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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AISA 칭기즈칸의 나라

[TRAVEL]AISA 칭기즈칸의 나라


오늘날의 몽골은 플레이스테이션과 유목민 천막, 헤비메탈과 흐미, 아이폰과 십대 무당이 한 데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룬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매일 아침 힐튼, 샹그릴라 등 호텔 신축공사의 소음으로 깨어난다. 자갈 섞인 땅에 철제기둥이 세워지고 납작한 유목민 천막 위로 크레인의 거대한 팔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금색 술장식이 달린 감청색 카프탄(기장이 길고 띠가 달린 근동 지역의 전통의상)을 입은 노인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스모그로 희뿌연 허공을 응시한다. 그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자녀들의 부축을 받아 스포츠형 다목적 차량(SUV)들로 붐비는 길을 건넌다.

나는 몽골TV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안카(그의 대표적인 농담으로는 “몽골인들은 60세에 철이 들고 61세에 죽는다”가 있다)를 만났다. 그는 통이 좁은 진바지와 모조품 아르마니 재킷을 입었다. 그의 손에는 최신형 아이폰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그의 단골 무당을 찾아갔다.

도심을 벗어나 울란바토르의 판자촌 ‘게르’ 지역으로 향했다. 270만 몽골 인구 중 약 4분의 1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왔다. 유목민 천막과 나무 판잣집, 엉성한 벽돌집이 뒤섞여 있다. 저마다 먹고 살 궁리에 바빠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중도덕은 온데간데 없다. 폐타이어나 쇠똥, 석탄을 땔감으로 쓰고, 전선을 몰래 자기 집으로 끌어다 도둑 전기를 쓴다. 우리는 무당의 천막에 도착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순진한 눈매의 19세 청년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그랜드 세프트 오토(Grand Theft Auto)’라는 액션 게임을 하던 그는 우리가 들어가자 게임기 스크린을 J클로스 행주로 덮고 불빛을 어둡게 했다. 그리고 늑대 가죽과 곰 발톱, 독수리 깃털로 만든 가면으로 무당 복장을 차려입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짐짓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공산주의 시대에 자라났어요. 무속은 거짓이라고 배웠죠. 하지만 아들이 몇 년 전 심하게 매를 맞은 뒤 어떤 ‘목소리’를 듣게 됐어요. 난 처음에 긴가민가했지만 아들은 확신에 차 보였어요.”

무당은 향불을 피우고 북을 울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간질 환자처럼 몸을 비틀다가 죽은 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는 높고 날카로운 노인의 목소리를 내면서 새처럼 날랜 몸놀림을 보였다. 13세기 칭기즈칸 군대의 일원이었던 귀족의 영혼이 무당의 몸에 들어왔다. 그 영혼은 깊은 잠을 방해 받아 화가 났다. 우리는 그를 달래려고 보드카와 일본 담배를 내놓았다. 고개를 바닥까지 떨군 안카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어떤 여자와 결혼해야 할까요?” “왜 제 일에 만족하지 못할까요?” 보통은 부모나 심리학자에게 하는 질문 아닌가?

요즘 몽골에는 무속 열풍이 뜨겁다. 거리의 술주정꾼 중에도 자신이 칭기즈칸과 영적 교신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칭기즈칸은 13세기에 세계의 절반을 정복한 몽골의 전사 겸 통치자로 중세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인물이다. 소련이 몽골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할까 우려해 칭기즈칸의 전통을 억압했다. 요즘은 보드카 병, 화장지, 아일랜드식 술집, 투자신탁회사 등 몽골 곳곳에서 칭기즈칸의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한 얼굴을 볼 수 있다. 울란바토르시의 언덕에는 30m 높이의 칭기즈칸 초상화가 마치 선원의 어깨에 새겨진 연인의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영국 TV에서 ‘역사 속의 위대한 독재자들’에 관한 프로그램(히틀러, 스탈린과 함께 칭기즈칸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을 찍으러 왔다고 하니 현지인들이 코웃음을 쳤다. 영화제작자가 되겠다는 한 몽골인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칭기즈칸은 현대화의 아버지다.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기능적 국가를 건설한 인물이다. 칭기즈칸을 잔인한 폭군으로 여기는 서양인들의 인식을 바꿀 만한 영화를 계획 중이다. 괜찮은 시나리오 작가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

우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젊은 몽골인 사회학 교수 부모치르 둘람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황사 바람 때문에 창문을 모두 닫아놓은 사무실에 앉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몽골인들은 블랙베리를 사용하는 세계인인 동시에 무당을 믿고 칭기즈칸을 숭배하는 고대 전사의 후예가 되고자 한다. 그건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어떻게 동시에 그 둘 다가 되겠는가?”

몽골의 한 성직자가 장차 몽골의 교통과 산업 요충지가 될 사인샨드에서 열리는 투자회의에 나를 초대했다. 몽골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난 1970년대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총서기장을 위해 제작된 ‘대통령 전용 열차’를 타고 갔다. 열차의 외관은 바퀴 위에 멋없는 상자를 얹어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신발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나는 등에 배낭을 멘 채 양말바람으로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관처럼 생긴 욕조가 딸린 1인용 객실이 늘어서 있다. 개인용 식당엔 딱딱하고 등받이가 좁은 의자들이 있고 식탁 위에는 닭 튀김과 통조림 파인애플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미소 띤 얼굴의 한 여성이 복도에 깔린 양탄자를 둘둘 말더니 (승객 모두가 신발을 벗고 지나갔는데도) 새 양탄자를 깔았다. 그 여성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낙타 털로 만든 슬리퍼 한 켤레를 건네줬다.

내가 몽골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몽골 횡단열차를 타고 입국했는데 몽골 상인들(팔뚝 굵은 여자들과 모두 칭기즈칸 역할에 딱 어울릴 법한 땀에 젖은 남자들)이 4인용 침대칸에 여덟 명씩 들어가 잠을 잤다. 그들은 대용량 보드카와 해바라기씨 기름, 커피, 생선, 벤젠 등을 몰래 들여오는 밀수꾼이었다. 국경 근처에 다다르자 그들은 그 물건들을 미닫이식 칸막이 뒤쪽, 천장과 지붕 사이, 침대와 열차 바닥 밑에 숨겼다. 밝은 색 립스틱을 바른 군인 같은 외모의 여자 차장이 그들을 도왔다. 난 그들에게 방해가 됐다. 레슬링 선수처럼 우람한 어깨에 애꾸눈인 한 남자가 보드카 냄새를 풍기며 내게 다가와 커피 봉지들을 숨겨달라고 했다. 내가 거절하자 그 남자는 실수를 가장해 나를 벽 쪽으로 세게 밀쳤다. 하지만 이 ‘대통령 전용 열차’ 안에서는 아침에 승무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잠을 깨운 뒤 고기 튀김이 포함된 아침 식사를 가져다 주었다.

사인샨드 공회당에서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이 열렸다. 몽골의 새 기차 노선이 개통되면 전국 각지에서 수송된 원자재가 이곳에서 용해와 정제 과정을 거쳐 가치가 몇 배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베이징과 블라디보스톡, 도쿄, 로테르담 등으로 수출된다! 또 첨단기술을 이용한 공원들과 정원처럼 아름다운 교외, 레스토랑 체인점,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게 된다. 공회당에서 나와서 시내를 걸었다. 사회주의 시절에 건설된 아파트들이 젖은 성냥갑처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모습으로 고비 사막 지역까지 무계획적으로 흩어져 있다. 술 한잔 하고 싶은 생각에 현지인에게 물어봤더니 금요일 오후 5시 이후엔 술집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주민의 정신과 간 건강을 위해 최근에 시작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하지만 은밀하게 몇 잔 사서 마셨다).

그곳 사람들의 표정은 공허하고 험상궂고 지쳐 보였다. 2010년 베이징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몽골인 현대미술가 쿠렐바타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같았다. 쿠렐바타르는 전통적인 차림을 한 몽골인들의 흑백 초상화를 그린 뒤 그 그림을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의 유색 액자에 끼웠다. 그가 그린 몽고인들은 표정이 시무룩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새로운 세계로부터의 공격에 당황해 누군가의 안내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런 요청을 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

울란바토르로 돌아가 다시 술집을 찾았다. 라이브 음악이 나오는 한 술집에 들어서니 바와 무대 사이에 손님들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티를 입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표정을 짓는 힙합 팬들, 턱수염이 텁수룩한 브리트팝 팬들,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헤비메탈 팬들이 각기 무리를 이루었다. 런던이나 뉴욕의 클럽에서는 이토록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젊은이들을 본 적이 없다. 각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를(아니, 그 밴드만을) 응원했다. 음악은 멋졌지만 모두 MTV에서 수없이 듣던 음악과 비슷했다. ‘조논’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나왔다. 커다란 가죽 재킷과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햇병아리 같은 소년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줍은 표정의 여자 멤버들은 전통 현악기인 마두금을 들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조율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연주는 놀라웠다. 흐미(몽골 전통 창법) 노랫가락이 창자를 꿰뚫고 마두금 소리가 등뼈를 쿡쿡 찔러댔다. 또 북소리는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머리를 빡빡 깎은 몽골인 래퍼 지(Gee)가 무대에 나와 밴드에 합류했다. 그의 랩은 몽골의 풍경에 딱 어울렸다. 울퉁불퉁하고 거칠며, 질긴 고기를 거침없이 잘라내는 유목민의 칼처럼 날카로운 느낌… 그리고 사막의 물처럼 고요한 사운드가 이어졌다. 끝나지 않을 듯 길게 이어지는 모음, 테누토(한음한음을 충분히 지속해 소리 내는 주법)와 글리산도(넓은 음역을 빠르게 미끄러지듯 소리 내는 주법), 그리고 요들송을 연상케 하는 연주가 계속됐다. 그 다음엔 몽골 전통의 ‘장가(long song)’가 연주됐다. 장가는 유목민이 이동할 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부르는 노래 형식인데 이날 밤은 무대 뒤에서 나타난 한 여자 가수가 노래했다. 그녀는 몽골 불교 사찰에 쓰이는 문양이 들어간 의상을 입고 나왔다.

장가와 랩과 흐미와 록, 어울리지 않을 듯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작은 교향악을 이룬 이날 공연을 보고 나니 마침내 몽골이 이해되는 듯했다. 사인샨드 공회당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과 울란바토르의 판자촌, 무당과 아이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칭기즈칸의 후예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은행원. 이 모두가 이 무대 위에서 어느 순간 하나가 됐다. 그룹을 지어 앉아 있던 관객이 모두 일어나 한데 어울렸다. 그 순간 그들의 얼굴은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으로 기쁨에 넘쳤다.

[필자는 영국의 TV 프로듀서이자 논픽션 작가다.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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