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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의 길] 구매·자재부서 배치, 곳간 단속에서 시작

[후계자의 길] 구매·자재부서 배치, 곳간 단속에서 시작


재계 3세들은 아버지 회사라고 무턱대고 준비 없이 들어오지 않는다. 해외 유명 MBA를 거친 후 외국계 컨설팅회사나 투자자문회사, 금융회사에 들어간다. ‘공채’ 직원 못지않은 스펙을 쌓은 후 드디어 아버지 회사에 입성한다. 입사 후에는 ‘무임승차’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혹독한 경영수업을 거친다.

재계 3세들의 그룹 입사 전 이력 중 가장 큰 특징은 MBA 과정 이수와 외국계 회사 경력이다. 3세 후계자들에게 MBA는 이미 필수조건이 됐다.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외국계 기업에 먼저 입사해 업무를 익힌 후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는 패턴이다. 분석 대상 52명 중 19명이 첫 직장으로 다른 기업을 택했다.

2세 경영인 중 글로벌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후 아버지 회사에 입사한 경우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1955년 일본에서 태어난 신동빈 회장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MBA를 마쳤다. 82년부터 7년 동안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 그는 롯데그룹 입사 후 노무라 증권에서 쌓은 국제 금융감각을 바탕으로 공격적으로 M&A에 나서며 외형 성장을 주도했다.

‘사립초등학교-국내 명문대-해외 MBA’가 ‘이재용 코스’라면, 학위 취득 후 그룹 입사 전까지 컨설팅회사나 금융계에서 스펙을 쌓는 건 ‘신동빈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컨설팅회사에서 국제감각 익혀다른 기업에서 일을 배운 재계 3세 19명의 업종을 보면 컨설팅회사, 투자은행, 종합무역상사, 광고회사, 석유기업, 통신기업 등 다양하다. 19명 중 컨설팅회사를 거친 3세는 모두 4명.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와 김남호 동부제철 차장이 AT커니에서 근무했고, 박철완 금호석유화학 부장은 보스턴컨설팅, 조현상 효성 전무는 베인&컴퍼니에서 일했다.

특히 재계 3세들은 보스턴컨설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대상은 아니지만 김성식 벽산 사장도 이곳을 거쳤다. 박용만 (주)두산 회장의 차남 재원씨는 뉴욕대(NYU)를 졸업하고 올해 초부터 보스턴컨설팅에서 컨설턴트로 근무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장남으로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에 입사한 기선씨도 최근 보스턴컨설팅에 입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계는 스탠퍼드대에서 경영대학원(MBA)을 마친 기선씨가 현대중공업 경영에 참여하기에 앞서 컨설팅회사에서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몽준 의원의 장녀인 남이씨도 MIT에서 MBA를 졸업하고 글로벌 컨설팅회사인 베인&컴퍼니에서 일하고 있다. 범현대가(家)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MBA 과정을 마쳐 어떤 식으로든 현대중공업 경영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3세들이 컨설팅회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문제해결 능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보니 다양한 경영 사례를 배울 수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민첩한 대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컨설팅회사에서는 인적 네트워크 구축과 산업을 보는 장기적인 안목을 키우는 것도 가능하다. 차세대 리더들이 모인 우수 인재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인맥은 아버지 회사에 입사해서도 도움이 되는 게 당연하다.

2010년 8월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앞줄가운데)이 현대백화점 킨텍스점 오픈식에 참석했다.

금융권에서 근무한 사람도 적지 않다. 허용수 GS전무와 이우현 OCI 부사장은 뉴욕의 세계적인 증권 및 자산운용회사인 크레디트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 투자증권(CSFB)에서 일했다. 이우현 부사장은 체이스 맨해튼뱅크와 사모펀드인 서울Z파트너스 경험도 있는 금융 전문가다. 또 허세홍 GS칼텍스 전무는 투자은행인 뱅커스트러스트 한국지사에서 근무했고, 조현준 효성 사장은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에서 일했다.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도 HSBC은행 출신이다.

세계적인 종합무역상사에서 실력을 쌓은 경우도 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종합무역상사인 이토추상사 뉴욕지사에서 근무했고, 조현준 효성 사장과 구본진 LG패션 부사장은 일본 미쓰비시상사에서 일했다.



경영수업 도움 되면 경쟁사도 입사효성가 3형제는 입사 전 쌓은 다양한 스펙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경우다.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은 미국 예일대 정치학 학사, 일본 게이오대 법학 석사 출신이다. 일본 미쓰비시상사 에너지부 및 원유 수입부를 거쳐 미국계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에서 근무하던 중 97년 효성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현재 효성 무역 및 섬유PG(퍼포먼스그룹)장 겸 전략본부장으로 효성그룹 전체의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미쓰비시상사 근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서울대 인류학과,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으로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99년 효성에 합류한 차남 조현문 부사장은 효성 중공업PG장을 맡고 있다. 그는 글로벌 협상 능력을 바탕으로 2006년 중국 남통우방변압기 회사 인수, 2008년 남통 변압기 공장 준공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3남 조현상 효성 산업자재PG장 겸 전략본부 전무는 최근 세계 1위 차량용 에어백 직물업체인 독일 글로벌 세이프티 텍스타일스의 지분 100%를 인수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독일 현지에서 계약서에 직접 서명까지 했다. 조 전무는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컴퍼니에서 근무한 뒤 98년부터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경영수업을 위해서라면 경쟁사 입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GS그룹의 허세홍 GS칼텍스 전무와 허준홍 GS칼텍스 부장은 미국 석유기업인 셰브런에서 관련 지식을 쌓았다. 대한항공의 광고홍보를 책임지고 있는 조현민 상무보는 남가주대(USC) 커뮤니케이션학과와 LG애드 MBK팀에서 실력을 키웠다.

3세들의 그룹 입사 후 경영수업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먼저 입사 초기엔 구매부, 자재부 등 돈을 쓰는 부서를 거친다. 이어 돈을 관리하는 회계, 경리, 재무팀에서 경력을 쌓는다. 현금과 자재 등 재화의 들어오고 나감을 통해 재정 단속 능력을 키우겠다는 의도다. 이를 통해 코스트는 최대한 줄이고, 재화의 프라이스는 최대한 높이는 이른바 ‘로 코스트, 하이 프라이스’를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고려대,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MBA를 거쳐 현대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으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자동차 제조에 필요한 부품 조달, 자재 관리 등을 담당하는 자재 부문은 자동차산업의 뿌리와 같다. 차를 알기 전 볼트, 너트부터 알아야 한다는 현대가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재계에선 정 부회장이 과거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은 경영수업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조원태 대한항공 전무도 자재부를 거쳤다. 2006년 1월 대한항공 자재부 총괄팀장을 맡아 2년 반 정도 업무를 맡았다. 당시 납품업체 물건 외에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경쟁사에 주목해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물건을 제대로 사려면 시장에 나가봐야 한다는 현장경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2010년 4월 조현문 효성 부사장이 압둘라 빈 하마드 알 아티야 카타르 부총리 겸 전력청장과 1300억원 규모의 전력망 사업 수주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도 현장경영이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의 신제품이 출시되면 곧바로 백화점이나 매장을 찾아 소비자 반응을 체크하곤 한다. 삼성가 오너십의 전통이다. 이병철 창업주는 계열사를 둘러볼 때 이건희 회장을 꼭 배석시켜 현장 경험을 쌓도록 했다. 최근 이 회장이 출근경영을 통해 업무보고를 받을 때 이 사장이 자리를 끝까지 지키도록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룹별로 승진 코스도 다르다. 삼성과 현대가가 처음부터 높은 직책을 주었다면, 두산의 경우 평사원으로 입사해 밑바닥부터 경험하게 한다. 이는 2세에서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경우 빠른 경영 참여와 권한 부여가 필요하고, 3세에서 4세로 넘어갈 때는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 ‘경영 수습’ 기간을 갖도록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두산은 현재 4세들이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삼성과 현대차처럼 외아들인 경우 승계작업을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승진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4세 경영 체제로 이행 중인 두산그룹은 모든 자녀가 두산 계열사에 입사하기 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는 것을 그룹 방침으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은 일본 기린맥주에서 맥주의 맛을 알았고, 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은 대한항공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 박태원 두산건설 부사장은 첫 출근을 효성물산 자원팀으로 했다. 다른 기업에 취직하지 못한 경우 두산그룹에 모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박형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 박석원 두산엔진 상무, 박이원 두산중공업 전무 등이 그런 경우다. “평사원 입사는 2세인 박두병 회장이 3세에게 적용하면서 이어져 온 전통”이라는 게 두산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부 기업에서는 재계 3세들의 첫 사무실로 전략기획 부서를 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20, 30대의 재계 3세들 가운데 처음부터 기획실에서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지적했다. 생산 현장에서 직원들이 흘리는 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서는 뛰어난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조카인 박철완 부장과 아들인 박준경 부장의 직급을 한 단계 낮춘 것도 같은 이유다. 두 사람은 지난해 4월 나란히 상무보로 임원 승진했지만 박 회장은 이를 취소하고 부장으로 강등시켰다. “임원이 되면 책상에 앉아 일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을 익힐 때”라는 게 그 이유다. 두 사람은 현재 금호석유화학 해외영업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재계 3세 격전장은 내수 아닌 글로벌시장오너 일가가 경영 최일선에 서는 것은 오너십을 통해 불투명한 경제 상황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서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 책임경영이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너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후계자의 경영 자질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아버지 회사에서 고속 승진하기보다는 외부 기업이나 기관에서 경험을 쌓은 후 단계를 밟아 천천히 경영권을 승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기업분석업체인 한국CXO연구소의 오일선 소장은 “3세들의 경영권 승계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이 바로 경영 능력”이라며 “무엇보다 착실한 경영수업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르면 10년 내 경영권을 물려받게 될 재벌가 3세들의 주요 격전지는 내수가 아닌 글로벌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글로벌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동차 배터리나 태양광산업 등 신수종 사업의 승기를 잡기 위한 신경전도 한창이다.

지난 9월 중순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참석한 세 명의 재계 3세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직접 현대차의 발표회를 진두지휘한 가운데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과 박세창 금호타이어 전무도 자사 전시장을 꼼꼼히 챙겨보며 경영 보폭을 넓혔다. 이들 자동차 업계 3세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유럽 시장 대응전략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부터 10년은 100년으로 나가는 도전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말처럼 3세들이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게 재계 안팎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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