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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플랜트 경쟁력 기초는 바로 설계역량

해양플랜트 경쟁력 기초는 바로 설계역량



윤기영1963년생

연세대 토목건축학과

1988년 현대엔지니어링 입사

2006년~ 현대중공업 해양사업본부 구조기본설계부 부장

 

1972년 현대중공업의 창업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우리나라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건설하겠다고 했을 때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의 모래사장 사진과 5만분의 1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도면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상환 능력과 기술력을 의심한 영국인들에게 당시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조선 역사와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강조했다. 도크(Dock) 없이 선박 건조는 불가능하다는 조선업계의 ‘상식’조차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배를 먼저 사주면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주겠다’는 놀라운 제안은 성공했고 이것이 현대중공업의 시작이 됐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현대중공업은 배를 만들지만 않는다. 특히 육·해상 플랜트, 건설장비 등 다양한 사업부문을 갖춘 종합중공업 회사로 성장했고 세계 1위에 해당하는 부문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조선을 넘어 FPSO(부유식 원유 생산, 저장 및 하역설비)와 같은 해양사업에서 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FPSO는 원유를 생산, 저장, 처리하는 해양플랜트로 일명 ‘해상의 정유공장’으로 불린다. 현대중공업은 초대형 FPSO(200만 배럴 이상 원유를 저장할 수 있는 FPSO) 분야에서 점유율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현대중공업이 만든 초대형 FPSO는 총 10기가 가동 중이고 2기가 설계건조 중이다.

 



현대중공업 올해 11억 달러 설비 수주현대중공업은 최근 노르웨이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원통형 FPSO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11억 달러 상당의 계약이다. 설비는 지름 112m, 높이 75m에 자체 중량만 5만4000t에 달한다. 또 하루 10만 배럴의 원유와 400만㎥의 천연가스를 생산, 정제할 수 있다. 규모만 최대인 것이 아니라 북극해의 추운 날씨와 강한 파도에 견딜 수 있도록 기존 선박 형태와는 달리 원통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첨단 설계와 고난도의 시공 능력이 요구된다. 현대중공업의 기술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메이저 석유사는 심해 해양구조물 중 FPSO에 주목하고 있다. 같은 사양의 다른 설비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저장공간과 작업공간으로 대형 유전개발이 가능하다. 투자비용 및 자본 회수기간을 줄일 수 있으며 수명 완료 후에도 제거나 이동이 편리한 장점이 있다. 그런데 배를 잘 만든다고 해서 FPSO를 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랫부분은 배, 윗부분은 원유 생산 저장 시설로 구성된 FPSO는 배도 잘 만들고 해양플랜트 시설도 잘 만드는 회사만이 할 수 있다. 아랫부분만 만들어 팔 수도 있지만 이는 부가가치가 낮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비해 3~4배 이상 높은 부가가치를 갖는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사업부에서 하부구조를 건조하고 해양사업부에서 상부구조를 건조하고 이를 탑재하는 작업을 한다.

 

FPSO와 같은 해양사업 분야는 높은 부가가치로 주목 받고 있지만 누구나 뛰어들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해양구조물은 선박과 달리 설치 해역에서 20~25년간 중단 없이 가동될 정도로 고도의 품질이 요구된다. 기본적으로 유가 동향이나 재정 상태에 따라 투자가 좌우되며 자본 회수가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공기도 단축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중공업 FPSO 대부분의 설계를 맡은 해양사업본부 윤기영(47) 부장은 “지난 10년을 생각해보면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FPSO의 설계업무는 도면을 그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주입찰에서부터 시운전까지 해당하는 전 과정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매번 발전된 기술을 보여줘야 하고 고객의 요구도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도전이다.

윤 부장은 또 조선분야에도 참여해 도크가 아닌 땅 위에서 건조하는 ‘육상 건조 기술’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창업자가 도크 없이 배를 만드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도크 없이 땅에서 배를 만드는 것 또한 전무한 일이었다.

 

윤기영 부장의 도전은 입사 초기부터 시작됐다. 울산에서 자란 윤기영 부장은 1988년 현대중공업 서울엔지니어링센터 요원으로 입사하면서 서울에서 근무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 입사하자마자 울산에서 근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다시 울산으로 돌아왔다. 당시엔 부유식 시설은 없었고 죄다 고정식이었다. 90년대 초반부터 부유식 시설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몰랐다. 입찰서를 보고 앞으로 어떤 제품을 만들어나가야 할지 연구했다.

외환위기 시절 간신히 수주 건을 따긴 했는데 처음엔 기술적으로 자립하지 못해 외국 설계사들과 함께 일할 수밖에 없었다. 자체 설계기술력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인 학습과 기술 개발로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기술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현대중공업만을 믿고 프로젝트를 맡기는 경우가 없어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윤 부장은 “이제 외국 설계사들이 설계하면 생산성이 떨어져 우리의 생산시스템에 맞게 30~40% 이상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선진국의 자국산업보호 및 기술유출방지 정책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재 현대중공업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설계부터 구매, 제작, 운송, 설치, 시운전까지 직접 수행한다.

그는 또 “해양강국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조선과 같이 해양산업의 주도권을 우리나라가 가지기 위해선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조선해양 빅3, 협력사 등의 경쟁력이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윤기영 부장과의 일문일답.

 



- FPSO 등에서 현대중공업이 왜 강한가?"조직의 역량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에는 해양전문 사업본부가 있고 특히 구조기본설계부는 해양사업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핵심두뇌집단이다. 자체설계력을 보유한 동시에 멀티태스킹을 해 보통 조직의 3배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설계’하면 떠올리는 일을 넘어선다. 생산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어 가장 가까이서 현장 작업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설계한다. 이는 안전성과 효율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표현으로 ‘떠먹으면 될 수 있도록 밥상까지 차려준다는 밥상이론’. 덕분에 USAN도 발주처의 기대보다 3~4개월 작업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해봤어?' 정신으로 덤벼라 

-조선과 해양사업의 차이는?
"유전 현장에서 생산이 중단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떠한 결함이나 오류도 허용하지 않는 고품질이 요구된다. 즉 고장 나면 수리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은 해양사업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공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한 품질이 보장되도록 설계·검증해 예상치 못한 문제까지 제거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경쟁력이다.”

 



- 고객사에 신뢰를 주는 게 수주의 핵심일 것으로 보인다.“뭐든지 첫 삽을 뜨는 게 어렵다. 고객 어느 누구도 자기 공사가 첫 시험대가 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능력이 돼도 마땅한 증거가 없으면 아무도 믿질 않는다. 특히 수조원이 오가는 FPSO와 같은 프로젝트는 한 건 한 건이 증명돼야 한다. 우리의 설계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세계 학회 등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이 우리의 기술력을 높이고 발주처로부터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기술적 권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지금도 구조기본설계부 직원에겐 회사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한 논문 작업 등을 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 해양사업부문에서 중국의 추격이 우려되지 않는가?“조선부문에서 중국이 선전하는 이유 중에는 중국이 물량을 자국 기업에 많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저 석유업체 등은 그렇지 않다. 철저히 제조사의 실력을 볼 수밖에 없다. 이 실력 중에는 ‘안전을 얼마나 중시하느냐’와 같은 작업태도도 포함된다. 중국이 향후 10년 내 이러한 디테일까지 따라잡긴 어려울 것이다.”

실제 우산FPSO 건조 현장에 가보니 작은 규칙 하나도 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의 규칙이라도 어기려고 하면 바로 카메라를 든 감독관이 다가오는 것이다. 덕분에 해양사업부분에도 지난 2년 여간 안전사고가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1년에 두 번 현대중공업이 세계 메이저 석유업체 중역을 모아 경주에서 안전총회를 여는데 호응이 높다.

 



- 앞으로 어떤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해양산업을 주도하게 될까?“입찰경쟁에 들어가면 고객사들의 니즈가 보인다. 또 신기술에 대한 논문도 항상 살펴본다. 기술에도 트렌드가 있고 유행이 있다. FPSO에 대한 논문은 2000년대 중반까지 대량 등장했다. 이를 종합해 최근엔 LNG-FPSO(부유식 천연가스 생산저장설비)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타입으로 앞으로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은 개발자 설계자의 도전과제가 많다는 뜻이다.”

현대중공업은 극지방용 LNG선 및 LNG-FPSO시장 선점을 위한 핵심기술 확보에 나섰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지식경제부로부터 초대형 알루미늄 극(極)후판 LNG 탱크 제조기술 주관기관으로 선정돼 세계 최초로 극지방용 LNG선 탱크 용접기술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오는 2015년까지 190억원이 투입되는 이번 사업은 전 세계 가스 매장량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북극해 등 극지방에서의 천연가스 개발에 필요한 LNG선과 LNG-FPSO 수요 증가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 해양산업에서 미래를 찾는 후배에게 할 조언이 있다면?“해양사업은 성장하는 분야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넘어야 할 산도 많다는 의미다. 나 같은 경우도 해양사업분야의 기초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을 때 왔기 때문에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본다. 영업부터 기술적인 설계까지 많은 부분을 경험할 수 있었다. 회사 행사가 있으면 치어리더도 했다. ‘너 해봤어?’ ‘해보지 않으면 말을 마라’라는 정신으로 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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