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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를 조롱하다

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를 조롱하다

최근 뉴욕 브로드웨이에선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그대로 베낀 듯한 플롯의 연극이 막을 올렸다. 첫 장면은 전형적인 미국 금융업계 간부들의 호화판 파티.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사업에 매우 유리한 새 회계 방식을 허락 받은 일을 자축하는 자리다.

이 연극엔 부외자산과 이해상충, 충분한 근거도 없이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월스트리트의 금융 분석가들,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CEO,위기 이전엔 이름을 날리던 어리석은 금융 전문가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서로 속고 속이며,타산적이고 오만한 간부들은 주주들을 속인다.

연극의 주인공(천부적인 재능과 대단한 열정을 지닌 토니상 수상자 노버트 레오 버츠가 연기한 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를 조롱하다 연극 ‘엔론’ 10년 전 상황 소재로 했지만 재계의 탐욕과 부패, 책임회피 등 최근 상황과 판박이다)은 리먼 브러더스의 CEO 리처드 플러드나 베어 스턴스의 CEO 지미 케인이 아니다.

2001년 파산한 세계적 에너지 업체 엔론의 전 CEO로 현재 회계부정 혐의로 복역 중인 제프리 스킬링이다. 연극 ‘엔론(Enron)’은 2008년 가을 이전만 해도 미국 금융 사상 최대의 파산 사건으로 꼽히던 엔론 사태를 소재로 했다.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후보 시절 이야기와 규제가 완화된 전력 시장, 주파수 대역폭 거래 등 극의 내용은 10년 전의 상황을 다룬다.

하지만 탐욕스럽고 오만한 금융업자들과 부외부채의 유혹, 재계 기성 세력의 부패, 책임회피 등 이 극에서 드러내는 인간의 약점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연극이 엔론 파산 이후 9년 남짓 지난 지금에서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는 사실은 좀더 광범위한 문제를 일깨운다.

범죄수사극 ‘로 앤 오더(Law &Order)’처럼 최근 뉴스 보도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한 TV 드라마가 판치는 요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왜 아직 안 나올까? 물론 현재 준비 중인 작품들은 있다. HBO 방송은 금융위기를 소재로 한 앤드루 로스 소킨의 저서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드라마 제작권을 사들였다.

또 마이클 루이스의 베스트셀러 ‘부동산 몰락을 내다본 투기꾼들(The Big Short)’은 파라마운트에서 브래드 피트를 주연으로 영화화할 예정이다. 시대의 조류를 무시하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투자하지 않아 손해를 안 본 투자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나오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루이스의 말대로 ““월스트리트 이야기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최근의 위기를 볼만한 오락 작품으로 만들기는 특히 어렵다. 각종 블로그와 신문의 심층기사, 금융 전문 매체 CNBC의 자세한 보도, 수십 종의 논픽션 책 덕분에 주요 관련 인물들이 세상에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게 한 가지 이유다.

또 시기적으로도 아직은 너무 이르다. 월스트리트에 관한 오락물 중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끌어온 작품들은 거품이 꺼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뤘다. 톰 울프의 베스트셀러 소설 ‘허영의 불꽃(The Bonfire of the Vanities)’은 1984~85

년 음악 전문 잡지 롤링 스톤에 연재로 실리기 시작했고, 1987년 출판됐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1987년 10월 증시 대폭락(블랙 먼데이) 이후 두 달만인 그 해 12월에 나왔다. 아무리 하루 24시간 미디어에 둘러싸여 사는 시대라지만 미국 관객들에겐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곧잘 잊혀지곤 하지만 1933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도 1946년에야 나왔다.

예전의 공식대로라면 비극에 시간이 보태지면 희극이 된다. 하지만 최근 골드먼삭스가 사기 혐의로 기소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번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미국 금융계 이야기를 다룬 가장 야심 찬 작품들이 영국에서 나온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하다.

미국과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다는 점이 일종의 완충장치 역할을 한다. 연극 ‘엔론’도 런던에서 먼저 무대에 올려졌다. 영국 TV 드라마 시리즈 ‘런던 콜걸 벨(Secret Diary of a Call Girl)’을 쓴 극작가 루시 프레블(29)의 작품이다. 또 지난해 가을 BBC는 1시간짜리 드라마 ‘리먼 브러더스의 최후(The Last Days of Lehman Brothers)’를 방영했다.

제임스 크롬웰이 헨리 폴슨 전 미 재무장관 역을 맡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서 영국인 특유의 기질이 드러나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배우들은 리먼을 ‘리먼스’라고 부르고, 조지아주 출신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총재 켄 루이스 역을 맡은 배우의 말투는 조지아주가 아니라 영국 콘월 지방의 사투리로 들렸다.

대다수 장면이 실제에 가까웠지만 상상력이 동원된 장면도 많았다. 플러드와 그의 부하 직원이 성서 요한계시록 18장 3절을 인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실제 월스트리의 거물들은 욕설을 퍼붓는 등 불경스러운 경우가 아니라면 주의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는다. 불행히도 최근 금융위기는 이런 드라마에서 관객의 주목을 끌 새로운 악역을 탄생시켰다. 우선 버나드 메이도프의 엄청난 폰지 사기는 적어도 TV 시리즈 하나 정도의 소재는 될 듯했다.

하지만 메이도프의 자백과 여러 책에서 드러난 그의 실체는 뉘우칠 줄 모르는 한심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한 영혼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FX 방송의 드라마 ‘데미지(Damages)’시즌3는 메이도프를 연상케 하는 루이스 토빈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는 첫 회에 죄를 자백하고 형을 선고받은 뒤 3회에 가선 자살한다. 한편 시즌1에서 등장했던 엔론 스타일의 악역 아서 프로비셔(테드 댄슨)는 시즌3에서 토빈 못지 않게 주목받는다. 시청자의 관심 유지를 위해 과거의 악역을 되살린 듯한 느낌이다. 할리우드는 과거의 악역 다수를 금융위기 이 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재활용한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2010년판 ‘월스트리트’[‘월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에서 악명 높은 금융업자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러스)는 11년 만에 감옥에서 출소한다. 그의 텅 빈 지갑과 1980년대에 나온 구식 휴대전화가 감옥에서 보낸 긴 세월을 말해준다.

예전의 지위를 잃고 머리도 반백이 된 게코는 손상된 가족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쓴다. 그는 한때 그가 찬양했던 탐욕이 이젠 미국 사회에 만연해 일종의 관행처럼 돼버린 사실에 충격받는다. 지금은 게코 정도면 ‘좋은 사람’에 속할 만큼 세상이 달라졌다.‘월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는 금융위기 이후 긴축재정 문화에서 보기 드문 고예산 영화다.

[할리우드도 금융위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아이로니컬하다. 할리우드는 금융위기 이전 이른바 ‘슬레이트 딜’(slate deal: 영화 촬영 때 장면 표시용으로 사용하는 ‘슬레이트 보드’에서 따온 명칭이다)을 통해 헤지펀드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헤지펀드들은 영화를 주택 담보대출처럼 일종의 금융상품으로 보고 투자했다.]

하지만 저예산 작품으로 눈길을 끈 경우도 있다. 미 공영 라디오(NPR)의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This American Life)’는 4 월 들어 뮤지컬‘애비뉴 Q(Avenue Q)’의 작사·작곡자 로버트 로페즈가 제작한 2분짜리 노래 ‘Bet Against the American Dream’을 내보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투자하지 않은 한 헤지펀드에 관한 노래다. 또 아이슬란드 레이캬빅의 시티 극장에서는 최근 배우들이 2250쪽에 달하는 아이슬란드 금융위기 보고서를 읽는 공연을 시작했다. 현재의 상황을 영어로 설명해도 이해하기 힘든 미국인들은 아이슬란 드어로 한번 들어보는 게 어떨까?

이런 긴축재정 시대에 굳이 새로운 악역과 줄거리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과거 등장인물과 줄거리의 재활용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애덤 해슬렛의 구제금융에 관한 소설 ‘유니언 어틀랜틱(Union Atlantic)’은 엔론 사태를 배경으로 쓰여졌지만 현재의 상황에도 잘 들어맞는다.

연극 ‘엔론’은 각종 회의와 컴퓨터를 통한 업무 처리를 기본으로 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많은 부가장치가 필요했다. 춤과 노래(생필품 가격에 관한 노래도 있다)는 기본이고 광선검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 등 관객의 이목을 끌만 한 장치가 많이 동원됐다.

엔론의 이사진은 ‘세 마리 눈먼 쥐’(영국 자장가)의 의상을 입었고, 공룡의 머리 탈을 쓴 배우들은 최고 재무책임자(CFO) 앤드루 패스토가 주는 ‘부채(빚)’를 먹이로 받아먹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킬링은 한 장례식장에서 분노한 직원들과 맞닥뜨린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인 그는 비참하게 모욕을 당한다. 하지만 그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진 않는다. 우리에겐 탐욕스러운 재계 거물을 동정할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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