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혁명이다’
‘연애는 혁명이다’
‘쿠바’ 하면 혁명, 낭만, 순수한 열정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나 ‘체게바라 평전’의 부산물일지 모른다. 그러나 쿠바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폐쇄성, 물자부족, 노동태업, 언론탄압도 공존한다. 그런 쿠바의 실상을 오늘의 한국과 교차해 드러내는 ‘페이크 다큐’ 한편이 지난 1월 13일 국내 개봉됐다.
정호현(39) 감독이 제작한 독립영화 ‘쿠바의 연인’이다. 2005년 정 감독이 쿠바에 갔다가 오르엘비스(29·오로)를 만나면서 벌이는 연애담이 소재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인 후손들의 오늘과 쿠바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불합리, 비효율, 관료주의, 폐쇄성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한인 후손 쿠바여성을 인터뷰하다가 이웃의 신고로 더 이상 촬영할 수 없게 될 때쯤 카메라는 한국에 온 오로를 비춘다. 까만 얼굴의 레게머리 청년이 처갓집에 인사하러 가고, 조카와 부모님 그리고 친척들의 냉랭한 반응, 강요된 기독교 등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폐쇄성까지 담담하게 그려진다.
1월 16일 정 감독과 남편인 오로, 아들 이안(3)이 함께 사는 서울 온수역 인근의 아파트을 찾았다. 거실에는 이안의 장난감이 흐트러져있고, 정 감독은 콧물이 흐르는 이안을 들어올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준다. 오로는 컴퓨터로 음악 작업에 한창이다. 정 감독은 오로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스페인어로 “수도관이 얼어서 뜨거운 물이 안 나와” 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2005년 아바나 시내에서 벌어진 ‘학생의 날’ 행사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을 촬영하다 아바나 디자인대학에 다니는 오로를 만난다. 유난히 눈이 반짝였다는 열 살 차이의 연하남과 2년간의 열애 끝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정 감독은 “사실 오로는 동거주의자예요. 저도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부모님을 봐서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무너져내릴 것 같았거든요.” 결혼도 쉽지 않았다. 쿠바와 한국 간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 일본 쿠바대사관과 주 멕시코 한국대사관을 오가며 1년여를 고생한 끝에 가까스로 혼인 확인서를 손에 쥔다.
영화는 오로가 한국에서 겪는 고난을 보여준다.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는 레게머리의 그를 보고 ‘사탄’ 같다며 “꼭 지옥에 있는 사람 같아. 그럼 구원받기 힘들어”하고 말한다. 할머니는 ‘구원’을 되뇌인다. 처갓집에서는 기독교를 강요받았다. 정 감독의 어머니는 스페인어를 하는 교회집사를 오로 앞에 데려온다. 집사는 성경구절을 읊조리더니 이내 정 감독의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오로가 빨리 구원받아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그러나 오로는 “기독교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 아닌가요? 이 길이 아니면 틀렸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봐요”라고 말한다. 오로는 이어 정 감독에게 이렇게 말한다. “훌리아, 나는 한국에 와서 이전에 몰랐던 너를 더 잘 이해하게 됐어. 하지만 그동안 너도 나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
정 감독은 쿠바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쿠바사람들은 참 유쾌해요. 버스 안에서 정신나간 사람이 노래를 불러도 모두 함께 박수치고 따라 부르는, 누구와도 함께 즐기는 정서가 있어요. 어디에서나 농담이 통하는 그 순간을 영화에서 보여주려고 애를 썼어요.” 그러나 영화 속에서 정 감독은 균형을 잃지 않는다. 루드밀라와 까뜨리나의 인터뷰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쿠바 사회를 있는 그대로 고발한다. 까뜨리나는 “노동자들이 이틀 일해서 받는 페소로 칫솔 하나를 겨우 사는 정도니 한마디로 ‘월급이 무의미한 나라’”라고 말한다. 정 감독은 “실제로 쿠바는 이중화폐 제도라서 쿠바 노동자는 페소, 외국인은 CUC(세우세)를 주로 쓰는데 이 둘의 물가 차이는 약 25배입니다. 인터넷, 전화, 심지어 국제전화카드를 사는 일 등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죠”라고 말했다. 쿠바인들의 외국여행은 여전히 금지돼 있고 미국에서 만든 구글 계정의 GMAIL이나 야후, 페이스북 등은 접근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생필품이 적어 속옷에서부터 비누, 칫솔, 화장지는 값이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다. 오죽하면 가까운 멕시코에 다녀오는 특권층 쿠바사람들마저 두루마리 화장지를 잔뜩 구입해 올 정도다.
관객의 반응은 뜨겁다. 오로가 나오는 장면에서 여성관객들은 여지없이 탄성을 질렀고 “나는 삶을 사랑해” “이런 한국이라도 너만 있다면” “소비, 소비, 끝없는 소비” 등 오로가 영화에서 한 말이 블로그, 트위터 등에서 회자되기도 한다. 입소문이 나면서 살사 강의 요청과 스페인어 강사 초빙 제의도 들어온단다. 정 감독은 “오로가 떴죠. 저는 안 뜨고. 사람들이 오로의 실상을 봐야 하는데”라며 웃었다. 오로도 따라 웃는다.
정 감독은 에세이식 ‘사적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내는 한국 다큐멘터리계의 대표적 스토리텔러다. 그녀는 특히 한국여성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고민을 다큐멘터리로 풀어내는 데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광신도가 된 어머니를 딸의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엄마를 찾아서’는 2005 코펜하겐 다큐멘터리 필름 페스티벌과 2005 타이 독립영화페스티벌에 초청받았고, 200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옥랑상을 수상했다.
오로와 정 감독은 올 3월 다시 쿠바로 떠난다. 13세부터 성에 눈뜨고 관계를 맺는 쿠바인들의 사랑과 삶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녀는 10여 년 전부터 한국과 쿠바를 오가는 의사와 함께 한·쿠바 교류재단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매년 2000명 남짓의 한국인이 쿠바에 들어가지만 쿠바에는 우리 대사관도 없어요. 한국과 쿠바 간에 자원봉사, 음악과 춤, 미술 등 함께 아우를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로는 외국어고에서 스페인어 교사로 1년간 일했다. 그는 그러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페인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학교의 구조가 싫었다”고 말한다. 요즘 그는 아이팟 북 어플리케이션 만들기에 푹 빠져있다. 글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넣는 작업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살사를 가르치고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도 한다. 그러면서 아들 이안을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도 그의 몫이다. 정 감독이 쿠바에서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서울에서 홀로 지내면서 뮤지션,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단다. 정감독은 “둘 다 일 욕심이 많아 아이 기르는 문제로 자주 다투기도 한다”고 말했다. “올 3월 쿠바로 촬영을 떠날 때는 이안을 데려가서 한동안 쿠바 시댁에서 키울 생각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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