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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 고리 1호기 안전성 다시 따져 보자

Repo 고리 1호기 안전성 다시 따져 보자

옵티스 필리핀 공장의 생산 라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의 모습.

부산시 기장군 고리(古里) 지역엔 이런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을 줄 알았다. “고리 원전 당장 폐기하라.” 5월 18일 고리1호기를 취재하기 위해 KTX를 타고 울산으로 가는 길. 머리에선 플래카드 이미지가 떠나지 않았다. 분명히 그 문구가 쓰여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과연 그랬을까. 울산은 그날따라 몹시 더웠다. 울산에서 자동차로 1시간은 달려야 고리 원전에 도착한다.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렌터카를 몰았다. 엔지니어 출신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관계자가 동승했다. 3월 터진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로 고충이 많은 듯했다.

“후쿠시마 원전과 국내 원전은 설계부터 작동방식까지 모두 달라요. 후쿠시마 원전이 설계 또는 기기 결함 때문에 터진 것도 아니고요. 한국 원전은 최악의 경우에도 후쿠시마 원전보다 안전해요.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아요. 각 지역에 있는 원자력 본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정부 고위 관계자, 국회의원, 시민단체 관계자 때문에 일이 배로 늘었어요.”

한수원 관계자의 말, 일부는 맞고 일부는 옳지 않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한국의 원전 불감증을 깼다. 2007년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수명연장) 허가도 당시엔 별 이슈가 되지 않았다. 원전의 안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한수원의 일감이 늘었다면 긍정적인 변화다. 그렇다고 근거 없는 비판과 의혹이 난무해선 곤란하다. 1977년 상업 가동되고 2007년 계속운전이 허가된 고리 1호기는 후쿠시마 원전의 최대 희생양일지 모른다. ‘계속운전이 승인된 후쿠시마 원전에서 사고가 발생했으니 고리 1호기도 안전하지 않다’는 의혹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산시 해운대구의회는 5월 17일 고리 1호기 폐쇄결의안을 채택했다. 진보신당은 고리 1호기 강행운행 등을 이유로 5월 20일부터 반핵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이코노미스트가 고리 1호기 취재에 나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리 1호기를 통해 한국 원전의 현주소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고리 1호기의 발전량은 52억㎾h로 전체의 1%에 불과하지만 상징성이 크다. 가장 오래된 데다 계속운전을 허가 받은 국내 유일의 원전이기 때문이다.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 허가 논란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계속운전을 허가 받은 원전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동되는 원전 443기 중 계속운전 허가를 받았거나 돌입한 발전소는 150기에 달한다.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이 졸속 승인됐다’는 지적도 따져 봐야 한다. KINS(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는 2007년 현장점검과 서류심사를 통해 계속운전 안전성을 확인했다.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독립적으로 안전점검을 한 결과 국제기준을 충족한다고 밝혔다.

최근엔 새 주장도 나온다. “고리 1호기가 2007년 계속운전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본지가 최초로 입수한 미 웨스팅하우스·한전의 1973년 고리 1호기 계약서에 따르면 고리 1호기는 정부의 재허가 절차 없이 2017년까지 운행할 수 있었다. 계속운전 허가 여부를 떠나 고리 1호기는 아직 안전하다는 의미다.

KTX 울산역에서 1시간을 달려 논란의 고리 원전 삼거리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상상했던 플래카드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그런데 예상했던 그 문구가 아니었다. “우리도 말할 수 있다. 외부단체는 대변인 빙자 말라.” “공익보도도 좋지만 지역민 피해를 생각하라.” 지금껏 원전에 별 관심도 없었던 언론과 시민단체가 왜 남의 지역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는 의미다.

고리 지역민의 마음이 불편한 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부는 1989년부터 2009년까지 고리 원전 주변 지역에 2900억원 규모의 지원사업을 펼쳤다.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 여부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고리 지역민은 ‘우리 문제’라고 선을 그을 수 있다.

하지만 원전의 안전성은 지역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이 터지면 지역민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다. 안전을 강조하는 건 옳다. 중요한 점은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정치권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느냐다. 그런데 이게 부족하다. 안전벽 문제부터 짚어 보자. 고리 원전단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안전벽이 보인다. 폭풍에 대비해 만든 것이다. 고리 1호기 1발전소~2발전소·고리3·4호기 850m 구간은 7.5m, 나머지는 9.5m 높이다.
옵티스 필리핀 공장에서 직원들이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고리 1호기의 터빈.



2016년 폐연료봉 돌려 막기7.5m는 그냥 나온 수치가 아니다. 이 지역에 가장 큰 피해를 줬던 사라호(1959년) 태풍의 높이 등을 반영한 높이다. 고리원자력본부 류호선(안전팀) 차장은 “안전벽이 낮지 않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7.5m 안전벽을 9.5m로 높일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는 이마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동해와 인접한 일본 시마네(島根)현 원전의 경우 안전벽을 기존 8m에서 15m로 증축한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문제는 증축비다. 류호선 차장은 “100억원가량 들 것으로 본다”며 “일반인은 2m 증축하는 데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이 드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진설계를 다시 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15m로 높이려면 수백억원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과 원전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비용을 따져선 안 된다. 하지만 비용의 효과는 확인해야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부른 동일본 대지진은 블랙스완(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안전벽은 물론 각종 방파제는 무용지물이었다. 일본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가 바닷속 63m 지점에 쌓은 길이 2㎞·높이 30m의 해저 방파제도 별 힘이 되지 못했다.

블랙스완은 막을 길이 없다. 안전벽 높이가 10m든 15m든 피해는 똑같을 가능성이 크다. 안전벽을 무작정 올리기 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왜 터졌는지 짚어 봐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안전벽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발생했다. 전력이 차단됐을 때 사용하는 비상 디젤발전기가 있었지만 침수로 사용하지 못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블랙스완의 2차 피해였다.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안전벽을 높이기 전 비상발전 시설의 침수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검토해야 한다.

고리 1호기엔 비상 디젤발전기가 두 대 배치돼 있다. 출력은 대당 2920㎾다. 고리원자력본부 류병우 안전차장은 “외부 전력이 완전히 끊겼을 때 일주일 동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 없는 대체 디젤발전기도 한 대 있다. 하루가량 버틸 수 있는 전력이 생산된다. 그런데 이런 대체발전기가 배치된 시설물이 침수되면 모든 대책은 허사다. 문병위 소장은 “각종 비상발전기의 침수 방지를 위해 관련 구조물에 방수문과 방수벽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상 디젤발전기.
더 중요한 시설은 폐연료봉 보관장소다. 폐연료봉은 다 쓴 후에도 열이 식지 않아 일정 기간 냉각시켜야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폐연료봉이 녹아 내린 것은 냉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폐연료봉 보관장소는 MCR (주통제실)에서 VTR로 실시간 볼 수 있다. 폐연료봉은 약 7m 깊이의 수조에 들어 있었다. 이 수조엔 중성자를 막는 붕산(붕소·산소·수소의 결합물)과 감마선을 잡는 물이 섞여 있다. 물 높이는 실시간 조사된다. 수조에 균열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보충수·붕산 등을 준비하고 있다. 박웅 고리1호기 발전팀장은 “폐연료봉의 안전을 위해 2중·3중의 감시책을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4월 22일부터 5월 3일까지 고리 1호기 안전점검을 했다. 외부 전문가·원자력안전기술 검사원 등 56명이 참여했다. 박웅 팀장은 “2007년 계속운전 허가 때 검토했던 사항과 최근 문제가 제기된 원자로 용기의 안전성 등에 대한 각종 문서를 점검했다”며 “아울러 현장을 실사했고, 담당자 인터뷰도 강도 높게 실시했다”고 말했다. 안전점검 결과는 합격. 이로써 고리 1호기의 안전문제는 일단락됐다. 일부에선 ‘국내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고장 643건 중 20%가 고리 1호기에서 일어났다’며 말도 안 되는 점검 결과라고 반박한다. 일부분은 맞는 주장이다. 고리 1호기의 불시정지는 1977년 이후 108번 있었다. 많은 횟수지만 연도별 기록을 보면 달라진다. 불시정지의 80% 이상은 1977~87년에 발생했다. 설비가 개선되고 선진 운영기법이 도입된 1995년 이후 불시정지는 단 네 번 있었다. 고리 1호기를 둘러싼 20% 사고율 비판은 통계의 오류에서 기인했다.

고리 1호기 논란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 집착할 시간이 없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고준위 폐기물(폐연료봉 등 방사능이 매우 강한 폐기물) 문제다. 고리 원전에서 보관하는 폐연료봉은 4620다발이다. 설계용량이 6004다발이라는 점에 비춰 보면 포화연도는 2016년이다. 5년이 지나면 폐연료봉을 보관할 장소가 없다. 국내에는 고준위 폐기시설이 없다. 당장 만들 수도 없다. 경주에 중저준위(장갑·공구 등 방사능이 중간이거나 약한 폐기물) 폐기시설을 착공할 때까지 무려 19년 걸렸다. 고준위 폐기물을 재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리는 2013년까지 독자적으로 재처리할 수 없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에서 핵 원료(플루토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한수원도 뾰족한 대안이 아직 없다.



고준위 폐기시설 서둘러야원자력 전문가들은 “고준위 폐기물을 해외에 위탁해 재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고준위 폐기시설을 원전 옆에 만들자는 견해도 있다. 익명을 원한 원자력 전문가는 재처리할 수 있는 환경부터 구축하자고 했다. “원자력의 규제와 이용개발을 담당하는 부처를 분리해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준위 폐기물을 재처리할 수 있어도 핵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국제적으로 보여주자는 취지다.

원전은 양날의 칼이다. 경제적이지만 위험성이 크다. 가령 농축 우라늄 1㎏은 사과 1개 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터지면 석탄 3000t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나온다. 원전의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짚어 보고 개선해야 하는 이유다. 취재를 마친 오후 5시쯤. 고리 원전 삼거리에 자동차를 다시 세웠다. 양보하지 않고 질주하는 다른 차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5분이 흘렀다. 한국 원전의 현주소, 지금 삼거리의 모습과 닮았다.



■ 미 웨스팅하우스-한국전력 계약서 공개



수명연장은 공식 용어 아니야
원자력발전소 수명연장. 공식 용어가 아니다. 국내 법규에는 계속운전이라고 기록돼 있다. 미국에서는 운영허가 갱신이라고 말한다. 계속운전이란 운영허가 기간(설계연한)이 만료된 원전의 안전성을 평가해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재운전을 허가하는 것이다. 계속운전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전 443기 중 계속운전 중이거나 계속운전에 돌입한 것은 150기에 달한다.

중요한 것은 계속운전의 연한이 국가별로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에선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 연한을 30년으로 봤다. 하지만 똑같은 기종의 미 키와니발전소는 40년이었다. 각 정당과 시민단체의 주장처럼 고리 1호기가 계속운전 연한 30년이 지났다고 위험한 것은 아니다. 본지가 입수한 미 웨스팅하우스·한국전력이 체결한 고리 1호기 관련 계약서에 따르면 고리 1호기의 설계연한은 40년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고리 1호기의 계속운전 허가 시기는 2017년이 된다. 고리원자력본부 문병위 소장은 “계속운전 연한이 지났다고 위험한 것도, 새 원전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며 “원전의 안전성은 관리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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