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경제 ‘꿈틀’
현금경제 ‘꿈틀’
지난 수십 년간 저리의 풍부한 신용대출 자금이 미국 경제를 이끌어 왔다. 그러다 2008년 신용위기가 발생했고, 미국은 극단적인 부채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개인은 신용카드 부채를 상환하고 현금을 저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현금을 최고로 받들어 모시는 경영환경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금융위기 이후의 변화는 놀라웠다. 우선, 은행 대출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2009년 은행 대출은 연방예금보험공사가 기록을 시작한 이래 최고의 감소폭을 보였다. 반면에 가계와 기업의 미상환 채무는 2008년 가을 이후 19%나 감소해서 2006년 하반기 수준으로 돌아갔다.
푸아그라(거위 간 요리) 생산자들이 거위 입에 먹이를 퍼담듯이 마구 대출을 쏟아내던 금융권조차 채무를 줄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모건 스탠리 투자은행의 차입비율은 2007년 중반 이후 절반으로 감소했다. 시장의 우려 속에서 거품이 한창 형성되던 시절, 가계와 기업은 신용대출을 염두에 두고 소비와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현금 확보가 우선이다. 2007년만 해도 제로에 가까웠던 저축률은 1월 3.3%로 증가했다. 지난 9월 말, S&P 500대 기업에 속하는 376개 업체(가스·전력·수도업체와 금융업 제외)의 현금 보유액은 역대 최고 수준인 82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2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신용 경색은 경기 회복을 저해한다는 통념이 있다. 많은 기업, 특히 영세 기업의 경우, 채무 상환일을 연장하고 새로운 신용 한도를 설정하지 못하면 경영 확장에 제한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신용 대출이 경제의 유일한 발전 동력은 아니다. 지난해 민간 대출은 급격히 감소했지만, 경제성장률은 1분기 마이너스 6.4%에서 4분기 플러스 5.9%로 급격히 돌아섰다.
보다 넓은 시각에서 보면 현금 중시(대출 회피)의 경제관이 오히려 유익할지도 모른다. 호황기에 경제학자들은 ‘부채의 지출억제 원칙’을 심심찮게 거론한다. 부채 비율이 높으면, 파산을 피하려고 경영자(또는 주택 보유자)가 어려운 결정을 신속하게 내린다는 이론이다.
지급 불능이 되면 기업(이나 집)을 빼앗기게 되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에서 부채 비중이 높은 대출자들은 절약을 택하기보다 대출 상환 자체를 포기하거나 법정관리를 신청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인들은 이제 부채보다 현금의 지출억제 효과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금은 경영자나 소비자, 투자자가 돈의 사용처를 결정하기 전에 장기적 결과를 두고 신중히 재고하도록 만든다. 결국 금융위기도 자금 수요를 즉각적으로 충족시켜줬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던가? 신속한 적응력은 미국이 가진 경쟁력 중 하나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미 소비자와 기업은 모두 새로운 현실에 순응해 왔다.
사무용품 판매점 스테이플즈의 지역 매니저 데이비드와 아내 수잔나는 4명의 자녀를 뒀다. 이들은 2007년 2만 달러의 빚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신용카드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한다는 목표를 이루어냈다. “매달 식료품비나 연료비, 용돈 등을 따로 떼어내 봉투에 넣어 둔다.
그렇게 하면 우리 가족의 자금 상황이 정확히 파악된다”고 수잔나는 말했다. 소매업체들은 재빨리 수잔나와 데이비드처럼 모든 비용을 현금으로 지불하는 소비자를 겨냥한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다. 플로리다 탤러해시에 위치한 이레이어웨이닷컴(2005년 창업)의 경우, 7만5000명의 고객에게 애플과 아마존닷컴을 비롯한 1000여 개 업체의 제품을 최대 13개월까지 할부로 판매한다.
대개는 평균 440달러 상당의 전자제품을 4개월 할부로 구매하는 고객이 많다. 공동 창업자 세르지오 피넌은 겨울용 제설기를 여름에 미리 구매하는 고객, 다시 말해 이레이어웨이가 ‘계획적 소비자’라 이름 붙인 고객이 증가 추세라고 밝혔다.
텍사스 전력업체 퍼스트초이스파워는 지난 1월 선불식 상품 ‘컨트롤 퍼스트’를 출시했다. “텍사스에는 신용 지출을 최소한도로 유지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구가 100만에 달한다”고 브라이언 해이덕 사장은 말했다. 보증금이나 신용 없이 고객은 매월 일정량(가령 100달러 상당)의 전기를 선불로 구매 가능하다.
전력 소비량을 알려주는 스마트 미터기가 에너지 소비를 보다 계획적으로 관리하도록 도와준다. 현금 경제가 부상하면서 기업은 과거 차입금으로 해결했던 공장 신축, 값비싼 기기·건물 구입 등의 지출 항목을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그 대신 정해진 예산 내에서 효율성을 도모하고 예산을 절약해주는 업체의 인기가 높아졌다.
보스턴 소재 기업 에너녹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두 배나 늘었다. 에너녹의 서비스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우선, 전력회사를 대신해서 현금 지불을 선택한 기업으로부터 전기 수요가 최고치를 기록하는 피크타임에 사용량을 줄이겠다는 동의를 얻는다. 그리고 기업 건물에 미터기를 설치해서 에너지 소비량을 자세히 측정하고 기록한 후, 사용량 감축 방안을 제시해준다.
“우리는 에너지 절약 기회를 포착해주는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고 기업이 우리에게 지불하는 연간 비용의 두 배에 달하는 에너지 절약 방안을 찾아주겠다고 보장한다”고 팀 힐리 CEO는 말했다. “기업의 자본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 2009년 에너녹의 직원 수는 330명에서 400명으로 증가했고, 2010년 매출은 7500만 달러(약 40%) 증가하리라고 추정한다.
금융위기 이전, 기업과 투자자들은 차입 자본으로 배당금을 지불하거나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그런 금융공학 기술이 쇠퇴하고 대신 경영공학이 자리잡았다.
신용 경제 시절 다양한 금융기법을 활용한 차입매수로 수익을 올린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의 경우, 소매시장을 담당하는 중역들로 팀을 구성해서 달러제너럴과 토이저러스 같은 인수 기업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100% 대출로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가 줄어들듯이, 차입매수에서 차입금의 비중도 대폭 감소했다.
석탄업체 콘솔 에너지는 3월 15일 도미니온 리소스와 35억 달러에 천연가스전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콘솔은 가스전 매입과 개발을 위한 40억 달러 중 현금과 차입금 비중을 반반으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차입금의 비중이 낮고 현금 비중이 높은 계약은 차질을 겪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작다.
따라서 현금 활용도가 높아지면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과 합리성 또한 높아진다.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의 스티븐 카플란 교수는 신용 경기 때 차입금으로 인수를 감행했던 사모펀드들의 수익률이 저조하다고 말했다. 저리로 쉽게 자본 차입이 가능할 경우, “별로 좋지도 않은 계약에 뛰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절약과 곳간 채우기, 조심스러운 저축과 구두쇠 짓을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다. 2008년 신용시장 붕괴를 지켜본 기업 재무책임자들은 마약 퇴치 다큐멘터리(‘Scared Straight’)를 관람한 청소년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충격과 두려움에 규칙을 충실히 지키게 됐다는 말이다. “유동성과 비상시를 대비한 현금 확보가 중요해졌다”고 서버루스 캐피털 전임 이사이자 듀크 경영대학원 재무관리센터 이사인 세스 가드너가 말했다.
그러나 기업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는 표시도 하나둘 나타난다. 장비와 소프트웨어 투자는 2009년 4분기 18.4%(연율로 환산)로 다시 증가했다. S&P 애널리스트 하워드 실버블랫은 경기회복이 궤도에 올랐다는 확신만 생기면 기업들이 기록적으로 높았던 보유 현금을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 자본 지출에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2009년 현금 보유액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한 스낵업체 펩시코의 경우, 3월 15일 배당을 7% 인상하고 2013년 봄까지 자사주 매입에 150억 달러를 지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종의 경기부양 효과를 가져올 이 같은 움직임들이 지친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듯하다.
With JESSICA RAMIREZ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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