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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신공항 약속’ 독배인가 성배인가

박근혜의 ‘신공항 약속’ 독배인가 성배인가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비판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발언은 예상보다 셌다. 그의 말을 두고 여권에선 “대선가도의 신호탄” “지역갈등의 연장전”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박 전 대표는 3월 31일 대구를 방문했다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국민과의 약속을 어겨 유감스럽다. 지금 당장 경제성이 없더라도 동남권 신공항은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약속을 어긴 대통령을 에둘러 비판했다. 정부가 신공항 백지화를 발표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특히 박 전 대표가 자신의 공약으로 동남권 신공항을 재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대목에 눈길이 쏠렸다. 그는 “대선 공약으로도 추진할 것이냐”는 질문에 “제 입장에서도 계속 추진할 일”이라고 답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표가)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한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의 발언을 “선의로 보는 게 좋다”고 덧붙였지만, 다소 서운한 감정이 느껴진다. ‘지역 이기주의에 갇힌 무책임한 태도’로 박 전 대표의 발언을 꼬집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 이명박’ vs ‘영남권 박근혜’청와대와 친박 측은 “갈등을 확대할 뜻이 없다”고 봉합했지만, 여당 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박 전 대표의 발언 이후 한나라당은 마치 ‘두나라당’으로 쪼개진 모양새다. 하나는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의원들, 다른 하나는 박 전 대표를 둘러싼 영남권 의원들이다.

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한나라당의 파벌구도를 새로 그렸다. 한나라당 최대의 텃밭이자 지지기반인 영남권이 밀양 유치를 주장하는 대구·경북· 밀양과 가덕도 유치를 희망하는 부산으로 갈렸다. 신공항 유치 문제에서만큼은 친이·친박이 아닌 ‘밀양파’와 ‘가덕도파’로 철저히 나뉘었다.

그러나 정부가 백지화를 발표하자 이 구도는 대통령과 정부의 발표에 힘을 싣는 수도권과 백지화 방침에 반발하는 영남권으로 재편될 조짐도 감지된다.

“신공항의 필요성을 인정한 박 전 대표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친이계 재선인 김정훈 의원(부산 남갑)은 계파를 떠나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부산시당위원장으로서 신공항의 가덕도 유치를 적극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통령이 끝내 이 문제를 백지화하자 다른 부산 지역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거세게 반발했다.

김 의원은 “(이 문제를 백지화한) 청와대와 정부가 답답하고 한심하다”고 퍼부었다. 중립이면서 개혁성향의 초선 모임인 ‘민본21’에 참여하는 김세연 의원(부산 금정)도 “박 전 대표의 말에 다 공감한다”며 “대통령의 공약이 지켜지지 못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신공항의 밀양 유치를 밀어온 대구 지역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대구시당위원장이자 박 전 대표의 비서실장 출신인 유승민 의원(대구 동을)은 “신공항 문제가 당장 눈앞의 일만 보고 근시안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이라며 “미래의 국익을 생각해 신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박 전 대표의 소신”이라고 풀이했다.

대구나 부산의 의원들은 신공항 문제가 내년 총선과 대선의 승패를 가를 핵심적인 사안으로 본다. 친이니, 친박이니 할 것 없이 목숨을 건 듯 유치 활동을 펴온 이유다.

반면 수도권 의원들은 박 전 대표를 성토했다. 역시 대선주자군인 정몽준 전 대표(서울 동작을)는 따로 논평까지 내 박 전 대표를 꼬집었다. 정 전 대표는 박 전 대표를 향해 “속으로는 철저히 표 계산을 하면서 국민에 대한 신뢰로 포장하는 것은 위선”이라며 “정부가 최선을 다해 분석하고 예측한 것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미래의 경제성을 말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난했다.

또 정두언 의원(서울 서대문을)은 자신의 트위터에 “국가 지도자라면 지역의 열망이 있더라도 국가 전체의 틀에서 국민 전체의 이익에 맞는 입장을 용기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심재철 정책위의장(안양 동안을)도 “여든 야든 공약으로 (신공항을) 살리겠다고 하는 건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표만 생각하는 포퓰리즘 아닌가, 표만 생각하는 정치인 때문에 우리나라엔 147조원의 개발 사업이 널려 있다”고 박 전 대표를 비판했다.



박근혜의 신공항 손익계산은?예상보다 강도 높은 박 전 대표의 발언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이런저런 손익계산이 나온다. 박 전 대표는 무엇을 얻었을까? 영남권 맹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는 평가다. ‘지역 균형발전’이란 소신도 재확인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세종시 논란 때 ‘원안 고수’ 발언으로 충청권의 민심을 가져간 데 이어 영남권까지 끌어안았다”고 해석했다.

충청권은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영남권은 한나라당의 전통적 텃밭이다. 한나라당 대선주자라면 이 지역에 등을 돌리고선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없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란 신뢰의 이미지도 굳혔다. 늘 ‘약속’과 ‘원칙’을 앞세우는 박 전 대표는 이번에도 그랬다.

한 친박 핵심 의원은 “이명박 정부는 이미 공약했던 사항을 국익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여러 번 어겼다”며 “박 전 대표는 이런 선례가 자꾸 쌓이면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우려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박 전 대표가 침묵했다면 ‘표 계산하는 비겁한 정치인’이란 해석이 나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표의 발언 이후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속화되리란 전망도 나온다. 박 전 대표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정황이 그렇다. 이미 일부 영남권 의원은 대통령을 향해 탈당하라는 요구까지 했다.

유승민 의원은 “많은 의원이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전원 합의가 안 돼 기자회견문에는 ‘응분의 정치적 책임’이라고만 표현했다”고 전했다.

부산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한 의원은 “부산 의원 회동에서도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당 지도부 총사퇴를 주장하자’는 얘기가 나왔다”며 “신공항 문제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권퇴진운동’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우리 지역에선 민감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4·27 재·보선 이후 영남권의 ‘당 지도부 사퇴론’이 수도권 소장파의 ‘당 쇄신론’과 맞물려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할지도 주목된다. 여당의 권력지도가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다시 그려지는 경우도 배제 못한다.

대구지역의 한 의원은 “대구지역 의원들은 신공항 백지화를 언급하거나 이를 방조한 당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수도권 소장파의 조기전대론과는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조기전대 주장이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부산의 또 다른 의원도 “조기전대는 당연히 해야 한다”며 “지금의 한나라당을 보고 누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당이라고 생각하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번 발언으로 박 전 대표가 잃은 건 없을까? 박 전 대표는 동남권 신공항 재추진 의사를 밝히면서 유치돼야 할 지역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당장은 대구·경남북과 부산의 민심을 모두 다독이겠지만, 논란의 불씨를 떠안고 가는 셈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대구에 가서 그런 발언을 해 마치 대구 유치를 염두에 둔 듯 해석되는데 그러면 부산 민심은 어떻게 되겠느냐”며 “장기적으로 봐서 박 전 대표에게도 이로울 게 없을뿐더러 (논란을 부추기는 건) 사회 지도층으로서 바른 처신이 아니다”고 말했다.

야당에선 ‘기회주의 정치’란 비판도 나왔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평화방송과 인터뷰에서 “항상 불리할 때는 입을 닫고 있다가 유리할 때 말하는 건 책임 있는 정치인의 태도가 아니다”고 꼬집었다.

수도권의 역풍도 우려된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에게 많은 표를 던진 수도권의 30~40대 화이트칼라층이 박 전 대표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이다.

박 전 대표의 발언으로 그가 본격적인 대선행보에 들어가지 않았느냐는 해석에 친박 측은 겉으론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되레 내부 결속력은 높아진 분위기다. 한 의원은 “남은 임기 동안 불가피하게 대통령이 추진하는 일에 힘이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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