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보상이 아니라 본질
‘놀이’는 보상이 아니라 본질
미국 CBS의 대표적인 드라마 NCIS(해군 경찰)는 벌써 방송 7년째를 맞는 인기 수사물이다. 올해에는 주무대인 워싱턴DC를 떠나 LA를 배경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소품은 50인치 가까이 되는 평면 모니터. 손가락 여러 개로 별도의 키보드 없이 자유자재로 사진 크기를 늘였다 줄이고, 파일을 손가락으로 집어 옆의 대형 모니터를 향해 던지면 파일 전송이 된다. 드라마 속 얘기만이 아니다. 이 대형 디스플레이는 실제로 존재한다.
혁신적인 멀티 터치 디스플레이인 ‘매직월’을 만든 퍼셉티브 픽셀의 본사는 뉴욕시 맨해튼 남부지역인 첼시에 있다. 기자가 이 회사를 찾아갔던 건 2008년 5월 5일. 이 회사 설립자 중 한 명인 재미교포 2세 제프 한이 타임지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뽑힌 지 3일 만이었다.
이날 첼시 방문은 뉴욕대 공과대학 연구원이기도 한 제프 한을 인터뷰하러 간 자리였다. 그러나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호텔 스위트룸을 닮은 회사 내부였다. 퍼셉티브 픽셀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커다란 거실이다. 자사 제품인 매직월 한 대가 놓여 있는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가 마련돼 있고, 테이블에는 갖가지 게임기, 잡지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제프 한이 회사의 자랑거리라며 데려간 곳은 바로 식당. 문을 열자 영화에서나 봤던 초대형 식탁이 보인다. 특급호텔에서나 볼 수 있는 각종 은식기와 촛대, 벽면에 걸린 그림들이 인상 깊었다.
제프 한은 “나를 포함해 10명 정도 되는 연구원들은 너무 바빠 밖에 나갈 수 없다”며 “그래서 연구소를 푹 쉬고 언제든 품위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편안한 집처럼 꾸몄다”고 말했다. 출퇴근하는 대신 연구실을 호텔 스위트룸으로 개조한 것.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에머리빌에는 애니메이션 제작업체 픽사의 스튜디오가 있다.
픽사 스튜디오의 건물은 15채인데 각기 다른 모양으로 지어졌다. 외벽을 장식한 붉은 벽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색이 조금씩 다르다. 같은 붉은색이지만 일곱 가지나 되는 수제품 벽돌로 6000평이 넘는 건물을 지었다.
픽사 스튜디오는 애플 CEO 스티브 잡스가 1986년 스타워즈 시리즈로 유명한 루커스 필름의 컴퓨터 그래픽 부서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해 설립한 곳이다. 이 회사는 스튜디오 모습도 유별나지만 그 내부는 더 심하다.
밤샘 잦아 호텔 스위트룸 옮겨놔처음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픽사 스튜디오에서 시트콤이 촬영 중인 것으로 오해할 만하다. 카메라만 없다 뿐이지 방송국 스튜디오처럼 각기 다른 모양의 방들이 꼭 세트처럼 나열돼 있기 때문이다. 이 유별난 모양의 방들은 이 회사 애니메이터들의 사무실.
중세 유럽의 성을 닮은 사무실이 있는가 하면, 숲속 오두막집,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볼 법한 우주선 모습까지 다양하다.
픽사는 이들에게 약 2평의 공간을 일률적으로 분양하지만 이를 꾸미는 것은 직원들의 몫이다. 직원들은 직접 망치를 들고 자신들의 사무실을 짓는다. 새로운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 다시 짓는다.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픽사 직원들에게 일은 놀이고 놀이는 곧 일이다.
근무시간도 기본적인 회의 등을 제외하면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다. 사무실에서 운동하기도 하고 게임이나 심지어 조깅을 하기도 한다. 다 평일 근무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공간에서 직원들은 토이스토리, 인크레더블과 같은 기발한 작품을 내놓는다.
캘리포니아주립 롱비치대학의 윌리엄 머서 교수가 2009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근로자들 중 단지 29%만이 유머가 자신이 다닌 회사의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8%만이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가 근로자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머서 교수는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면 창의성과 생산성이 향상되고 건강악화로 일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적다”고 밝혔다. 직원을 기쁘게 하면 회사가 기쁘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구글, 애플 등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자유로운 회사들이 포진한 미국에서조차 연구 결과에서처럼 실행하기 힘든 일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제품, 더 자세히 말해 얼마짜리 제품을 만드는 회사냐에 따라 놀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가 결정된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뒹굴며 놀다가 일하는 뉴욕의 퍼셉티브 픽셀이 만드는 ‘매직월’의 대당 가격은 대형 제품의 경우 10억원이 넘는다.
그래서 주요 고객들도 CBS처럼 방송국이거나 군대, 중동의 귀족들이다. 픽사의 경우도 한 작품으로 수천억원의 수익을 올린다. 또 한 가지 특징은 특별한 아이디어, 기술이 있는 직원들이라는 점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뉴욕시의 열악하거나 우아한 직장생활이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로 사무실들이 몰려 있는 맨해튼 미드타운을 평일 점심시간 때 방문해 보면, 영화처럼 스타벅스 커피 열 몇 잔을 트레이라는 운반용 종이에 가득 담아 옮기는 1~2년차 신입사원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들이 일하는 직장은 광고회사, 모델 에이전시, 언론사 등 대단한 곳들이다.
그만큼 인기 있는 직장에는 지원자도 많다.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을 때까지는 커피 심부름, 야근을 하며 서울의 샐러리맨과 같은 생활을 이겨내야 한다. 살인적인 물가의 뉴욕에서 NGO의 자원봉사자가 받는 활동비 수준의 월급도 견뎌내야 한다. 이를 견뎌내고 조직에서 중간간부급 이상이 되거나, 수준급 전문가가 되면 우아한 직장생활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해묵은 논란과도 같다. 제대로 대우해주고 일할 만한 환경을 먼저 만들어 줘야 하는지, 혹독한 직장생활 끝에 보상으로서 놀이가 주어져야 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점차 놀고 나서 실적을 기대하는 것이 나쁜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를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디오, 혁신의 비결은 놀이2008년 포춘지는 세계의 베스트 디자인 오피스 부문에서 다국적 광고회사 오길비&매더의 광저우 사무실을 뽑았다. 이 사무실을 디자인한 모저의 웬디 롱은 수상 소감을 말하며 ‘커피스족’이란 말을 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사무실이 답답해서 차라리 카페에서 기분 전환을 하면서 업무를 보는 사람들을 뜻하는 ‘커피스족’의 수가 크게 느는 것을 보면서 사무실을 카페처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 회사에서 놀게 하고 사무실을 카페처럼 만드는 모든 작업은 직원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아 생산성을 늘리려는 시도다.
중국 광저우에 문을 연 오길비는 이러한 시도를 ‘보상’이 아닌 ‘전제조건’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에 만족했다. 광저우 사무실의 한 실장은 공간마다 놀이동산처럼 다른 테마로 꾸며져 있어 더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재미있어 야근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전했다. 포춘은 그 결과 업무성과 또한 크게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1978년 네 명의 스탠퍼드대 졸업생이 만들어 이제는 세계 최고 디자인 기업으로 성장한 미국의 아이디오(IDEO)도 처음부터 놀이와 스트레스 없는 직장을 만들어 성과를 축적한 경우다. 공동 설립자인 톰 켈리는 『유쾌한 이노베이션』이란 저서에서 “혁신적인 기업문화는 신나는 일터이자 진지한 놀이터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아이디오는 1990년대 중반 삼성전자의 디자인 컨설팅을 도맡아 이 회사가 기존 저가 이미지를 벗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이디오는 지금까지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폰용 소프트웨어 등에까지 진출해 여전히 혁신을 우선시하는 기업임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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