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Collector] 전통 자수의 미 되살리다

[Collector] 전통 자수의 미 되살리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세상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없었으면 조선시대 전통 자수와 보자기의 역사는 사라졌을 것이다.” “전통 보자기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일깨운 것도 그였다.” 한국의 대표적 자수 보자기 컬렉터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올해 86세다. 그의 문화재 컬렉션 경력은 이미 50년을 넘었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보자기와 자수에 눈길을 주고, 한국의 전통 자수와 보자기의 미학을 되찾아낸 열정의 세월이었다.

허 관장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육사를 졸업한 뒤 군 동료들과 물류업을 해 돈을 벌었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였다. 그 무렵 도자기를 하나둘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한국전력공사에서 이사, 감사를 지냈다. 처음 문화재를 수집할 때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솔직히 얘기해 고미술을 수집하면 언젠가 돈을 벌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도 좀 있었죠. 그런데 친구들은 돈을 벌려면 땅을 사지 왜 고미술을 수집하느냐고 구박하기도 했지요.”



문화 지킴이로 변신그런데 문화재 수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은 10년도 못 가 무너져버렸다. 1960년대 중반 외국인들이 우리 전통 자수를 무더기로 반출하는 것을 보았다. 재산이고 뭐고,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자수와 보자기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자수와 보자기에 빠져들었다. “남들이 내팽개쳐 버려진 것도 내 눈엔 참 예쁘게 보이더군요.” 1976년 한국자수박물관을 열었다.

유물 수집 과정은 쉽지 않았다. 1970년 초였다. 조선시대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자수로 수놓은 10폭짜리 병풍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충남 금산으로 달려갔다. 잘 아는 골동품상과 함께 갔다. 병풍이 너무 커 두 방에 걸쳐 펼쳐놓고 감상했다. 대단한 작품이었다. 구운몽의 내용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정성스러운 작품으로 한국의 색감이 잘 표현돼 있었다.

허 관장은 너무 기분이 좋아 감탄했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너무나 갖고 싶은 욕망이 얼굴에 드러났다. 순간 금산에 사는 소장자가 이를 알아챘다. 소장자가 튕기기 시작했다. 값을 올려 불렀던 것이다. 소장자가 부른 가격이 너무 높아 그 당시엔 병풍을 구입할 수 없었다. 그냥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그 병풍이 눈에 아른거렸다. 매년 명절이면 금산으로 향했다. 쇠고기 한 근 사 들고 “대전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잠깐 들렀다”면서 그 소장자를 찾았다. 한번은 담요를 선물한 적도 있었다. 담요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소장자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허 관장은 단념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 소장자의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세가 기울어 구운몽 병풍을 내놓겠다”는 내용이었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허 관장에게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불교 자수는 수집하지 마라. 수집을 시작하면 사찰에 있는 것 다 허동화의 손에 들어갈 테니…”라고. 그만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자수와 보자기 등을 수집했다. 현재 한국자수박물관 컬렉션은 모두 3000여 점. 각종 보자기, 바늘집, 흉배, 안경집, 의복, 꽃신, 주머니, 안대, 수저집, 베갯모, 꽃버선 등. 모두 손바느질의 아름다움, 한국의 전통적 색감과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컬렉션 가운데 하나인 ‘자수사계분경도(刺繡四季盆景圖)’는 보물 제653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네 폭짜리 병풍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수 문화재다. 비단에 포도무늬의 분(盆)과 분재(盆栽), 연꽃무늬의 분과 꽃병, 매화의 분재와 꽃병을 수놓았다. 허 관장은 이 ‘자수사계분경도’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자수 이외의 모두를 내놓고 이걸 구입했지요. 아마 내가 사지 않았으면 이병철 회장에게 들어갔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부처와 보살 등을 아름답게 수놓은 조선시대 자수가사도 보물 제654호로 지정돼 있다. 이 밖에 조선시대 왕비 방석도 매력적이다. 국내에 유일하게 전해오는 조선시대 왕비 방석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봉황, 장수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학·모란 등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는 국내 컬렉터 가운데 해외전시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 박물관, 일본 도쿄 민예관과 오사카 민예관 등 영국·미국·프랑스·독일·벨기에·호주·이탈리아·뉴질랜드·스페인·일본에서 모두 52차례에 걸쳐 특별전을 열었다. 사람들은 “보자기는 부피가 적어 해외에 들고 나가기가 편하다”고 농담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자기처럼 우리 미감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도 없을 것이다. 도자기, 회화도 좋지만 자수를 보면 한국인의 색감, 옛 여성의 마음을 만날 수 있어 특히 외국인이 좋아한다.

“해외 전시장에 서면 스스로 감동 받아요.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를 내 능력으로 모으고 연구하고 자료집도 냈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놀랍기도 합니다. 특히 해외 전시를 해 보면 눈물이 납니다. 내가 이것을 해냈구나 하는 생각에서요. 눈물이 나는 것은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참으로 자랑스러운 문화국가에 태어났구나, 이렇게도 선조의 재능이 뛰어났었구나, 이런 감동을 받습니다. 특히 교포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더 뭉클해지지요. 외국에선 우리 자수박물관이 한국의 대표 박물관으로 평가 받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저를 미치게 만들지요. 참 좋습니다.”

허 관장은 수집 유물을 기증하기도 한다. 1995년부터 11차례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아트 뮤지엄 등 국내외 박물관에 한복 노리개, 자수 보자기, 부채, 다듬잇돌 등 1000여 점을 기증했다. 그는 요즘 나이를 잊은 채 미술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농기구를 소재로 한 오브제 미술에 빠지더니 2000년대엔 비단을 이용한 직물화에 매료됐다.

“수십 년 동안 조선시대 자수와 보자기를 모으고 그걸 매일 보고 있노라니 조선 여성의 노랫가락이 들리더군요. 그 흥에 겨워 나도 모르게 절로 그림을 그리게 됐지요.”



조선 여성의 노랫가락 들려그의 직물화는 조선시대 전통 자수나 보자기의 미학과 잘 어울린다.

“조선 여인이 수놓은 자수를 보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합니다. 연못 속에 고기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새도 그려 넣었어요. 꿈을 그린 거지요.” 

그는 자수 전문가로서 관련 서적도 많이 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좋은 자수』다. 아름답고 단아한 우리 자수와 보자기. 그의 컬렉션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나면서 참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 제목처럼 그는 참 좋은 컬렉터, 참 아름다운 컬렉터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태영건설, 다음달 사채권자집회 소집…만기연장·출자전환 논의

2105→55층으로 변경...현대차그룹, 새로운 GBC 공개

3GC녹십자, 산필리포증후군 치료제 美 1상 IND 승인

4양종희 KB금융 회장 “블랙스톤과 해외시장에서 투자기회 적극 발굴”

5SK증권, 캄보디아 수력발전 댐 건설 사업 지원 검토

6NH농협생명, FC‧DM채널 연도대상 시상식 개최

7대한항공, 혁신기술 적용 ‘인공지능컨택센터’ 세운다

8IBK기업은행, 글로벌 ESG 활동을 위해 임직원 자원봉사단 파견

9한국투자證, 뉴욕에서 'KIS 나잇' IR행사 개최

실시간 뉴스

1태영건설, 다음달 사채권자집회 소집…만기연장·출자전환 논의

2105→55층으로 변경...현대차그룹, 새로운 GBC 공개

3GC녹십자, 산필리포증후군 치료제 美 1상 IND 승인

4양종희 KB금융 회장 “블랙스톤과 해외시장에서 투자기회 적극 발굴”

5SK증권, 캄보디아 수력발전 댐 건설 사업 지원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