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구두쇠가 400억 쏟아부은 천문대
천하의 구두쇠가 400억 쏟아부은 천문대
경기도 장흥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산림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3년 전인 2007년 7월 이곳에 또 하나의 명소가 생겼다. 한국 최대 규모의 민간 천문대인 송암스페이스센터가 그곳이다.
천문대는 해발 463m의 개명산 형제봉에 서 있다. 이곳은 산자락 위의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대와 스페이스센터로 나뉜다. 두 곳을 케이블카가 오간다. 송암스페이스센터를 설립한 한일철강 엄춘보(91) 회장은 일요일마다 이곳을 찾는다. 운영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는 게 일상이지만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때는 잠시 나이도 잊는다.
평생 모은 재산을 천문대에 쏟아부은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 한국전쟁 당시 피란 내려온 실향민 출신이다. 1957년 한일철강을 설립해 53년간 기업을 이끌어 왔다. 그가 일군 기업인 한일철강과 하이스틸의 2009년 매출은 각 2100억원과 850억원이다. 중견 기업 오너지만 그에게선 전혀 ‘돈 많은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지독한 일벌레에 구두쇠라고 입을 모은다. 만원 한 장 쓰는 것도 아까워하며 평생을 지냈다. 식사를 마친 손자가 밥그릇에 밥알이 한 톨이라도 남기면 손자 앞에서 아들 부부에게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셋째 아들인 엄정근 하이스틸 사장의 말이다. “한번은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음 날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한사람당 계란을 두 개씩 주더군요. 아이들이 다못 먹고 계란을 남겼습니다. 정말 혼났습니다.
어린 놈들이 어떻게 음식을 남길 생각을 하는가!’라며 펄펄 뛰셨지요.”
천문대가 들어선 개명산 일대는 엄 회장이 1972년부터 조금씩 구입한 땅이다. 산세가 고향과 비슷해 마음에 들었다 한다. 4남1녀를 두고 있는 그는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주말이면 찾아오곤 했다. 잠시도 앉아 있기를 싫어하는 엄 회장은 이곳에서도 가족 모두에게 일을 시키곤 했다.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 허리가 휘게 밭일을 한 다음에야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밭일을 하다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면 곧장 호통을 치곤 하셨지요. 식사 전에는 모두에게 ‘오늘 밥을 먹을 만한 일을 했나’ 묻곤 하셨지요.”
엄 사장은 외제차는 꿈도 꾸지 못한다고 말한다. 엄 회장이 타던 차를 아들에게 주고, 아들이 타던 차를 손자가 물려받는다.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손자가 몰고 있는 차는 주행거리가 17만km를 넘긴 초기 오피러스 모델이다. 한번은 자식들이 효도 선물로 벤츠를 준비했던 일이 있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한국 사람은 한국 차 타고 살아야 한다”고 호통을 쳐 없던 일로 했다.
가족과 지인 사이에는 천하의 자린고비로 여겨졌던 엄 회장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2004년 봄이다.그의 큰며느리 최현옥 송암스페이스센터 실장은 “핵폭탄이 열개 터진 것 같았다”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다.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아버님이 ‘나 천문대 짓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요.”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가족들은 ‘가족 중 천문학 관련자가 없다’‘공공기관에서 나설 일이다’ ‘대기업 정도 돼야 제대로 운영 할 수있다’며 만류하고 나섰다.
이날은 엄 회장도 묵묵히 식사를 하며 듣기만 했다. 몇 주 후 엄 회장은 다시 천문대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이유로 가족이 말리고 나서자 그는 밥상을 뒤집어엎고 호통을 쳤다.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나라에 필요한 일 한다는데! 웬 반대가 이리 심하나. 이미 설계 다 마쳤다. 난 하겠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엄 회장 부인이 남편의 뜻을 지원하고 나서자 결국 자식들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최 실장은 “어머니께서 ‘저분은 이미 뜻을 정하셨다. 이의 달지 말고 잘 도와 드리자. 같이 좋은 일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천문대가 시작됐습니다.”
처음 천문대 설립 예상 비용은 100억원이었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며 비용은 서서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스페이스센터와 산 정상에 있는 천문대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설치가 결정되며 50억원이 불어났다. 여기에 미국 NASA에서 개발한 챌린저러닝센터 프로그램과 반구형 천장을 통해 별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즐길 수 있는 플래니테리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용은 두 배로 늘어났다.
최 실장은 “비용이 너무 커지자 ‘지금까지 들어간 돈 자식들이다 부담할 테니 그만 하자’는 이야기를 드렸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불호령을 내리신 다음 계속하라고 하시더군요.”
송암스페이스센터 건축에 들어간 자금은 결국 400억원에 달했다. 엄 회장이 기업을 하며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쏟아부은 것이다. 건축 과정에서 비용이 부족하자 아들들에게 나눠준 재산일부를 돌려받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마무리됐다. 송암스페이스센터 개관식이 열리던 날 엄 회장은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부족하고, 땅도 작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우주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넓게 쓸 수 있지요. 아이들이 우주를 보고꿈을 키우면 우리나라도 뭔가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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