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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경쟁력이 산업 경쟁력이다

수학 경쟁력이 산업 경쟁력이다

SC제일은행의 ‘인터내셔널 그레듀에이트 프로그램(IGP·International Graduate Programme)’. 이는 스탠다드차타드(SC)가 한국 대학 졸업예정자 혹은 졸업자를 상대로 국제업무 인력을 선발하는 것인데 시작 부분이 국내 여느 금융회사와는 좀 다르다.

SC는 IGP에 지원자를 대상으로 우선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실시하는 두 개의 능력시험(two online ability tests)을 치른다. 그 첫 관문은 뉴메리컬 리즈닝 테스트(numerical reasoning test)라 불리는 수학시험이다. 이를 통과한 지원자는 역시 온라인으로 시행되는 2단계 능력평가(talent assessment) 단계로 들어서지만 탈락자는 거기서 중단이다. 이 은행은 이 두 온라인 시험을 거친 사람에 한해서만 구체적인 지원서류를 받아 경쟁방식의 채용절차를 밟게 한다.

금융기관뿐 아니라 선진국 기업 상당수는 이미 이와 유사한 채용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래 산업구조가 컴퓨터·IT·금융공학·생명공학·나노기술·우주항공·뇌과학 등으로 진화하면서 수학의 힘이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보다 유럽계 회사가 이 방식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굳이 온라인 테스트가 아니더라도 면접을 하면서 수학적 사고력과 응용력을 확인하기도 한다. 브레인 티저(brain-teaser) 혹은 케이스 인터뷰(case interview)라 불리는 이 시험은 일종의 수학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이를 통해 회사는 지원자의 수학적 능력을 검증해 채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SC 수학시험 거쳐야 응시자격 그 대표적인 회사가 미국의 구글이다. “옷장에 셔츠가 가득 찼다. 오늘 원하는 옷을 찾기 쉽게 하는 당신만의 정리법은?” “3시15분, 시침과 분침이 만든 각도는?” “미국 전역의 전봇대 수는 몇 개?”… 정답이 있는 질문과 없는 질문이 섞인 이 테스트를 통해 면접관들은 응시자의 창의력과 논리적 사고, 상황 대처능력 등을 집중적으로 파악한다.

수학력(數學力)이 산업 경쟁력이고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미래 유망산업은 온통 수학과 그 연계학문으로 포장되고 있음이 확연하니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실로 어떤 수학이고 수학과 출신이었나? 초·중등학교 시절 대개의 경우 수학은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그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입시를 위한 수학을 끝내고 나면 평생 수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과거 수학과 출신의 사회적 출구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1960~70년대 수학과를 졸업하면 중·고교 교사, 학원강사 정도의 취업 기회가 열려 있었고 대학교수의 길이 가장 화려한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다 1980년대 컴퓨터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들의 입지는 좀 달라졌으며 1990년대 컴퓨터를 응용한 첨단산업 분야로 그들은 흡수돼 갔다. 2000년대 파생상품을 다루는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이 각광 받으면서 수학과 출신은 투자은행과 증권사에 기회를 잡았다. 최근 들어서는 산업 각 분야, 심지어 마케팅 분야까지 수학 전공자를 찾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추세다.

과거에는 소위 통밥으로 상황을 짚은 후 겁없는 활력으로 문제를 풀어갔지만 이제는 스마트한 대응의 시대다. 따라서 생산공정과 마케팅 관리는 물론 서비스산업 분야 각종 계획도 과학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거기에서 수학적 접근과 해결방식을 강구하는 것이 생산성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상황과 가격을 예측하며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도 수학력이 남다른 기량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다.

상경계나 법정계 그리고 자연계 공학 분야와 달리 아직까지는 수학과 출신을 따로 뽑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공개적으로 ‘수학과 출신 우대’라는 표기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수학력이 강한 인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회적 새 조류인 셈이다.

개중에서도 수학 전공자의 금융계 진출이 단연 돋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올 하반기 국내 헤지펀드 첫 도입을 앞두고 퀀트(quant·세계 선물·현물시장의 가격 추이를 계량적으로 분석하면서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투자하는 것) 전문가의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젊은 피’를 찾는 작업이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IBM·마이크로소프트 등 선진국 연구소가 수학자 집합소가 되고 미국 월스트리트에 포진한 투자은행과 증권사가 수학 천재들이 고안해낸 각종 파생금융상품으로 화려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우리나라 증권사의 장외파생상품(OTC)과 보험사의 신상품 개발, 판매전략 수립 등에도 수학과 출신이 빠지지 않고 있다.

한 증권사 파생상품공학팀장의 설명을 옮겨와 보자.

“파생금융상품의 모델을 만들고 구상 중인 상품의 시장성과 수익성 등을 분석하는 과정에는 수학·물리학은 물론 심지어 화학·생물학·산업공학 등에서 사용하는 자연계 모델을 원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복잡한 것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기체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브라운법칙, 인체의 신경계를 설명하는 모델을 응용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는 거죠. 미래의 가격을 계산하고 확률을 추출하는 작업에는 편미분방정식까지 동원됩니다.”



수학철학과 토론식 수학수업 긴요 이 결과 최근 들어 증권업계에서는 과학고와 KAIST·포항공대 학력을 가진 이공계 출신이 크게 늘었다. 서울대 등 종합 명문대 이공계 전공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이 담당하는 업무는 파생상품 개발과 운용 등 금융공학적 분야뿐 아니라 펀드매니저·애널리스트 등 증권사 본연의 일까지 확대일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과학고 출신이 30명 안팎, KAIST 출신은 곧 100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광화문 일대에 포진한 외국계 금융기관에도 수학력으로 무장한 인재가 상당수 활동 중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는 구원회(미래에셋증권 상무·KAIST),김성하(미래에셋증권 전략기획본부 이사·KAIST), 이승재(대신증권 선임연구원·서울대 항공우주공학), 장원재(삼성증권 운용사업부장·서울대 수학과), 김두남(삼성자산운용 ETF운용2팀장·KAIST) 등의 이름이 따라 다닌다.

이런 변화에 맞춰 인재 배출의 전당인 대학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다. 개중 가장 돋보이는 게 각 대학이 금융공학을 비롯한 수학 파생학과, 즉 금융정보통계학과·금융수학과·과학계산학과·시스템공학과 신설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관련 교수진 확보 경쟁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전문가들이 우리 대학의 ‘수학 역량’에 A학점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실시한 ‘학업 성취도 국제비교평가(PISA)’ 수학 분야에서 항상 1, 2위를 다툴 만큼 ‘수학 강국’이지만 정작 금융계나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수학 인재는 부족하다.

실제로 국제수학연맹(IMU)은 68개 회원국의 수학 등급을 매기는데 최고 등급인 5등급에는 미국·일본·독일·영국·프랑스·캐나다·이탈리아·러시아 등 G8에 중국·이스라엘이 포함돼 있다. 한국은 4등급으로 여기에 끼지 못한다. 대학입시용 문제풀이를 위한 수학교육에 몰입하고 있는 탓이다.

수학력을 국가 경쟁력의 근간으로 삼기 위한 새 전략이 긴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입시용 수학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수학철학을 배우고 토론식으로 수학수업을 하는 선진국에서 찾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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