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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은 나를 단련시킬 뿐

역경은 나를 단련시킬 뿐



현정은(55) 현대그룹 회장은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올랐다. 올해도 선정된다면 3년 연속 뽑히는 것이다. 지난해 조사에서 현 회장은 100인 가운데 80위에 올랐다. 8월의 일이다. 이 조사가 몇 달 후에 발표됐다면 현 회장의 순위는 훨씬 더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8월 당시 북쪽에 억류돼 있던 현대아산 직원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2008년 있었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이후 극도로 경색된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기 위해 현 회장이 직접 평양에 다녀온 결과다. 개성~평양 간 육로로 방북한 그는 백화원 영빈관을 숙소로 제공받는 등 환대를 받았다. 현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묘향산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4시간 동안 긴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정주영, 정몽헌 회장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길을 연 개척자”라며 두 선대 회장을 추억했다. 그런 다음 금강산관광 재개 등 현안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에 긍정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태에 대해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황 속에 빛나는 파워 우먼


현 회장은 김 위원장과 면담을 통해 꽤 많은 성과를 가지고 왔다. 중단된 금강산관광을 이른 시일 안에 재개하고,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 관광도 시작하기로 했다. 북측은 관광에 필요한 모든편의와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 2008년 12월 1일 이후 제한된 군사분계선의 육로통행과 남측 인원의 북측 지역 체류를 원상대로 회복하기로 했다. 군사분계선 육로통행이 정상화되면 개성관광도 곧 재개하고 개성공업지구 사업도 활성화해 나가기로 했다.

2007년 11월 합의한 백두산 관광 사업도 현대그룹의 준비가 끝나면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모든 합의는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올 4월까지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 회장은 “현대가 열어놓은 남과 북의 민족화해사업인 금강산·개성관광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국 간 대화가 진전되면 막힌 길이 뚫릴 것이라고 확신하며 대북사업 재개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다짐과 각오를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까지도 엄청난 후유증을 보이고 있는 천안함 사태가 그것이다. 이로 인해 남북 관계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경색될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으로선 답답할 뿐이다속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2003년 정몽헌 회장 타계 후 그룹을 맡아 6년 연속 흑자를 냈다. 그의 취임 후 그룹 매출은 2003년 5조4400억원에서 2009년 10조5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커졌다.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은 올해 1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한 후 2분기에는 매출 2조412억원, 당기순이익 1978억원을 올렸다. 3분기에는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국내 시장 점유율 43%로 2007년 이래 1위를 지키고 있다. 세계 최고 속도인 분속 1080m에 이르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도 개발했다. 현 회장은 매출 증대, 인프라 구축, 비용절감 등에 집중해 2012년 그룹을 재계 13위로 키운다는 목표다.

포브스뿐 아니라 적잖은 언론이 현 회장을 주목해 왔다. 지난해 CNN은 한국의 경제·문화를 집중 조명한 ‘Eye on South Korea’

를 방영하면서 한국 재계 인물로 유일하게 현 회장을 인터뷰했다.

현 회장은 2007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이 뽑은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6월엔 노르웨이의 권위 있는 해운전문지 <트레이드윈즈(tradewinds)> 가 세계 해운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18위에 올렸다. 한국인 중에선 1위다. STX그룹의 강덕수 회장이 64위, 현대중공업 민계식 회장이 71위를 차지했다. 여성 인물 중에선 제일 앞순위를 기록했다. 세계 5위의 해운기업인 대만 에버그린의 창융파 회장보다도 한 단계 높았다.

▎지난 6월 현대상선 부산신항터미널 개장식. 왼쪽부터 이태일 경남도의회 의장, 김태호 총리내정자(당시 경남지사), 현정은 회장, 정운찬 전 총리, 최장현 국토해양부 차관.

▎지난 6월 현대상선 부산신항터미널 개장식. 왼쪽부터 이태일 경남도의회 의장, 김태호 총리내정자(당시 경남지사), 현정은 회장, 정운찬 전 총리, 최장현 국토해양부 차관.





현대건설 인수에 전력투구


현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와 북방사업 등 신성장 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현대건설은 그룹의 미래를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확실한 동력인 만큼 매각이 시작되면 지체하지 않고 인수에 나선다는 각오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최적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되고, 계열사 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된다.

우선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이 정상화할 경우 중·장기적으로 남북경협사업에서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현대그룹은 북측의 전력, 통신, 철도, 비행장 등 대형 SOC 사업에서 독점적 사업권을 확보하고 있어 이들 사업에 우선적 지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현대건설 같은 대형 건설회사가 꼭 필요하다. 현대증권도 현대건설 인수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현대건설은 현대증권을 통해 원활한 자금조달은 물론 선진 금융기법을 이용한 다양한 자금운용 방안을 활용할 수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를 통해 기존 현대상선 중심의 매출 구조에서 탈피해 안정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현 회장이 사활을 걸고 현대건설 인수를 준비하는 이유다. 현대그룹은 인수전 참여가 예상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중복 투자로 인한 자기침식 우려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2001년 현대건설이 그룹에서 분리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룹 각 사의 공사물량을 호혜적인 조건으로 현대건설에 발주해 회생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등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다. 자금력이 뛰어난 현대차그룹의 입찰 참여가 확실시되고 있고, 외환은행 등 채권단과의 마찰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현대건설을 품에 안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은 것이다.



현대호는 정박하지 않는다


지난 3월 현대그룹은 서울 종로구 연지동 신사옥 현대그룹빌딩에 입주했다. 신사옥을 짓고 계열사들을 모은 것은 현대그룹의 옛 면모를 갖추겠다는 현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신사옥 동관 2층에는 120석 규모의 대형 고객 접견실을 두고 외부 방문객들과 회의를 하거나 고객들의 휴식 장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는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 정몽헌 회장의 업적을 기리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내부 벽면에 두 선대 회장의 생전 모습 사진과 함께 현대그룹의 창업과 발전과정, 업적, 어록 등을 그래픽 기법으로 디자인했다.

현 회장은 사옥뿐 아니라 현대인(人)의 정체성도 재현하려 한다. 인재경영에 힘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지금 당장 불황이라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한다면, 호황기에 도리어 사람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며 “계열사별로 인재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특히 ‘영업의 현대’를 만드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영업 실적이 좋은 사람을 우대하는 합리적 성과보상 체제를 정착하고, 급격한 시황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사업구조를 구축하는 동시에 영업 전문가 육성과 영업력 향상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주문하고 있다.

현 회장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의 물류·금융·인프라 등 3대 핵심 축을 글로벌 인프라, 통합물류, 종합금융, 공간이동, 관광·유통·교육 등 5개 사업군으로 확대했다. 기존 사업 강화와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해 2020년 매출 70조원, 영업이익 5조8000억원, 자산 86조원 달성이라는 그룹 비전을 수립했다. 대북사업 중단 등 어려움이 있지만 ‘비전2020’ 선포를 계기로 재도약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 회장은 두 선대 회장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던 북방사업을 블루오션으로 삼아 올해부터 하나하나 열매를 맺도록 역량을 모을 생각이다. 금강산·개성관광 중단으로 고통스럽지만, 곧 재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자고 주문하고 있다.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대나무에 마디가 생기는 이유는 그곳에서 영양분 축적을 위해 성장을 잠시 멈추기 때문이다. 관광 중단은 더 높이 자라기 위해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기간이다. 더 좋은 상품과 더 나은 서비스를 준비한다면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승풍파랑(乘風破浪: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 나간다). 그가 요즘 자주 인용하는 고사성어다. 어떤 난관이 가로막을지라도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다. 최근엔 좌우봉원(左右逢源)이란 말도 자주 한다. 창의력을 먼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에서 찾아 그 근원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현 회장은 “주변부터 잘 살피고 관찰하다 보면 자연히 사물의 핵심에 이르게 되고, 창의력이 생겨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대북사업도, 현대건설 인수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언제라도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박차고 나갈 태세다. 틈만 나면 임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구력과 스피드를 겸비해 마라톤 코스를 100m처럼 뛰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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