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알아주는 ‘백신 왕국’
세계가 알아주는 ‘백신 왕국’
지난 10월 5일 녹십자 본사인 목암빌딩 강당. 임직원과 계열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사 창립 4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오창·화순·음성 공장, 전국 사업장을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연결한 이 기념식에 직간접으로 참석한 임직원은 1700여 명에 달했다.
허일섭 녹십자 회장은 기념사에서 “끊임없는 혁신적인 연구개발(R&D)로 급변하는 환경과 극심한 경쟁 속에서 세계 시장의 승자가 되자”고 강조했다.녹십자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생명공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적을 쌓은 연구개발 중심 기업이다. 12년에 걸친 연구 끝에 1983년 세계 세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B형 간염 백신 헤파박스는 13%에 달하던 한국인의 B형 간염 보균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헤파박스는 지금까지 1억3000만 명분(4억 도즈)이 60여 개 국가에 보급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접종된 B형 간염 백신으로 기록됐다. 1988년엔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백신을 개발했다. 수두 백신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내놓았다.
국내 최초, 세계 열두 번째로 개발한 인플루엔자 백신 덕에 우리나라는 인플루엔자 백신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녹십자는 세계 시장으로 진출했다. 국내 최초로 계절독감 백신을 개발했는가 하면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신종플루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R&D의 견인차는 목암생명공학연구소와 녹십자종합연구소.목암연구소는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 연구기관으로 신물질 탐색 등 기초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중장기 연구과제를 수행한다. 녹십자연구소는 목암연구소의 성과를 제품화하는 중단기연구과제를 맡고 있다. 녹십자가 현재 개발 중인 백신은 모두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것으로 녹십자의 자체 기술과 국내 기술로 개발되고 있다. 성인용 Td 백신, DTaP 백신, 재조합 탄저 백신등이 그것이다. 이들 백신은 개발이 완료되면 백신 원액부터 완제품까지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해당 백신을 자급함으로써 백신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R&D 과제의 약 70%는 바이오 의약품이다. 녹십자 측은 바이오 의약품에 관한 한 국내엔 경쟁자가 없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 7월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3세대 유전자재조합 혈우병A 치료제 ‘그린진 에프’에 대해 품목 승인을 받았다. 이 제품은 2008년 개발한 그린진의 업그레이드 제품. 녹십자는 미국에 이어 국가로는 세계 두 번째, 제약업체 베이스로는 박스터, 화이자에 이어 세 번째로 3세대 유전자재조합 혈우병A 치료제를 제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혈우병A 치료제의 세계 시장 규모는 2008년 기준으로 56억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유전자재조합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73%. 녹십자는 미국·유럽 등 선진 의약품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는 한편 성장 가능성이 큰 중국·인도 등 아시아와 러시아, 브라질 등에 진입해 향후 10년 안에 세계 시장에서 10% 이상 점유율을 확보하려고 한다.
바이오 의약품과 합성 신약이 ‘투톱’바이오 의약품과 더불어 녹십자 R&D의 다른 한 축은 합성 신약이다. 지난 2월 이 회사는 자체 개발 중인 파킨슨병 치료제 신약(GCC1290K)에 대해 미국 FDA로부터 신약 임상시험 진입(IND)을 승인 받았다. 이 병은 사지와 몸이 떨리고 경직되는 중추신경 계통의 퇴행성 질환.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 중인 파킨슨병 치료제가 FDA로부터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것은 녹십자가 처음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때 성화 점화자로 나선 로마올림픽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양손을 떨면서 점화를 했다. 전성기 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는 말을 남긴 그가 앓고 있는 병이 바로 파킨슨병이다. 치매, 중풍과 더불어 3대 노인성 질환으로 꼽히는 이 병은 고령사회 가속화로 환자가 늘고 있으며 발병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 녹십자 측은 파킨슨병 치료제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현재까지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이 병 치료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시판되는 약물은 사실상 증상완화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글로벌 신약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만큼 글로벌 파트너를 찾아 이른 시일 안에 이 신약을 세계시장에 내놓겠다고 벼르고 있다. 녹십자의 오늘은 창업주인 고(故) 허영섭 초대 회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타계한 허 회장은 허일섭 현 회장의 형. 서울대 공대를 나와 독일 아헨공대 박사과정 재학 중이던 그는 1970년 귀국해 아버지 고 허채경 한일시멘트 창업주가 대주주로 있던 극동제약에 입사한다. 그 후 회사 이름을 녹십자로 바꾸고 백신 개발과 필수의약품 국산화에 진력했다. 녹십자의 녹색은 번영·풍요·평화를, 십자는 희생·봉사·사랑을 상징한다. 경기도 개풍 태생으로 개성상인 마지막 세대인 그는 또 송상의 전통을 따라 내실을 중시하고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했다. 그 덕에 제약회사 녹십자는 세계적인 생명공학 전문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백신 주권을 행사하게 된 것도 그의 선견지명덕이다. 2004년 백신 사업자로 선정됐을 당시 외국 기업과 합자 형태로 사업을 추진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제의를 뿌리쳤다. 외국 자본과 손잡으면 일이 쉽고 이득도 많이 남길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백신 주권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1983년 헤파박스 개발로 큰돈을 번 녹십자는 민간 연구재단인 목암생명공학연구소를 설립해 사회에 환원한다. 환경이 좋은 외국에 연구소를 설립하거나 다른 사업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허 회장은 “먼지가 쌓여도 이 땅에 쌓인다”며 주변의 반대를 물리쳤다.
재난 당한 나라에 의약품 지원녹십자는 사회공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2월엔 대지진 참사로 고통을 겪던 아이티에 2억2000만원 상당의 구호 의약품을 지원했다. 2004년 북한에서 일어난 용천 참사 때 등 지금까지 약 3억원 상당의 의약품을 북한에 보냈다.
녹십자의 기업문화로는 회사가 주도하는 샐러던트 붐과 신속한 의사소통 시스템을 꼽을 수 있다. 샐러던트 붐은 직원의 경쟁력이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는 녹십자의 신조가 바탕이 됐다. 대표적인 교육 제도로는 사내 MBA 제도가 눈길을 끈다. 뉴 GC MBA, 프로페셔널 MBA 코스 등 두 가지가 있다.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녹십자는 지난해 굿모닝미팅을 도입했다. 출근하자마자 열리는 이 팀별 회의에서 업무에 대한 지시와 평가, 업무분담이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배기달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녹십자는 백신에 특화된 회사로 기업의 핵심 역량 역시 백신 개발력”이라고 말했다. “신종플루 특수로 재무 안정성이 크게 개선됐고 현금도 풍부합니다. M&A를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도 추진 중이죠. 지속가능성 차원에서 변수라면 해외 시장에서의 성과입니다. 올해 독감백신도 수출을 시작했지만 해외 시장 상황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지배구조 문제가 대두할 가능성은 있다. 지난 6월 녹십자의 최대주주인 지주회사 녹십자홀딩스는 최대주주가 고 허영섭 회장 외 31명에서 허일섭 현 회장 외 31명으로 변경됐다고 공시했다. 허영섭 회장의 사망에 따른 변동이지만 최대주주인 허 회장의 상속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허 회장의 유산은 장남 허성수 전 녹십자 부사장과 부인 정인애여사 사이의 분쟁으로 상속이 미뤄지고 있다. 녹십자홀딩스는 이에 앞서 지난 3월 주총에서 고 허 회장의 3남인 허용준씨를 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차남 허은철씨는 현재 녹십자의 부사장(CTO)으로 일하고 있다. 허영섭 회장 타계 후 허일섭 회장 보유 지분이 고 허회장 측 지분을 앞질렀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래저래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잠복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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