 다닐 무렵 8·15 해방을 맞은 김 부위원장은 오늘날보다 더 강력한 국제화 물결을 체험하게 된다. 본디 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좋아했던 김 부위원장은 해방 후 미군이 들어오자 신이 났다고 했다.

“미군이 주둔했던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 찾아가 영어로 말을 붙이는 게 취미였다고나 할까? 가기 전에 미리 영어 몇 마디를 암기해뒀다가 미군 보초들에게 써먹었는데 말이 잘 통했어요. ‘Bye’라고 해도 되지만 ‘I’m afraid I must go’라고 외워온 말을 쓰면 병사들이 재미있어 하면서 더 잘 대해줬어요.”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김 부위원장은 그 시절 미국인과 대화하는 즐거움에 빠져들었고 영어에 ‘입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고 돌이켰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김 부위원장은 외교관의 꿈을 안고 연희대(지금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연희대는 ‘세계로 나아가라’는 당시 백낙준 총장의 철학에 따라 영어 교육에 주력했다.

“영어강독·영작문·영어회화를 일주일에 각각 3시간씩 총 9시간 배우고 미국인 교수가 영어로 가르치는 전공 수업에 적극적으로 매달렸어요. ‘Modern English’라는 과목 시간엔 한국인이 틀리기 쉬운 ‘th’ 발음까지 철저히 교육 받고 영어 성경의 중요한 문구도 닥치는 대로 외웠어요.”

6·25 전쟁이 터지자 김 부위원장은 육군본부 국제연합 연락장교로 군에 자원 입대했다. 한·미 공조가 절대적인 시절이었으므로 그의 영어 실력은 금세 빛을 발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발판으로 특별한 기회를 얻기도 했다. 미국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등 세 차례 미국 연수를 다녀왔고 4·19 당시엔 서울 계엄사령관 부관으로 근무하면서 작전상황 브리핑, 미 고문단과의 협조, 사령관 통역 등을 맡기도 했다.

▎1986년 스위스 총회에서 ioc 위원 선서를 하고 있다.

▎1986년 스위스 총회에서 ioc 위원 선서를 하고 있다.

“당시엔 미군과의 정확한 의사소통이 필수였으므로 영어가 경쟁력의 전부였다”고 김 부위원장은 말했다. 중령으로 예편한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열렸다.

주미 대사관 참사관, 주영 대사관 참사관을 거쳐 유엔총회 한국대표 등을 차례로 맡으면서 그는 외교관으로서 승승장구했다. “그 시절 워싱턴 정계, 유엔의 다자외교, 영국의 전통 외교를 두루 겪었던 경험이 나중에 IOC에서 스포츠 외교 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그는 말했다.

1971년 외교관으로 활동을 끝내고 귀국한 뒤 대한민국 국기(國技)인 태권도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었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그가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당시만 해도 태권도가 국기로 선정되기 이전이었다. 김 부위원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기 태권도’라는 휘호를 건네 받아 국기원을 설립한 것이 그때였다.

1973년엔 세계태권도연맹(WTF)를 창설해 국제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그는 19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KOC 부위원장으로 스포츠 외교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김 부위원장이 스포츠 외교 현장에서 만든 첫 번째 작품은 1974년에 일군 세계사격선수권대회의 유치다.

그는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세계사격연맹 총회에 참가했다. 당시 경제 약소국에다 분단국가로 소련, 동구권과 북한의 강력한 견제를 받던 한국에 비하면 경쟁국인 멕시코는 이미 올림픽과 많은 국제대회를 치렀던 스포츠 강국이었다. 멕시코가 먼저 국제대회 개최 경험을 내세우며 “선수단의 1인당 하루 숙식비를 10달러만 받겠다”는 파격 조건을 내걸었다.

위기감을 느낀 김 부위원장은 “우리는 5달러만 받겠다”고 응수했다. 불가능한 금액이었지만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투표 결과 62 대 40의 기적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김 부위원장은 “파격적인 조건도 조건이었지만 유치 발표를 할 때 나는 영어로 했고 멕시코 측은 스페인어로 한 점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듯했다”고 설명했다(78년 대회가 열렸을 때엔 국제통화기금 인프라 룰을 적용해 40달러의 숙식비를 받았다고 한다).

저명한 스포츠 기자 데이비드 밀러는 ‘올림픽 혁명’에서 “이 승리가 아시아 지정학 변화의 시작이 됐다”고 썼다. 사격이라는 올림픽 공식 종목 세계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88 서울올림픽 유치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영어와 체력 말고도 김운용 부위원장은 스포츠 외교의 자격요건으로 인품을 강조했다.

“스포츠 외교는 개인 외교입니다. 개개인이 만나서 설득하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인데 사람들의 호감과 존중을 받을 만한 인품(likeability)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하지만 김 부위원장은 스스로 “활발하고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저기 어깨를 치고 다니면서 공격적으로 다가서기보다는 한결같은 자세로 서로 믿고 존경하는 관계가 더욱 중요합니다.”

오랜 기간 다져진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김 부위원장은 2001년 유색인종 최초로 나선 IOC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할 때까지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표 대결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당시 한국 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동방불패’란 별칭으로 불렸다.

김 부위원장은 IOC에서 넓은 인맥을 두루 쌓았지만 그에게는 사마란치 IOC 종신 명예위원장이라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서울 올림픽 시절 여러 현안을 매일 상의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친한파로 알려진 사마란치 위원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전 때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아벨란제 FIFA 회장과 협의해 공동 개최를 이끌어냈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치 때도 이례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94년 IOC 총회 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을 결정할 때도 태권도를 직권상정했던 이도 사마란치였다.

김 부위원장과는 요즘도 수시로 연락하면서 서로 ‘형제(brother)’라고 부르는 평생의 친구 사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관계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치 경제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IOC에서 김 부위원장 협상의 귀재로 통했다.

그는 언제 주장하고 언제 양보해야 할지를 정확히 꿰뚫어볼 줄 알았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죽일 때 의외의 성과를 낸 적이 더 많았어요. 외교에서는 항상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원칙을 숙지해야 합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남북 동시 입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처음엔 단일팀을 구상했지만 현실적인 걸림돌이 많았다. 그에 비해 동시 입장은 노력에 비해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사마란치 위원장의 적극 지원으로 남북 간 견해차를 조율한 끝에 개회식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동시 입장이 극적으로 성사됐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이에 대해 “돈 안주고 남북협력 한 것은 처음일 것”이라며 “3억 달러어치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96년 동계 아시안 게임 유치전도 그랬다. 93년 IOC총회에서 중국의 하얼빈과 한국의 용평이 경쟁했는데 중국은 이미 베이징과 시드니가 붙은 하계올림픽 유치전에서 패배해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IOC 부위원장으로서 김 부위원장은 한국의 용평 유치에 힘을 보탤 수 있었지만 IOC 내부에선 “중국을 두 번 연속 때려눕힐 필요는 없다”는 여론이 일었다.

“그래서 하얼빈이 96년에 먼저 하고 용평이 다음 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 패키지를 제안해 성사시켰어요.” 그런 이유로 96년 김운용 부위원장이 하얼빈에 가자 장쩌민 당시 중국 주석을 비롯해 중국 지도자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한국은 온 국민이 분노했다. 쇼트트랙의 김동성 선수가 미국의 오노의 추월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돼 금메달을 내놓게 사건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대표팀 관계자는 기자회견에서 “(오심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대회를) 보이콧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김 부위원장에게 달려왔다. “마침 러시아 선수단도 보이콧 입장을 밝혔는데 한국까지 보이콧하면 솔트레이크 올림픽은 실패작이 된다”며 “보이콧하지 않는다는 성명서를 써달라”고 호소했다. 김 부위원장은 한·미 관계나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고려해 보이콧이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IOC 공보실에서 작성한 성명서는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던 올림픽(These Successful Games) 폐회식에 참석한 것처럼 이번에도 참석할 것”이라는 상당히 외교적인 문구였다. 하지만 국내 언론에서는 ‘These’를 빼고 해석해 “금메달을 뺏겼는데 뭐가 성공적인 올림픽이냐”는 비판적인 기사를 연일 실었다. 그에게는 뼈아팠던 순간이었다.

8월 말 어느 저녁 서울의 한 호텔에서 김 부위원장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화려한 스포츠 인생을 중앙일보에 정리한 연재 글을 책으로 펴냈다. 이만섭 전 국회부의장이 축사를 했고 양정규 헌정회 회장과 김덕룡 청와대 특보가 건배를 제의했다. 사회는 김동건 KBS 아나운서가 보았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재계 인사들이 가득 자리를 메웠다. 일생 스포츠 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한 원로 인사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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