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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게 만든다

베푸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하게 만든다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재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는 뉴스는 8월을 더욱 뜨겁게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이 운영하는 단체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는 이 두사람과 다른 38명의 부호가 이를 약속했다고 8월 4일 발표했다.

여기에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오라클 공동 창업자 래리엘리슨, 에너지 기업인 T. 분 피켄스, CNN 창업자 테드 터너, 영화 <스타워즈> 의 감독이자 영화제작자 조지 루커스, 투자자 로널드 페렐먼,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실력자 배리 딜러가 포함됐다.

40명의 알려진 재산을 모두 합치면 3000억 달러(약 360조원)정도니까 그 절반이라면 1500억 달러에 이른다. 재산이 530억 달러인 게이츠는 자신과 부인 멜린다 명의로 설립한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미 280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재산이 470억 달러인 버핏은 2006년 이 가운데 99%를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기로 이미 약속했다. 미국 부호들에게 재산 기부를 권유해 결실을 거둔 이들은 앞으로 전 세계 부자들에게 기부를 권할 계획이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기부문화가 앞으로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사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기부 문화가 발달해 있다. 미국의 문화·교육·복지의 상당수는 개인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간접 기부도 있다. 1982년 할리우드 배우 폴뉴먼은 뉴먼스 오운이라는 식품회사를 창업하고 여기서 얻은 세후 이익의 전부를 여러 자선활동에 기부했다. 그가 200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억5000만 달러를 수많은 곳에 기부했다. 미국인에게 그의 얼굴이 그려진 시리얼 등 식품을 사는 것은 곧 간접적으로 기부하는 행위다. 미국 기부문화의 계보를 살펴보자.



명문대 이름에 남아 있는 기부의 전통미국 동부의 명문 사립대학들을 가리키는 아이비리그. 알파벳순으로 브라운·컬럼비아·코넬·다트머스·하버드·펜실베이니아·프린스턴·예일의 여덟 대학이 여기에 속한다.이 가운데 다섯 학교의 이름은 대학 설립에 큰 도움을 준 기부자나 그의 고향 이름에서 땄다. 브라운대학은 1764년 침례교 계통 남자대학인 ‘로드아일랜드대학’으로 개교했지만 1804년 거액을 기증한 니컬러스 브라운의 이름을 따 학교 이름을 고쳤다.

코넬대학은 연방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불하 받은 토지에 1868년 개교한 기업가 에즈라 코넬의 이름을 땄다.다트머스대학은 1750년 목사 엘리어자 휠록이 아메리카인디언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자선 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1769년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허가장을 받고 대학이 됐다. 휠록은 대학 설립을 후원한 윌리엄 레기 백작의 고향인 영국 다트머스를 학교 이름에 붙여 감사를 표시했다.



하버드대학은 1636년 매사추세츠 식민지 일반의회의 결의로 개교했는데 1639년 유산과 책을 기증한 J. 하버드 목사의 이름을 땄다. 예일대학은 1701년 10월 9일 목사들이 힘을 모아 세웠으며 1718년 학교에 많은 기부를 한 E. 예일을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고쳤다. 나머지 학교는 지명 등에서 땄다.

아이비리그에는 속하지 않지만 미 동부 명문의 하나인 존스홉킨스대학은 1876년 퀘이커 교도인 은행가 J. 홉킨스의 기부금으로 설립됐다. 1889년에는 존스홉킨스병원이 별개 기관으로 설립됐으며 1893년 여성들이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남녀공학의 존스홉킨스의과대학이 개교했다. 이는 현재 세계적 대학이자 대학병원, 그리고 의과대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다른 명문대인 카네기멜런대학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내놓은 100만 달러를 바탕으로 1900년 피츠버그시에서 노동자 자녀를 위한 직업훈련학교로 출발했다. 1967년 멜런연구소와 병합해 지금의 이름이 됐다. 미국 자선재단은 기부 문화의 꽃 미국의 3대 자선재단으로 카네기재단, 록펠러재단, 그리고 포 드재단이 꼽힌다.

각각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록펠러,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사업으로 번 돈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을 벌이기 위해 만든 재단이다. 20세기 전반부에 들어선 이 재단들은 지금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교육·학문·복지를 지원한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의 가치와 부정부패 퇴치 등 더욱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재단들은 미국 기업인의 기부문화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동시에 기부란 게 결코 ‘불우이웃 돕기’로 끝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기부란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퍼주기가 아니며, 엄연한 하나의 ‘(비영리)사업’이란 점을 보여준다.

철강이나 석유 독점부터 혁신적인 생산 시스템 도입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이 원하는 사업을 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자신이 꿈꿨던 인류 복지사회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악착같이 벌어 통 크게 기부한 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운용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 세 재단을 만든 부자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미국 기부문화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앤드루 카네기(1835~1919)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했다. 그는 일생의 전반부는 기업을 일구는 데, 후반부는 기업 운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교육과 문화 위주의 나눔 사업에 정열을 바쳤다. 어린 시절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방적공·전신기사 등으로 일했다.

1853년부터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에 다니면서 철도와 운송, 석유 관련 기업에 투자해 번 돈을 모았다. 1865년 철강업에 뛰어들어 석탄과 철광석부터 운반용 철도와 선박까지 아우르는 거대 철강 트러스트를 구성했다.

1892년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하고 당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 트러스트를 만들어 명실상부한 ‘철강왕’이됐다. 이 회사는 미국 철강의 4분의 1 이상을 제조했다. 1901년이 회사를 4억4000만 파운드에 모건 계열 제강회사와 합병토록 했다. 이로써 설립된 US스틸은 미국 철강시장의 65%를 차지하는 거대 기업이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기업 경영에서 손을 떼고 인생 후반부를 살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시에 있는 카네기홀을 포함해 재산의 대부분인 3억5000만 달러를 내놨는데 현재 가치로 70억 달러에 해당한다. 그는 이 돈으로 카네기공과대학(현 카네기멜런대학)과 카네기재단,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또 전 세계에 2500개 이상의 도서관을 세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부자라면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돕기 위한 일에 돈을 써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존 록펠러(1839~1937)

뉴욕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857년부터 클리블랜드정유공장 서기로 일했다. 1870년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세워 경쟁사를 인수합병하면서 사업을 키워 ‘석유왕’이 됐다.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 오일트러스트를 만들었으나 1899년 반트러스트법인 셔먼독점 금지법 위반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지주회사를 법으로 인정하던 뉴저지주에서 뉴저지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세워 석유업계를 계속 지배했다. 하지만 1911년 연방대법원으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회사가 해산 명령을 받자 재계에서 물러났다. 이미 1890~92년 시카고 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내놨던 그는 은퇴 뒤 사회사업을 계속해 모두 3억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1913년에는 인류 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록펠러재단을 세웠다. 이 재단은 기아 근절, 인구문제 해결, 대학 발전, 미국의 기회균등과 문화 발전,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원조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재단은 지금까지 20억달러에 이르는 돈을 전 세계에 제공했다. 아울러 1만3000명 이상의 재단 특별연구원을 선발해 연구 지원금을 지급했다. 록펠러는 교육재단과 의학연구소도 세워 지원했다. 그의 아들인 록펠러 2세는 기부를 더욱 확대했으며, 며느리인 애비는 뉴욕 현대미술관을 설립하고 미술계를 후원했다.

기부를 많이 해 복을 받은 것인지 록펠러가는 그의 손자 대에서 크게 흥했다. 첫째인 록펠러 3세는 가업을 맡았으며 차남 넬슨은 뉴욕주 주지사와 부통령을 지냈고, 3남 로런스는 뉴욕 증권가에서 활약했다. 4남 윈스럽은 아칸소주 주지사를 지냈고, 5남 데이비드는 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을 맡았다.



헨리 포드(1863~1947)미시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부터 기계공으로 일했다. 1899년부터 에디슨사에서 일하다 1903년 자동차업체 포드를 창업했다. 1913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근대적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해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그래서 ‘자동차왕’으로 불린다. 그가 고안한 혁신적 대량생산 시스템은 포드 시스템으로 불리며 현대 공업생산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억만장자가 됐다.

1936년 아들과 함께 5억 달러의 기금으로 미시간주를 대상으로 하는 자선단체인 포드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1950년 이후 전세계를 활동 대상으로 하는 국제적 재단으로 확대됐다. 민주주의 가치의 보존, 가난과 부정 퇴치, 인류 복지 증진을 위한 국제 협력과 교류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한 연구활동에 장학금·보조금·융자금을 지원한다. 현재 자산이 1000억 달러를 넘는다.

그는 또 1929년 과학에 대한 학생과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려고 미시간주에 ‘헨리 포드 박물관’을 세워 과학·기술·생활·역사와 관련한 엄청난 분량의 물품을 수집해 전시했다. 에디슨의 실험실을 통째로 옮겨왔는가 하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 막사에서 사용했던 베개, 링컨이 암살당한 의자 등 역사적 용품이 전시돼 있다.

결코 재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방대한 컬렉션이 이박물관의 자랑이다. 이 박물관은 아이디어와 의지, 그리고 재력이 결합돼 이뤄진 것으로 기부의 새로운 형태로 평가 받는다. 미국인은 왜 기부에 이렇게 적극적일까. 사회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식민지 이민사회에서 비롯된 미국은 이미 독립 전부터 ‘(기부를 포함하는) 자발적 제휴 사회’로 운영됐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와 사회적 자유를 위해 신대륙행을 결심한 이민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미국인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정부나 관료조직, 또는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신 이를 스스로 풀려고 노력한다. 시민 간의 자발적 제휴를 통해서 말이다. 미국인의 선조가 이미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대륙으로 항해하던 도중에 ‘상부상조로 시민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맹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자발적 제휴가 기부를 통한 사회적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기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 이러한 성향은 미국 사회에 고루 스며든 두드러진 특성이자 문화이며 민주주의의 열쇠이기도 하다.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는 1636년 젊은이들을 목사로 길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매사추세츠주에서 결성된 박애주의 자원 모임에서 비롯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목숨, 그리고 운명을 자발적으로 기부한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 미국 사회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노예제 폐지, 여성 참정권, 환경 보전, 민권운동, 페미니즘, 갖가지 평화운동 자체가 이러한 박애주의자들의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기부는 순수예술과 공연예술, 종교활동, 인도주의적 활동, 그리고 교육기관의 운영에 결정적 원천이다. 기부는 미국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이나 다름없다.

미국인의 기부에서 독특한 것은 뭔가를 내놓는 것이 아닌, 그 내놓은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기부는 뜻있는 개인이 정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뭔가 공익적인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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