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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막걸리 살렸다!

시장이 막걸리 살렸다!

이른바 ‘막걸리 누보’가 인기다. 그해 생산한 포도로 담근 와인을 뜻하는 ‘보졸레 누보’에 빗댄 말인 ‘막걸리 누보’는 올해 생산한 햅쌀로 빚은 막걸리를 뜻한다.

유통업체에 따르면 이 햇막걸리의 인기가 보졸레 누보보다 높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서서히 일어나던 막걸리 붐은 올해 들어 말 그대로 열풍 수준이다.

더 이상 막걸리를 마시는 것이 새로울 게 없을 정도다. 막걸리 열풍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막걸리 출고량은 2002년 12만9000kL로 바닥을 친 후 2003년 14만1000kL, 2004년 16만2000kL, 2005년 16만6000kL, 2006년 17만kL, 2007년 17만 1000kL, 2008년 17만6000kL 등으로 오름세다.

올해의 열풍을 감안한다면 20만kL는 가볍게 넘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막걸리 열풍은 일본을 통해 시작된 측면이 있다. 일본에서 막걸리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한국으로 이것이 역수입되면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막걸리 열풍을 취재한 언론의 기사들도 대부분 일본에서의 인기를 집중 조명했다.

하지만 막걸리가 어제오늘 생긴 술도 아니고 일제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술이었던 걸 감안하면 일본에서도 왜 하필 지금 막걸리 열풍이 불었는지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막걸리의 역사를 보면 오늘날 막걸리가 누리는 호사는 아직 예전의 명성에 비해 보잘것없다. 일제시대에 막걸리는 한때 전체 술 소비량의 79.6%를 차지했다. 말 그대로 국민주(酒)였다. 하지만 쌀이 귀해지면서 막걸리 생산에 한계가 왔다.



보졸레 누보 비켜! 햇막걸리 돌풍1964년 정부는 쌀을 원료로 막걸리를 빚는 것을 금지했다. 1960년대 쌀 부족현상이 심해지면서다. 쌀 대신 밀가루가 막걸리 원료로 사용됐다. 전통 누룩 대신 일본식 입국(立麴)을 사용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밀가루를 주 원료로 하고 누룩 대신 입국을 쓰자 이전과 다른 맛의 탁주가 등장했다.

유통과정에서 후발효에 의해 이산화탄소가 생성돼 청량감 있는 탁주가 만들어졌던 것. 1974년 막걸리 출고량은 168만kL로 최고를 기록했다. 전체 술 소비량의 70%까지 회복했다. 1970년대 말 이후 맥주·소주·양주 등에 의해 매출이 계속 떨어지자 업계는 1982년 자구책으로 알코올 도수를 6도에서 8도로 높였다.

그러자 서울지하철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에게 막걸리를 마시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안전사고 위험 때문이었다. 막걸리는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의 길을 걷는다. 원료로 쌀 사용을 금지한 1964년부터 1990년까지 암흑기로 볼 수 있다. 막걸리의 고유한 맛이 사라지면서 싸고, 볼품없는 술로 전락했다.

서민들마저 막걸리를 할 수 없이 마시는 단계가 됐다. 막걸리가 추락한 원인은 여럿 있겠지만 막걸리를 보호하려고 만든 울타리가 오히려 독이 됐다는 지적이 있다. 1949년 주세법 제정 때부터 현저히 낮게 책정된 막걸리 주세율(1991년부터는 5%)과 1961년 도입된 독점적인 지역판매제도의 보호막 안에서 안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낮은 주세율 덕분에 탁주는 시판 중인 물보다 싼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광범위한 규제를 받아야 했다. 품질 향상이나 신제품 개발이 어려웠다. 여기에 산업화로 인해 막걸리가 외면 받은 것도 몰락을 촉진했다. 전국에 작은 술도가에서 빚는 막걸리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맥주, 소주, 양주에 비해 마케팅이나 유통구조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업계에 자율이 찾아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0년 쌀로 막걸리를 제조하는 게 허용됐다 (1977년 대통령 지시로 일시적으로 쌀막걸리 생산한 적은 있다). 알코올 도수 6% 이상에서 제조자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규제를 정비하면서 막걸리 제조허가에 필요한 허가 용량과 시설기준을 완화하고 신규제조 면허금지 조항을 삭제해 누구나 쉽게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낮췄다. 또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제품생산을 위해 인삼, 잣, 대추, 그 밖의 과일 사용을 허용함으로써 다양한 고급 막걸리 생산이 가능해졌다.

용기의 재질을 다양화하고 유통업체에 적용했던 일정한 시설과 자본 확보 의무규정을 완화해 신규 업체의 참여를 유도했다. 막걸리의 규격을 알코올 성분 ‘3도 이상’(2000)으로 조정하고 판매지역 제한을 해제한 것은 2000년에 시행됐다. 그 결과 차별화된 다양한 막걸리가 나타났고 품질은 향상됐다.

누구나 만들고, 어떤 제품이든 만들 수 있고, 어디든 판매할 수 있게 되면서 울타리 속에서 사멸해 가던 막걸리가 시장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쯤 해외 수출도 시작됐다. 1993년 2월 이동주조의 ‘이동쌀막걸리’가 일본으로 처음 수출된 것도 이런 자율화 속에서 나타난 결과다.

이동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농촌정책연구본부장은 “내가 만든 막걸리를 ‘내 지역’ 안에서만 팔 수 있다면 누가 연구개발이나 투자를 하겠느냐”며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규제완화가 10년, 20년 뒤 막걸리 붐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막걸리 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제완화에 의한 시장 자율의 힘이 숨어 있다.

이제 막걸리 시장은 연간 2500억원대로 성장했다. 생막걸리가 1600억원, 살균막걸리가 900억원대다. 그러나 지난해 8조6000억원 규모인 국내 술 시장에서 탁·약주의 점유율은 3.6%에 불과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지금 같은 붐과 신제품 개발, 소비자를 향한 마케팅이 지속된다면 한때 술시장의 80% 가까이 차지했던 막걸리가 3%대에 머물 수만은 없다.



제조시설 기준 완화 시급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쌀은 ‘절약’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막걸리 업체도 다른 주류업체 못지않게 마케팅이나 영업,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막걸리 활성화를 위해 제조시설 기준 완화를 검토하고 있고, 지원금도 책정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막걸리 붐이 앞으로 계속될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전국적으로 780개에 달하는 막걸리 제조장 가운데 과연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품질과 위생을 갖춘 공장이 얼마나 될지 따져봐야 한다. 단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소주나 맥주와 달리 막걸리는 지역 특산품처럼 각 지역의 고유한 물맛과 재료 맛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780개 공장을 통합하거나 합병하기보다 지역별로 품질기준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는 모법(母法)을 만들고 지역별 제조자들의 모임에서 품질기준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나는 막걸리 매니어’가 아니라 ‘나는 ○○막걸리 매니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상표권도 획일적으로 하기보다 ‘고창 복분자’ ‘진도 홍주’처럼 지리적 표시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정부에서는 농림부와 특허청으로 이원화된 지리적 표시제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나서서 이벤트를 벌이고, 마케팅을 하고, 지원금을 주는 제도보다는 기업들에 환경을 만들어 줘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동필 본부장은 “780개에 달하는 제조장을 통합하기보다는 각각의 특색에 맞게 발전할 수 있도록 세심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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