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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가 할 일도 필요하면 내가 한다”

“대리가 할 일도 필요하면 내가 한다”

직업이 장관인 사람이 있다. 4개 정부에서 여섯 차례나 장관을 역임한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대표적이다. 직업이 CEO인 사람도 있다. 벌써 13년째 CEO로 재직하고 있다. 500대 기업 CEO 중 최장수다. 연임만 무려 네 차례. 올 6월 열리는 주총에서 5연임될 게 확실하다. 그러면 그의 CEO 인생은 15년으로 늘어난다. 그것도 한 회사에서 말이다. 박종원(66) 코리안리재보험 사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박 사장은 재보험 시장에서 ‘마법사’로 통한다. 사실상 망한 회사를 아시아 1위, 세계 10위권 재보험사로 키웠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기업문화를 역동적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그의 ‘기적 같은’ 장수기록 이면엔 ‘마법 같은 경영능력’이 숨어 있다.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연세대 법학과, 미국 밴더빌트대 대학원 1998년 6월 재정경제원 공보관(이사관) 1998년 7월~ 코리안리재보험 사장

▎1944년 경기도 화성 출생 연세대 법학과, 미국 밴더빌트대 대학원 1998년 6월 재정경제원 공보관(이사관) 1998년 7월~ 코리안리재보험 사장

임직원의 3분의 1을 내보내는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했다. 원칙을 세워 흔들림 없이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새내기 CEO 박종원은 자신의 행동에도 원칙을 하나 세웠다.

‘조직을 바꾸려면 내가 솔선수범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CEO 박종원은 ‘등산 경영’으로 많이 알려졌다. 임직원들과 함께 백두대간을 구간별로 종주했다.

그러나 그는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박 사장이 산에 오르는 이유는 ‘그곳에 산이 있어서’가 아니다. ‘임직원들과 함께 오르기 위해서’다.

임직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다. 자신과 구성원에게 도전욕을 고취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 솔선수범하기로 했다. 산에 갈 때마다 앞장서기로 했다.

“내가 안 하면 직원들이 하겠나? 사실 등산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출장 핑계를 댈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직 리더가 빠지면 직원들 스스로 ‘왜 나만 해야 돼’라는 불만을 갖는다. 코리안리를 살리겠다고 맘먹은 이상 스스로 고삐를 조여야 했다.”

등산만이 아니다. 폭탄주도 직원보다 한 잔 더 먹는다.

‘CEO도 열외는 없다’는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직원보다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하는 것도 기본이다. 때론 과장, 대리 업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담당자가 일처리를 잘못했을 때다. 직원으로선 피곤한 일이다. 실제로 불만이 터져 나온 적도 많다.박 사장이 대리 업무를 처리했을 때의 일이다. 노조위원장이 서울 수송동 본사 11층 사장실로 뛰어 올라왔다.

롤 모델이 흔들리면 조직 죽는다



노조위원장: 대리 업무까지 하시면 어떡합니까?



박종원: 하면 안 되나?



노조위원장: 직원들의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박종원: 내가 대리 업무를 하고 싶어서 하는가. 스스로 잘하면 내가 안 할 것 아닌가. 불평불만 늘어놓기 전에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반성하는 게 먼저 아닌가.

김매는 데 주인은 아흔아홉 몫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많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처음엔 솔선수범하는 척하다가 제풀에 꺾이는 리더도 많다. 박 사장은 “CEO는 자신과싸움을 하는 자리”라면서 말을 이었다. 꾸준히 솔선수범하는 게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계속 솔선수범할 수 있느냐고? (나는) 자신 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을 거다. CEO는 직원의 역할 모델이다. 역할 모델이 흔들리면 조직이 어떻게 되겠는가.” 솔선수범 리더십은 CEO 박종원의 장수 비결 중 하나다. 경영과는 거리가 먼 공무원에서 경영자로 변신한 그가 어떻게 부실기업을 살리고 최고의 CEO로 성공했는지 그 과정을 처음부터 짚어보자.

“이사관 승진을 축하합니다.” 1998년 6월 재정경제원 공보관실에선 축하 다과모임이 열렸다. 부이사관에서 이사관으로 진급한 관료는 박종원 사장(당시 직함 공보관)이었다.

그러나 정작 박 사장의 얼굴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공직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아니면 인생 항로를 바꿔야 하나’. 그의 꿈은 다른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장·차관. 그런데 공직생활이 왠지 답답했다. 역량과 재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오른쪽)이 직원들과 함께 2박 3일 설악산 종주를 마치고 하산하고 있다.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오른쪽)이 직원들과 함께 2박 3일 설악산 종주를 마치고 하산하고 있다.



환영 받지 못한 변신심사숙고 끝에 박 사장은 민간기업 CEO에 자원한다. 재정경제원 관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재보험사 코리안리(옛 대한재보험)의 사장 자리였다. 그의 나이 54세, 정년까지 무려 6년여 남았을 때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조차 납득하지 못한 엉뚱한 선택.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민간기업 CEO로 가는 사람에게 누가 박수를 치겠는가.

그것도 외환위기 시절에 말이다. 그라고 마음이 편했으랴. ‘내가 적임자일까? 그냥 공무원으로 남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사장 취임 3일 전, 충격적인 보고까지 받았다. 코리안리의 재무 담당 임원에게서 받은 비공식 내부 문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업손실 3818억원, 당기손실 2800억원….” 그가 과감하게 선택한 코리안리는 호흡기가 필요한 부실기업이었던 것이다. 박 사장은 말을 잃었고, 밤샘은 계속됐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의 마법 같은 장수 신화가 쓰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나도 사람이다. 알았다면 망설이지 않았겠는가. 내가 경험이 있나, 뭐가 있나. 다른 기회를 찾을 수도 있지. 그런데 어쩌겠나. 이미 선택했는데…. 퇴로가 없었다.”

돌려보면 박 사장으로선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전임 CEO의 실적이 형편없다면? 후임 CEO는 조금만 실적을 내도 ‘성장’이라는 성적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박 사장은 달랐다. ‘코리안리를 글로벌 재보험사 반열에 올리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해병대 출신답게 ‘무한도전’을 선언한 거다.

그의 야심 찬 목표는 사장 취임사에 잘 나타난다. “노조와 힘을 합친다면 위기를 능히 탈출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박 사장은 “가시도 축복”이라고 했다. 가시밭길(위기)을 잘 뚫고 나가면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유다.

◆ 원칙경영으로 장수 초석 놓다 = 취임 후 그는 구조조정 메스를 든다. 코리안리의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식 구조조정을 꾀한 것은 아니다. 여기엔 박 사장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고, 이는 장수의 든든한 초석이 됐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원칙경영’의 토대를 세운 것이다.

박 사장은 근무평가(60%)·다면평가(40%)를 잣대로 전체 인원 320명 중 33%에 이르는 100여 명을 정리했다. 예외는 없었다. 전직 노조위원장이 구조조정 명단에 오르고, 정치권 압력이 가해졌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원칙과 효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사장도 등산이 힘들다“CEO가 원칙을 지키면 직원들로선 할 말이 없다. 원칙을 지킨 행동엔 늘 힘이 실리게 마련이다. 더구나 구조조정은 사람을 자르기 위한 게 아니다. 조직을 효율화하는 방법이다. 예외? 특혜? 그것 따졌다면 지금의 코리안리도, 나도 없다.” 박 사장의 원칙에 입각한 구조조정은 코리안리를 탈바꿈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조직이 효율적으로 변했다. 물 쓰듯 집행하던 사업비가 합리적으로 조정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해외 대형 재보험사들의 사업비 규모는 보유 보험료의 5~7%가량인 반면 코리안리는 구조조정 이후 3%를 유지하고 있다. 사업비가 대폭 절감된 셈이다. 이 회사의 1인당 생산성도 1998년 37억원에서 2008년 161억원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박 사장의 메스가 코리안리를 작지만 효율적인 회사로 만든 것이다. 박 사장은 그레셤의 법칙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일을 하지 않는 직원은 반드시 잘라야 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까지 오염시킨다. 코리안리가 그랬다. 회사는 쓰러져 가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 직원이 상당수였다.

대한민국은 망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는 이상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직원이 많을수록 조직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악화를 쫓아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양화가 또 다른 악화를 몰아내기 때문이다.”

◆ 열린 경영으로 혁신 불어넣다 = 박 사장은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모든 걸 열었다. 취임 직후 주 1회 열리는 확대간부회의의 명칭부터 바꿨다. 모든 직원이 참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열린 간부회의’로 변경한 것. 이 회의엔 노조위원장도, 신입사원도 참여한다.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회의 참가자에겐 동등한 발언권이 부여된다.

제도만 바꾼 게 아니다. 열린 경영을 위해 박 사장이 먼저 대화 창구를 만들었다.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말도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다. 박 사장은 임직원을 만날 때 꼭 수첩을 챙긴다.

사소한 의견이라도 허투루 듣지 않고 메모하기 위해서란다. 결실은 알차다. 코리안리는 최근 재보험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을 발간하기로 했다. 뜻밖에도 이 의견을 낸 주인공은 신입사원이다. 박 사장은 “열린 경영을 위해서라면 귀를 활짝 열고 ‘쓴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쓴소리 들을 줄 알아야 CEO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박 사장은 관료 출신이다. 대부분의 관료는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남의 충고를 듣기 싫어한다. 박 사장도 그랬다. 관료 시절, 듣기 싫은 소리엔 귀를 닫기 일쑤였다고 한다. 재경원 공보관 시절을 회상하며 박 사장은 말했다. “우리가 정책을 발표하면 기자들이 시시때때로 시비를 걸었다.

처음엔 머리 꼭대기까지 울화통이 치밀었다. ‘잘 모르는 것들이’라며 혼잣말을 한 적도 많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옳든 그르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최장수 CEO라는 명예로운 훈장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박 사장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CEO로서 성공하기 위해선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 내 직원을 자식처럼 = CEO가 제아무리 솔선수범해도,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도 직원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CEO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며 제스처를 취했을 때 쉬이 다가서는 직원은 많지 않다. CEO와 직원 사이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다. 이를 넘는 것은 CEO의 몫이다. 박 사장은 “직원을 마음으로 아껴야 한다”며 “그래야 직원 스스로 ‘나도 경영의 동반자’라는 생각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술자리를 갖는다. 겨울이면 예외 없이 함께 스키를 탄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 사장은 연애 상담사요, 스키 강사다.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나는 늘 이렇게 답한다. ‘우리 회사의 직원은 내 아들이요, 딸’이라고….” 이는 박 사장의 변치 않는 철학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공직생활을 했던 최종구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실무추진단장은 “(박 사장은) 일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과장 시절 직원들을 잘 챙겼다”고 들려줬다. “박 사장은 직원들 하나하나 어려움이 있는지 듣고 도움을 줬다. 공무원 시절 산행을 할 때면 뒤에 처지는 사람이 없도록 배려하면서 갔을 정도다.”

◆ 매서운 채찍을 들다 = 하지만 당근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식(직원)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부모(CEO)는 많지 않다. 당근만큼 중요한 것은 채찍이다. 긴장이 풀어진 직원을 어떻게 다루느냐도 CEO가 풀어야 할 숙제다. 박 사장의 철학은 언급했듯 ‘양화가 악화를 몰아낸다’이다. 그의 관점에서 악화가 많으면 곤란하다.

이 때문에 박 사장은 잘못에 대해 엄격하고 단호하다. 당근은 달콤하지만 채찍은 매서운 셈이다. 3월 2일 신입사원 20명이 열린 간부회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한 부장이 박 사장에게 혼쭐났다. 리스크 관리팀에서 건의안을 올렸는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건의안을 보지 않았는가’에서 시작된 박 사장의 질책은 ‘안 봤다면 이유는 뭐냐’ ‘실수인가 정신줄을 놓은 건가’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 신입사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 앞에서 연애 상담사를 자처하던 그 CEO는 온데간데없었다. 한 신입사원이 박 사장에게 건넨 말은 흥미롭다. “사장이 그렇게 무섭고, 높은 분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업무만큼은 야무지게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달콤한 당근 주고 매서운 채찍 들어야질책뿐이 아니다. 박 사장은 긴장의 고삐를 탄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제도도 만들었다. 심사분석보고회가 대표적이다. 이 보고회는 분기별로 열리는 정례 회의다. 쉽게 말해 각 부서가 내놓은 목표와 실적을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자리다. 박 사장은 목표를 달성한 부서엔 포상을, 미달된 부서엔 가차없이 채찍질을 한다.

‘왜 못했나? 변수는 무엇이었나?’라면서 말이다. 각 부서에 이 회의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진땀 나는 자리다. 박 사장은 이 회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목표만 그럴듯하고, 실적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용두사미 아니겠는가. 그래선 조직이 성장할 수 없다. 목표도 야심 차게 세워야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박 사장이 2001년 7월 호봉제를 폐지하고 성과급 연봉제(과장급 이상)를 도입한 것도 ‘경쟁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 실적으로 말하라 = 박 사장 부임 후 조직문화가 완전히 달라진 코리안리는 괄목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999년 294억원에 불과했던 당기순이익은 2008년 608억원으로 100% 이상 증가했다. 비상위험준비금을 포함한 수정 당기순이익은 같은 기간 434억원에서 1281억원으로 3배가량 늘었다.

총자산 역시 1999년 1조5009억원에서 2008년 4조1765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보험사의 BIS비율인 지급여력비율은 200%에 달할 정도로 재무적 안정성을 뽐낸다. 이 비율의 적정비율은 100%다. 재보험사의 매출액이라고 할 수 있는 수재보험료(손해보험회사가 다른 보험사가 인수한 위험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담하는 것)의 성장도 두드러진다.

1999년 1조2641억원에서 2008년 4조원을 훌쩍 넘어섰다. 재보험사 중 세계 13위, 아시아 1위(2008년 기준)에 해당하는 규모다. 일본 재보험사인 토아리(Toa Re)와 벌이던 치열한 선두경쟁도 이젠 끝났다. 일본 토아리의 수재보험료는 세계 20위권에 머물러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계속된 2009년에도 코리안리의 진군은 계속됐다.

이 회사의 지난해 4~12월 순이익은 604억원에 달한다. 당초 목표인 650억원을 넘어 750억원의 순이익이 기대된다(재보험사의 회계연도는 4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실현된다면 창사 이래 최대 실적으로, 전년(608억원)보다 23% 증가한 수치다. 수재보험료 역시 전년비 9%가량 증가한 4조389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망 직전까지 몰렸던 회사가 박 사장 부임 후 알짜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눈부신 성장의 이유를 조직문화 혁신에서만 찾아선 안 된다. 조직이 ‘혁신’으로 무장됐다고 꼭 실적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박 사장의 치밀한 ‘실적 끌어올리기’ 전략도 살펴봐야 한다. 사실 박 사장이 장수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오너와 주주들이 조직문화가 탈바꿈됐다고 만족할 리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실적이 떨어지면 곧장 CEO에게 삿대질하는 게 요즘 주주 아니던가. 박 사장도 이를 인정한다. “나는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실적은 내 성적표”라고 말했다.


종합금융그룹 도약 청사진 밝혀박 사장의 실적 올리기 전략은 ‘안정적’ 성장이다. 보험사는 보험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부임한 후 코리안리는 단 한번도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국내 채권 위주의 안정적 투자 포트폴리오를 운영하고 있다. 파생상품과 RG보험(선박 선수금 환급보증)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코리안리에 부여된 세계적 평가기관 S&P의 신용등급이 2006년 12월 이후 지금까지 A-인 까닭이다. 이 회사의 재무 건전성이 그만큼 튼튼하다는 방증이다. 그렇다고 박 사장이 ‘안정’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철저한 ‘리스크 매니지먼트’로 수익성이 검증되면 공격적 투자를 서슴지 않는다.

코리안리가 최근 금호생명 인수에 참여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회사는 올 1월 금호생명 인수를 위한 사모펀드에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해 500억원을 투자했다. 박 사장은 “남들은 위험한 투자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나는) 자신 있다”며 “리스크를 꼼꼼하게 따져본 결과, 우리에게 큰 수익을 안길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박 사장의 역발상 전략도 실적 개선에 한몫 톡톡히 했다. 1997년 국내 재보험시장의 완전 개방으로 세계 대형 재보험사들이 국내로 속속 몰려올 때 그는 해외시장 공략을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이 회사의 해외매출 비중은 1999년 매출의 5%가량에서 2008년 22%까지 확대됐다.

2020년엔 해외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게 박 사장의 목표다. 재보험사인 코리안리에 임원배상책임보험, 금융기관종합보험, 치명적 질병보험 등 신규 상품이 많은 것도 박 사장의 역발상 전략 결과물이다. 재보험사는 통상 상품개발에 소홀하다. 삼성화재, 현대해상과 같은 원수보험사에 맡긴다.

박 사장은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우리가 상품을 만들어 출시하면 원수보험사는 그 상품을 고객에게 판매해서 좋고, 우리는 원수보험사로부터 수재보험료를 받을 수 있어 좋다.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회사는 요즘도 신상품 개발에 몰두한다. 법률금융보험, 상조비용보험, 공공자전거 종합보험, 재래시장화재보험 등이다.

특히 스마트폰 전용 단말기 보험은 눈길을 끈다. 박 사장의 도전은 오늘도 계속된다. 코리안리를 2020년까지 세계 재보험사 중 ‘넘버 5’에 올려놓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이를 위해 아시아 위주인 해외 영업망을 유럽과 미주로 확대하고, 중국 베이징 사무소를 지점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중국 시장 노크는 박 사장의 몫이다. 중국 최대 오지인 우루무치를 직접 방문하는 한편 현지 초등학교 설립기금을 전달하는 등 텃밭 다지기를 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아시아 우량 보험사에 지분을 투자하고, 2008년 설립한 코리안리투자자문사를 자산운용사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제2금융권 회사를 인수해 종합금융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꿈도 꾸고 있다. 박 사장은 그래서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말한다. 직원들에게도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말 것을 주문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조직이든 CEO든 직원이든 장수하기 위해선 뼈를 깎는 변신을 꾀해야 한다는 거다. 코리안리를 부실기업에서 다크호스로, 이젠 월드클래스 재보험사로 이끌고 있는 박종원 사장. 그의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다.



최장수 CEO의 성공학

직급마다 장수비결 따로 있다
숲 볼 줄 아는 전문가 돼야 … 인성·책임감·정직, 장수의 전제 조건

박종원 사장은 500대 기업 최장수 CEO다. CEO로 재직한 기간만 해도 13년에 이른다. 박 사장이 전하는 샐러리맨 장수 비법을 소개한다.

◆ 신입사원, 인성부터 갖춰라 = 신입사원은 입사 후 첫 2~3개월을 잘 보내야 한다. 첫인상이 남기 때문이다. 근면·성실은 기본, 무조건 배우려는 자세도 중요하다. 박 사장은 “인성을 갖춰야 한다”며 “그렇지 않다면 회사에서 장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신입사원을 전통예절교육원에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다.

‘효(孝)’사상을 먼저 깨치라는 거다. “자기 부모, 가족한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회사 사람 챙기겠나.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팀워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재정경제원에 근무하면서 굳어졌다. 내로라하는 엘리트가 모인 재경원이 최고의 효과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를 관료의 개인주의적 성향에서 찾은 것이다. 박 사장이 백두대간 종주 등을 통해 팀워크를 유독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최고경영자만 CEO가 아니다 = “자신의 업무는 ‘내가 CEO’라는 생각으로 처리하라.” 박 사장은 장수 비결로 책임감을 꼽았다. 전문경영인만 CEO가 아니라 신입사원도, 대리도, 과장도, 부장도 CEO라는 것이다. 박 사장은 “CEO 혼자 책임경영을 부르짖어 봤자 헛일”이라며 “직원들 스스로 CEO관을 가질 때 개인도, 회사도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임경영은 ‘작으면서도 효율적인’ 기업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10명이 일할 것을 1명이 책임질 수 있다면 인건비 등 고정경비 절감에 도움이 된다. 박 사장은 1997년 취임 직후 코리안리의 직원을 3분의 1 가까이 정리했다. 이후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정원은 비슷하다. 직원들의 책임경영으로 1인당 생산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매출액·순이익 등 실적을 감안하면 500여 명의 직원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만 직원 1명당 생산성이 높아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하다”며 “코리안리엔 책임경영이 정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 중간관리자라면 정직하라 =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CEO와 사원의 연계다. 윗선의 지시를 아래에 제대로 전달하는 한편 아래 직원의 고충을 윗선에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중간관리자의 덕목은 그래서 정직이다. 자신의 입장을 의식해 상하 의견을 왜곡 전달하면, 조직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중간관리자는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존경받지 못한다. 박 사장은 “중간관리자라면 선배와 후배의 눈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며 “조직에서 장수하고 싶다면 정직한 관리자가 돼라”고 조언했다.

◆ 큰 그림 볼 수 있는 전문가가 돼라 =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다면 전문가가 돼야 한다.” 박 사장은 중간관리자 이상에겐 특별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전문가는 ‘숲을 볼 줄 아는’ 전문가다.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박 사장은 코리안리에 부임한 직후 순환보직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직원의 경력개발 및 매너리즘 방지를 위해 5년 이상 장기 근무자를 다른 부서에 순환 배치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제도를 도입할 때 노조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전문화 시대인 만큼 스페셜리스트가 더 많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박 사장은 하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단 6개월의 노력으로도 양성할 수 있다”며 순환보직제도를 밀어붙였다. 그는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되기 위해선 모든 분야를 섭렵해야 한다”며 “CEO를 꿈꾼다면 한 분야에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경험하라”고 조언했다.


박종원의 ‘눈치 없는’ 경영

“나는 잘리는 게 무섭지 않다”
아부보단 실적으로 승부해야 … 인사 간여 않는 대주주도 전문경영 정착에 한몫

박종원 사장은 ‘눈치 없는’ 경영을 펼친다. 스스로 경영을 하면서 소신을 굽힌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실제로 그는 경영을 할 땐 눈치를 보지 않는다. 상대가 대주주라도 마찬가지다. 재정경제원 관료 시절에도 박 사장은 꺾이지 않는 꼿꼿함으로 유명했다. 최종구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실무추진단장의 회상이다.

“박 사장은 윗선의 지시가 ‘아니다 싶으면’ 늘 직언했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재경원의 상급자들이 처음엔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나중엔 그를 더 믿고 신뢰하게 됐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박 사장은 자신의 기준에서 옳지 않으면 대주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반대로 옳아도 ‘Yes’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검토해 보겠다’는 말로 에둘러 답한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은 분리돼야 한다는 경영철학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박 사장은 부임 초기 오너와 종종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박 사장이 대주주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적이 대폭 개선돼서다. 박 사장 부임 후 코리안리는 연평균 13%씩 성장하고 있다. 800원에도 미치지 못했던 주가는 현재 1만원을 넘는다.

“잘 달리는 말의 기수를 누가 바꾸겠나. 실적이 좋은 CEO를 바꿀 대주주는 없다.” 그는 잘리는 것을 우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실적뿐 아니라 기업 문화를 혁신했기 때문에 자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연임을 부탁한 적도 없다. 거꾸로 원혁희 회장 등 대주주가 연임을 요청했다. 2007년 코리안리 창립기념회 때 원 회장이 인사말 도중 박 사장에게 연임을 요청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박 사장의 ‘눈치 없는’ 경영 배경이 꼭 좋은 실적 때문만은 아니다. 대주주의 무한 신뢰도 한몫 톡톡히 한다는 평가다. 원 회장을 비롯한 대주주는 경영에 간섭하는 법이 없다. 특히 인사에 간여하지 않는다. 경영은 전적으로 박 사장에게 맡긴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의 재계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박 사장도 이런 대주주의 철학을 높게 평가한다.

그는 “CEO의 자질을 운운하기 전 대주주가 먼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며 “내가 장기적 안목으로 경영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대주주의 신뢰”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소유와 경영이 엄격하게 분리돼 있는 코리안리의 사례가 한국 기업 문화에 좋은 선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 사장의 ‘눈치 없는’ 경영은 한국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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