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친구에게 자리를 주는 것?
개혁은 친구에게 자리를 주는 것?
나치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그걸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던 독일의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 그는 정치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아직도 마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정치적(political)’이란 단어의 정의를 가장 분명하고 쉽게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실 정치의 세계엔 끝없이 네 편, 내 편 가르기가 진행되는가 보다. 편을 가르는 일은 인사로 귀결된다. 미국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들었다. 개혁은 내 친구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정권이 바뀐 뒤 변혁이니 개편이니 거창하게 떠들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내 친구나 동지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비아냥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인정해 버리고 나면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그저 허황하게 들릴 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자주 듣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인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 정권이 초반부터 궁지에 몰린 것도 인사 문제였다. ‘고소영’ ‘강부자’ 인사라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높았던 인기는 급전직하했다. 그런데도 그 이후 행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악화됐다.
정권에 어떤 줄이라도 대지 않고선 어떤 자리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점점 더 진리가 돼 가고 있다. 고향(영남), 대학(고려대), 회사(현대그룹·서울시), 정치 경력(대선 캠프·인수위) 중 적어도 하나는 걸려야 뭐라도 건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권 초보다 심해졌다.
6월 중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2008년 장·차관급 인사 97명 중 TK(대구·경북)와 PK(부산·경남) 출신 비중은 19%(18명)로 똑같았다. 그러나 2년여가 지난 올 6월 현재 TK가 24명(전체 99명 중)으로 늘어난 반면 PK 출신은 12명으로 줄었다. 현재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61명 중 TK는 2008년에 비해 6명 늘어난 16명, 고려대 출신은 5명이 늘어난 12명이라고 한다. 주요 공기업 22개를 포함한 285개 공공기관 기관장들의 출신지는 영남권이 117명(41%)이나 됐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정권을 잡은 경험이 없어 인력풀이 얕아서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을 보자. 그는 18대 총선에서 낙천 후 정무수석으로 임명됐으나 작년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엔 신설된 대통령 정무특보에 재임명됐다. 그러다 올 2월 이달곤 장관이 물러나자 바통을 이어받았다. 정권 초 청와대 참모로 활동하다 이런저런 사유로 물러난 이들도 대부분 다른 자리로 컴백했다. 류우익 초대 비서실장은 주중 대사, 곽승준 국정기획수석은 미래기획위원장, 김중수 경제수석은 한국은행 총재,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은 교육부 차관,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은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각각 변신했다.
인사 편중 현상은 왜 갈수록 심해질까. 처음엔 개혁 성향을 보인다며 이질적인 사람도 받는다. 그런데 점점 불편함을 느낀다. 동지인지 아닌지 애매한 사람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없고, 맛있는 떡을 우리끼리 먹을 수도 없다. 불편을 감수하고 사느니 아예 우리 친구로 다 채우자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6·2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이 대통령이 어떤 인사 카드를 내밀지 궁금하다. 슈미트가 정의한 것과는 다른 정치도 있다는 걸 과연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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