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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부르는 황혼가에 中企 ‘덩실덩실’

그들이 부르는 황혼가에 中企 ‘덩실덩실’

니나미 다케시(新浪剛史) 로손 사장은 선배 CEO의 발자취를 소중하게 여긴다. “나는 은퇴한 사람들이나 은퇴할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며 로손의 역사를 배운다.” 세월의 도도한 흐름 앞에 CEO는 미물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기업을 호령하는 CEO도 언젠가 은퇴라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한다.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자신을 ‘회사의 임시 집사’라고 빗대는 이유다. 그러나 은퇴 CEO의 경험·노하우·통찰력을 허투루 버려선 안 된다. 기업의 자산이자 경제발전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여기 후대를 위해 ‘성공 DNA’를 전파하는 은퇴 CEO가 있다. 그들이 부르는 의미 있는 황혼가(黃昏歌)를 들어봤다.



권동열 전 고려피혁 대표




“할아버지가 손자 아끼는 마음으로…”1976년 권동열(69) 전 고려피혁 대표는 대우그룹 기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CEO는 김우중. 30대 권동열 전 대표의 눈에 비친 김우중 대우실업 사장은 초인적인 사람이었다.

“밤새워 회의를 해도 지친 기색 한번 보인 적 없습니다.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죠.” 권 전 대표는 자신의 롤 모델로 김우중을 선택했다. 당연히 꿈도 CEO.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1982년 대우그룹 계열사 중 경영사정이 가장 나빴던 고려피혁 대표에 전격 선임됐던 것. 그는 “기뻤지만 잠시뿐이었다”고 회상했다. 300%에 육박하는 부채비율이 연일 그의 숨통을 조였기 때문이다.

권 전 대표는 일주일에 4~5차례 지방 공장에 내려갔다. 현장을 제대로 봐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우그룹 계열사 중 가장 적은 급여와 보너스를 받는 직원들도 어르고 달래야 했다. 연일 ‘이자 내라’고 독촉하는 주거래은행을 설득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권 전 대표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새벽 2~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어요. 스트레스 때문이었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권 전 대표의 열정은 쓰러져 가는 고려피혁을 회생시켰다. 그가 대표를 맡은 지 1년 반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던 것이다. 권 전 대표는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려피혁 이후 삼신올스테이트생명 부사장(1989~91), 남양정밀(1992~95), 퍼시스 대표(1996~2002) 등을 거친 그는 2004년 은퇴했다. 그의 나이 63세 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들더군요. 그래서 강남 테헤란로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었죠.”

그는 은퇴 후에도 양복을 입고 이곳에 출근했다. 흐트러지기 싫어서였다. 신문 보는 게 전부였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은 채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경영 노하우 전수 “뿌듯해”“CEO 시절 습득한 경영 노하우와 경험을 이대로 버리는 것 같아 아쉬웠죠. 인생의 여유는 되찾았는지 몰라도 심적으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2005년 권 전 대표는 지인의 소개로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에 참여했다. 자신의 경영 노하우를 후배 CEO에게 전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무료봉사였지만 그는 마다치 않았다. 그때 만난 회사가 납골함·제기 등을 생산하는 고려공예였다. 전통 목기 관련 특허를 가지고 있는 가능성 있는 회사였지만 문제가 적지 않았다. 경영전략, 마케팅, 판로개척이 부진해 경영난이 가중됐던 것. 가내수공업 방식의 회사 운영도 뜯어고쳐야 했다.

“복잡한 공정부터 당장 줄여라.” 권 전 대표는 쓸데없는 공정을 줄여야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발품을 팔아 판매망을 구축하고, 위탁판매를 병행할 것을 주문했다. 제품을 고·중·저로 분류해 시장과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하도록 했다. 나아가 해외 시장 개척도 주문했다.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기업형 전통목기 제조업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권 전 대표의 조언 덕분인지 이 회사는 환골탈태 중이다. 지난해엔 국내 목기 제조업체로선 드물게 미국·일본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가내 수공업 제조방식을 탈피하고 있는 것도 성과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폭넓은 경영지식이 한 중소기업 성장의 밀알이 되고 있는 거다. 그는 “뿌듯하다”고 말했다. 현직 CEO 때보다 더 벅찬 느낌이라고 했다. “전직 CEO의 마음은요, 할아버지가 손자를 아끼는 것과 비슷해요.” 권 전 대표의 ‘인생 2막’은 의미 있고 아름답다.



김성덕 전 연합철강공업 대표




실패한 ‘빨간 마후라’의 후배 사랑“한번 잘못 들어서면 제 길을 찾기 어렵습니다.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게 선배의 몫이죠.” 김성덕(65) 전 연합철강 대표는 조종사가 꿈이었다. 공군사관생도 시절 허리를 다치지만 않았어도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둘렀을 게다.

하지만 그는 소위로 제대했다. 역대 공군사관생도 중 소위 제대는 그밖에 없다. 왜? 생도 1학년 때 허리를 다친 게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그땐 아무도 몰랐다. 허리 통증을 호소했지만 ‘문제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의 척추 뼈가 뒤틀어져 있는지 안 것은 사관학교 졸업 직후였다. 비행기를 탈 수도, 군 생활을 지속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김 전 대표는 실의에 빠졌다. “누구 하나라도 내 허리를 관심 있게 봤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제대 후 그는 온갖 역경을 뚫고 연합철강 대표(1988~ 89), 일신방직 전무(1990~92), 한남철강 부사장(1992~93), 한국철강신문 부사장(1993~2003) 등을 역임했다. 김 전 대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며 “그래서 은퇴하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후배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2008년 은퇴한 그는 다짐대로 후배 CEO에게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하고 있다.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의 일원으로 지금까지 30여 개가 넘는 중소기업을 도왔다.



오류 잡는 특효약, 선배의 지혜대표적인 곳이 오버시스 코리아다. 2008년 12월 창업한 이 회사는 중남미·스페인에 철강제품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한다. 하지만 짧은 업력 탓에 경영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철강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 전 대표는 이런 문제점을 한눈에 알아보고, 기본부터 가르쳤다.

이를테면 국내 제강사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법, 해외 수요처를 발굴하는 노하우, 회사별 제품 특성 및 장단점까지 세심하게 일러줬다. 긴급 상황 발생 시 대처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 날 이 회사 대표가 찾아왔어요. 이중계약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조언했죠. ‘감추면 문제가 커진다. 솔직하게 말하라. 그러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문제가 잘 풀렸다고 하더군요.”

오버시스 코리아는 최근 남미에서 많은 계약을 따냈다고 한다. 김 전 대표의 자문이 한몫 톡톡히 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몸을 낮춘다. “조종사를 포기하면서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저와 똑같은 아픔을 후배 CEO가 겪을 필요는 없잖아요. 힘과 역량이 된다면 많은 중소기업 CEO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습니다.”



남기재 전 기아정보통신 대표




“오너의 목에 방울을 달다”LG반도체, LG정보통신 이사를 거쳐 강원이동통신(1992~94), 경제방송(1994~95) CEO를 역임한 남기재(66) 전 기아정보시스템 대표는 미스터 ‘닥터’다. 중소기업의 오류를 귀신처럼 잡아낸다.

2009년 디지털 복합기 전문업체 태흥아이에스 부회장에서 물러난 남 전 대표는 그해부터 전경련 중소기업경영자문단에 참여하고 있다. 그가 ‘기업 DNA’를 완전히 바꿔놓은 곳은 S산업이다.

수십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이 회사에 혁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남 전 대표가 S산업 오너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 내용이다.

남기재: “회사 DNA를 바꾸고 싶으십니까?”

S산업 오너: “그렇습니다.”

남기재: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인지 정리해 오세요.”

S산업 오너: “무엇을 말입니까?”

남기재: “경영환경이 바뀌어도 당신의 회사가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오너 스스로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해 보세요.”

남 전 대표의 눈에 비친 S산업은 그리 나쁜 회사가 아니었다. 연 250억원에 이르는 매출액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손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회사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수년째 정체돼 있다는 점이었다. 남 전 대표는 오너의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곳간을 열지 않는 행태에 메스를 대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오너의 고집도 골칫거리였다. 이 회사 오너의 지식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 그래서 직원은 물론 협력업체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회사 운영도 독단적이었다.



선배 쓴소리에 껍데기 벗은 후배직원들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었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으랴. 남 전 대표는 시시때때로 오너와 대화하고 설득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선 평소보다 12배 많은 연료가 소모된다고 자문했다. 투자하라는 거다. 또 스스로 권위를 버려야 직원과 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까마득한 선배 CEO의 끈질긴 조언에 이 회사의 오너는 마음을 바꿨다.

직원의 말을 경청하고, 성장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일까. 이 회사는 지난해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투자했다. 올 매출액은 전년비 15%가량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활주로에 서 있던 고물 비행기가 마침내 이륙을 시작한 것이다. 은퇴 CEO 남 전 대표의 쓴소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는 “무한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새싹이 돋아나려면 거름이 필요합니다. 거름이 시원치 않으면 새싹도 파릇파릇하지 않죠. 은퇴 CEO의 조언은 중소기업 성장에 좋은 거름이 될 것입니다.” 은퇴 CEO의 황혼가가 이처럼 울려 퍼지는 날 중소기업은 실패 비용을 줄이고, 성공적 진화를 거듭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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