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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설 같았던

진짜 소설 같았던

그의 삶은 굴곡이 심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산분쟁. 그에 따른 인간적 고뇌와 법적 책임이 니나 왕을 괴롭혔다.

홍콩인은 그를 ‘시우팀팀’이라 불렀다. ‘Little Sweetie’라 부르기도 했다. ‘깜찍한 애인’이라는 뜻의 정감 가득한 애칭이다.

부모님이 지어준 ‘쿵유숨’이라는 이름도 있었고 남편 따라 지은 니나 왕이라는 영어 이름도 있었지만 그는 애칭으로 불리길 더 원했다. 외모와 성격이 그랬다.

자그마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 순박한 웃음, 그리고 두 갈래로 땋은 머리.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소녀 같은 모습을 고집했다. 일부에서는 주책이라고 놀려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늙어서도 낭만과 감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면엔 절제와 무절제가 혼재했다. 개인생활은 자린고비였다.

치약 하나 살 때도 가격을 비교해 보고 살 정도였다. 직원들에게도 절약과 검소를 강조했다. 대신 남을 도울 때는 수십억원을 물 쓰듯 썼다. 애인에게도 손이 커 수천억원을 줬다. 그의 인생은 굴곡이 심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산분쟁에 따른 인간적 고뇌와 법적 책임은 항상 그와 함께했다.

2007년 난소암으로 사망한 니나 왕 얘기다. 아시아 최고 여성 부호였던 그는 자산이 1000억 홍콩달러(약 15조원)가 넘는다는 차이나 켐(華懋) 회장이었다. 차이나 켐은 1974년 니나 왕의 남편인 테디 왕(王德輝·1999년 법원 사망선고)이 세운 홍콩의 부동산개발 회사다. 현재는 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홍콩 330여 개 지역에서 부동산개발을 했고 홍콩 시내 대형 빌딩만 수십 개를 소유하고 있다. 니나 왕이 사망한 후 풍수 전문가인 그의 애인 토니 찬(陳振聰·52)과 차이나 켐 자선기금의 유산분쟁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월 초 홍콩 고등법원(1심)에서 자선기금 측이 승소했지만 찬이 항소하면서 아시아 최대 유산분쟁은 2라운드로 접어들고 있다.


남편의 죽음, 그리고 불행의 시작홍콩에서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말은 그의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1937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생했다.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고 훗날 그는 회고했다. 니나는 이곳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서막을 여는 한 남자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훗날 남편이 된 테디 왕이다.

둘은 이웃에 살았던 소꿉친구였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매일 같이 골목을 누비며 놀았다. 1940년대 초반 테디 왕의 가족이 홍콩으로 이주하자 둘은 울면서 이별했다. 1948년 니나의 가족도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둘은 재회했고 1955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둘은 행복했다.

니나의 시아버지인 왕딘신이 세운 화학회사는 나날이 번창했고 둘 사이 금실도 아이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그지없이 좋았다. 1974년 테디 왕이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아 차이나 켐을 설립하면서 둘은 부부이자 동업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니나의 불행은 1983년 4월 시작됐다.

당시 차이나 켐 회장이던 남편 테디 왕의 벤츠 승용차가 홍콩 시내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테디는 괴한들에 의해 쇠사슬에 묶인 채 8일 동안 감금됐고 니나는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3300만 미국달러(약 382억원)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홍콩 경찰은 테디 왕을 납치한 범인들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수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테디 왕은 최정예 사설 경호원들을 고용해 신변안전에 만전을 기했다. 그것도 허사였다. 테디는 1990년 4월 홍콩의 폭력조직 삼합회 조직원으로 의심되는 괴한들에게 또 납치된 후 실종됐다. 이번에도 니나는 남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범인들이 원하는 액수가 얼마든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1999년 니나는 남편에 대한 법적 사망을 법원에 요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남편이 납치된 후 신변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외출할 땐 사복 경호원 50여 명이 밀착 경호를 해 국가원수 행차를 방불케 했다.


시아버지와 길고 긴 유산분쟁

▎니나 왕과 19세 연하의 애인 토니 찬.

▎니나 왕과 19세 연하의 애인 토니 찬.

남편의 사망선고로 니나의 불행은 멈추는 듯했으나 그에겐 더 험난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남긴 1억3000만 미국달러(약 1조5000억원) 유산을 놓고 시아버지인 왕딘신과 소송이 시작된 것이다. 재판의 핵심은 테디 왕이 작성했다는 서로 다른 세 장의 유언장이었다.

첫 번째는 1960년 작성됐다는 재산분할 유언장이었다. 테디가 사망한 후 재산을 아버지인 왕딘신과 부인인 니나가 균등히 분할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왕딘신은 1968년 작성됐다는 또 다른 테디의 유언장을 내밀었다.

모든 재산을 아버지가 상속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딘신은 아들이 니나의 외도 사실을 알고 분개해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니나도 1990년에 작성됐다는 세 번째 유언장을 공개했다. 테디가 납치돼 실종되기 한 달 전에 작성됐다는 이 유언장에는 테디가 아버지 등 친족에게 실망했으며 모든 재산을 니나가 상속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중국어로 적혀 있었다.

유언장 말미에는 영어로 ‘내 인생은 오직 그대 뿐(One Life, One Love)’이라는 글귀도 있었다. 가족 집사가 입회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그의)사인도 있었다. 당연히 재판은 두 장의 유언장 중 어느 것이 진짜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첫 번째 유언장에 따라 재산을 반분하자는 일부 타협안도 나왔지만 둘은 ‘모 아니면 도’라며 한 치의 양보도 거부했다.

재판에는 50여 명에 달하는 홍콩 최고 변호사는 물론 전 세계 최고 필적 감정가들이 총동원됐다. 1심 재판은 무려 171일 동안 치열한 공방을 계속했다. 시아버지 측은 니나의 간통 혐의까지 거론하면 거칠게 몰아붙였다. 훗날 재벌 할머니의 위험한 사랑으로 수사됐던 풍수 전문가와의 사통을 지칭한 것이었다.

2002년 11월, 운명의 1심 재판 결과는 니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홍콩의 저명한 판사인 데이비드 얌은 1990년 유언장은 정밀하게 위조됐고 1968년 유언장이 진짜라는 판결을 내렸다. 니나는 즉시 항소했으나 2004년 6월 홍콩 고등법원도 그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2심 재판부 의견은 엇갈렸다.

세 명의 판사 중 두 명은 1심 판결을 지지했고 나머지 한 명은 1990년 유서가 진짜라는 의견을 냈다. 2005년 1월 니나는 유언장 위조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기소됐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상고했다. 2005년 9월 대법원은 고등법원 판결을 뒤엎고 테디 왕이 썼다는 1990년 유서가 위조되지 않은 진짜라는 판결을 내렸다.

홍콩 대법원이 2심 판결을 뒤엎는 경우는 거의 없어 당시 현지 언론은 ‘재판의 천지개벽’이라며 흥분했다. 6년여에 걸친 지루한 법정 공방이 진행되는 동안 차이나 켐의 자산가치는 10억 달러 가까이 불어나 있었고 니나는 곧바로 아시아 최고 여성 부호에 등극했다.


풍수 전문가 토니 찬과의 밀애차이나 켐을 거머쥐자 그는 ‘행복 시작 불행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만의 낭만과 감성에 더 집착했다. 토니 찬과의 ‘부적절한’ 사랑이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게 이때부터였다. 풍수 전문가인 찬과의 사랑은 남편의 실종에서 오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특유의 낭만성이 어우러지면서 증폭됐다.

1990년대 중반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남편 실종 후 회사 경영에 대한 부담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때 19세 연하로 미소년풍의 풍수 전문가인 찬이 그 앞에 나타났다.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설이 많다. 회사 자문 풍수 전문가를 구하던 중 눈이 맞았다는 설도 있고 누군가가 소개해 줬다는 풍문도 있다.

홍콩에서 풍수는 미신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로 통한다. 이 때문에 기업인들은 건물의 위치나 사업 선정을 할 때 대부분 풍수 전문가들에게 자문한다. 둘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됐든 궁합은 잘 맞았다. 돈에 대한 유혹과 낭만에 대한 유혹이 서로를 붙들었다. 잠자리는 물론이고 아기를 가질 계획까지 있었다는 게 찬의 주장이다.

니나는 이미 가족이 있던 찬에게 이혼 의사를 물었을 정도다. 물론 찬은 이혼하지 않고 재벌 할머니와의 밀애를 즐겼다. 니나는 확실하게 보답(?)했다. 니나는 풍수 자문비 등 명목으로 10여 년 동안 찬에게 무려 21억 홍콩달러(약 3100억원)를 건넸다. 홍콩 일부 언론이 찬을 ‘전 세계 제비들의 우상’이라며 비꼴 만했다.

그렇다고 니나를 돈으로 사랑의 허기를 채우는 노파 재벌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홍콩을 대표하는 자선사업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1988년 실종된 남편 테디 왕과 함께 차이나 켐 자선기금을 설립해 중국과 국제사회에 대한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95년에는 별도로 ‘니나 왕 농업장학금’을 만들어 중국 농촌 학생들을 도왔다.

1990년대 말에는 500만 홍콩달러(약 7억4000만원)를 기부해 베이징 항공항천대학에 국제회의센터를 지었다. 1997년 한 해에만 중국 학생들에게 5400만 홍콩달러의 장학금을 지원했을 정도다. 이렇게 그가 지금까지 중국에 기부한 액수가 수십억 홍콩달러에 달한다. 그는 생전에 사후 자선활동에 대해서도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사망하기 1개월 전 중국의 한 관리를 만나 사후 자선기금을 통해 기부활동을 계속할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형제자매 3명을 자선기금 경영에 참여토록 조치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중국 신화통신이 니나가 사망하자 그를 ‘공익에 충실한 중국의 대표적 기업인’이라고 호칭한 것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니나의 죽음, 다시 시작된 유산분쟁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니나는 2006년 난소암 판정을 받고 절망에 빠졌다. 홍콩달러 지폐로 홍콩 섬을 덮을 수 있다던 그의 재력도 암세포를 덮을 순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시한부 생명을 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재산 문제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마지막까지 그 거대한 재산을 놓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후 재산이 또 다른 법적 분쟁에 휘말린 이유다. 그의 애인 찬과 차이나 켐 자선기금이 1000억 홍콩달러를 놓고 벌이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남편 실종 후 시아버지와 벌였던 유산 소송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재판의 초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니나가 작성했다는 두 장의 유언장 중 진짜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찬이 재산을 상속받을 만큼 니나와 객관적인 연인 관계였느냐는 거였다.

니나는 2002년 차이나 켐 자선기금에 사후 모든 재산을 넘기겠다는 유언장을 썼다. 차이나 켐 자선기금은 니나의 동생 등 친인척들이 대주주다. 자선기금 측은 변호인 입회 아래 공증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니나가 사망하자 찬이 2006년 작성됐다는 별도의 유언장을 들고 나왔다.

▎2월 2일, 1심에서 패한 토니 찬(오른쪽)은 곧바로 항소했다.

▎2월 2일, 1심에서 패한 토니 찬(오른쪽)은 곧바로 항소했다.

연인이었던 찬에게 전 재산을 상속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난 3년 공방은 치열했다. 양측에서 36명의 증인과 풍수 전문가 및 필적 감정사들이 맞붙었다. 재판부는 결국 찬이 가진 유언장의 서명이 위조됐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니나와 찬이 연인 사이였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재산 상속을 할 만큼 공개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1992년 풍수 전문가와 재벌 오너로 만난 둘의 관계가 매우 가까웠다 해도 니나가 찬이 부인과 가족을 떠날 마음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연인관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 결과는 곧바로 찬에 대한 체포와 문서 위조 혐의 조사로 이어졌다.

6년 전 니나가 걸었던 그 길을 이번엔 생전의 애인이 걷게 된 것이다. 물론 찬이 항소했기 때문에 예단은 이르다. 1심과 2심에서 패하고 최종심에서 대미를 장식했던 니나의 극적인 승리가 재현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만약 찬이 최종심에서 이긴다면 둘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유산상속 소송 만루 홈런 타자로 기록될 것이다.

굴곡의 삶을 살았던 니나는 죽어서도 애인과 가족들에게 굴곡의 삶을 연출하라고 강요하는 듯하다. 4년 전 니나가 사망하자 홍콩의 한 네티즌은 그의 영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시아버지에게 그는 마녀였을지 모른다. 회사 임직원들은 그를 수전노라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미쳤다고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시아 최고 여성 부자였다면 어찌했을까. 나는 남편을 먼저 보낸 그가 가엾다. 그는 홀로 시아버지와 재산상속 싸움을 해야 했고 자식도 없이 외롭게 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았다. 니나의 노년은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을 잃었고 시댁 식구들과는 원수가 됐지만 돈과 사랑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가고 난 지금 돈과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니나의 죽음은 우리에게 말한다. 좀 더 사려 깊게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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