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척해서 살아남겠니?
예쁜 척해서 살아남겠니?
미국의 복합 미디어그룹 월트 디즈니가 8월 31일 종합 캐릭터 업체인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40억 달러 상당의 현금과 주식을 주고 인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자못 충격적이다.
마블의 주요 캐릭터는 우락부락하고 폭력적이며 통제불능에 우울한 아웃사이더 성격이 강하다. 한마디로 하나같이 ‘비정상’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는 디즈니의 고상하고 예쁘며 경쾌하고 품위 있는 귀족 중심의 디즈니 캐릭터와는 상극이다.
귀족과 괴물의 결혼이라고나 할까. 캐릭터·콘텐트 면에서 이렇게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두 회사의 부조화 결합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요즘 소비자들의 콘텐트와 캐릭터 선호 취향은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추세다.
따라서 기존 디즈니류의 단선적인 권선징악 스토리와 말끔한 캐릭터로는 요즘 문화시장에서 생존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캐릭터산업 블록버스터급 지각 변동 불가피게다가 마블의 우락부락하고 기묘하며 어떤 의미에선 뒤틀린 모습의 캐릭터들이 등장한 영화들이 최근 들어 하나같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마블의 핵심 캐릭터인 ‘스파이더맨’ ‘헐크’ ‘판타스틱4’ ‘아이언맨’ ‘X맨’은 모두 스토리 작가 스탠 리와 극화가 잭 커비와 스티브 닷코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이 만든 만화는 미국 캐릭터산업과 콘텐트산업의 밑바탕이 됐다. 최근 들어 미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상당수는 이들이 창작한 만화에서 캐릭터와 줄거리를 따오는 추세다. 21세기 들어 등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영화의 절반 이상이 이들이 창작한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대부분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하는 데다 관련 게임과 캐릭터 상품의 인기도 상당하다. 디즈니가 이들 캐릭터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캐릭터들의 멀티미디어 이용 상황을 알아보자. ‘판타스틱4’는 1961년 처음 만화로 나왔다.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 20세기 폭스사에 의해 크리스 에번스와 제시카 알바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흥행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스파이더맨’은 1962년 탄생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여러 차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으며 2002년을 시작으로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스파이더맨 영화가 줄지어 나왔다. 1963년에 나왔던 ‘아이언맨’은 2006년과 2008년에 영화로 제작됐다.
텔레비전 시리즈도 1966년과 1994년에 등장했다. X맨은 1963년 등장했으며 2000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네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1992년에는 텔레비전 시리즈도 나왔다. 헐크는 1962년 창작됐으며 이미 1980년대에 텔레비전 시리즈로 나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엔 애니메이션이 나왔고 2003년과 2008년엔 영화로도 탄생했다. 2003년 영화는 예술영화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 대만 출신의 리안 감독이 연출했으며 개성파 배우 에릭 바나가 주연을 맡았다. 슬픈 영웅 브루스 배너가 주인공인 헐크는 2012년에도 새 영화가 나올 예정이다.
이처럼 아웃사이더 캐릭터가 되레 주류가 되어가는 추세에 전 세계 미디어 관련 산업에서 우월한 지위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5000여 개나 되는 마블의 캐릭터와 콘텐트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디즈니는 이번 합병으로 1억 달러 상당의 매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울러 영화, 소비재, 장난감, 비디오 게임, 애니메이션, 방송 채널, DVD 그리고 온라인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에서 관련 캐릭터의 사용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수로 캐릭터산업에 블록버스터급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캐릭터와 콘텐트가 있다고 인수합병이 무조건 성공할 수는 없다.
과거 마블을 인수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미국의 전설적인 기업 사냥꾼 로널드 피얼먼은 1989년 마블 코믹스의 모기업인 마벨 엔터테인먼트를 뉴월드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부터 8250만 달러에 인수했다.
기업사냥꾼이 운영할 때도 위기 겪어피얼먼은 “지적재산권으로 따지면 이 회사는 미니 디즈니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디즈니는 유명하고 부드러운 캐릭터로 이뤄져 있다면 마블의 캐릭터는 액션 영웅이 대부분”이라며 “우리는 마블에서 창조의 비즈니스와 캐릭터 마케팅을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의 인수 뒤 관련 캐릭터 상품 판매 확대와 만화책 산업의 붐으로 마블의 주가는 크게 뛰었다. 피얼먼은 마블에 다양한 자회사를 합병해 가치를 더욱 키웠다. 먼저 야구카드 회사인 플리어 코퍼레이션과 스카이박스 인터내셔널, 이탈리아의 캐릭터 스티커 생산자인 파니니 그룹, 그리고 만화 출판사인 웰시와 말리부 코믹스 등을 마블 홀딩스 등이 마블의 식구로 합류시켰다.
그러면서 마블의 가치는 7억 달러에 이르렀다. 토이 비즈와 제휴하면서 회사 가치는 8억 달러까지 뛰었다. 하지만 캐릭터 관련 상품을 중간상을 거치지 않고 직판하려던 계획이 제대로 먹히지 않으면서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만화산업의 거품이 꺼지고, 1994년에는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의 파업으로 야구카드를 파는 플리어 부문의 이익이 급감했다.
캐릭터 스티커를 만들어 팔던 파니니 부문도 곤경에 처했다. 파니니는 디즈니 캐릭터를 특허사용 계약해 사용하는 게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그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죽을 쑤면서 함께 어려움에 처한 것이다. 그사이 주채권자였던 칼 아이킨이 피얼먼을 밀어내고 회사의 경영권을 행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경영권은 딴 사람에게 넘어갔다. 토이 비즈 소유권자인 아이크 멀무터와 아비브 아라드가 피얼먼으로부터 마블을 사들인 것이다. 어떤 금융업자는 피얼먼이 마블을 사고팔면서 2억~4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추정했다. 하지만 마블 관련 재판을 맡았던 판사들은 그가 2억8000만 달러와 여러 가지 세무상 이익을 봤다고 추산했다.
포브스 잡지는 그가 이익도 손해도 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마블을 인수한 디즈니의 미래를 쉽게 전망할 수 없는 이유다. 한편 이 소식을 들으면서 누구보다 즐거워했을 사람이 한 명 있다. 올해 87세로 뉴욕에 살고 있는 스탠리 마틴 리버가 주인공이다. 앞에서 ‘스탠 리’라는 필명으로만 밝혔던 만화 스토리 작가의 실명이다.
사실 그는 미국 캐릭터산업의 숨은 황제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가치가 무려 40억 달러에 이르도록 키운 공신 중 한 명이다. 5000개의 갖가지 캐릭터를 보유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모두 그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것은 물론, 캐릭터를 다양한 미디어에 적용하는 ‘원 캐릭터 멀티 유즈’의 개념을 창안해 캐릭터 비즈니스를 발전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엔 그의 손바닥 상과 이름이 새겨진 별 모양의 표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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