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cause] 앤절리나 졸리의 전쟁
[film cause] 앤절리나 졸리의 전쟁
JANINE DE GIOVANNI 기자우리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중심가의 한 식당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적인 영화 스타가 아니라 수년 동안 내가 만난 동료 기자나 구호요원과 함께 있는 듯했다.
As I sat in a restaurant in down-town Budapest it felt as if I was with another reporter or aid worker I had met over the years rather than an international movie star.
앤절리나 졸리는 바로 얼마 전 리비아의 미스라타를 방문하고 부다페스트로 다시 돌아왔다. 최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은 그곳 말이다. 그 이후로 미스라타는 리비아인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졸리는 그곳의 참상을 피부로 접하고 왔지만 그 충격으로 경황 없는 모습이 아니었다(she was not rattled). 그녀는 자신의 영화감독 데뷔작부터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조직적인 강간, 다르푸르 방문, ‘아프리카의 뿔’에 넘쳐나는 난민까지 넘나들며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디를 가든 늘 그곳에 관해 배우려 해요(When I go somewhere, I am always willing to learn about it)”라고 졸리가 말했다. “자세한 현황을 브리핑 받고, 책을 읽고, 현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죠. 하지만 주된 목적은 현지에 가서 세계인들의 의식을 높이고(to bring awareness),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연락해 무슨 조치가 취해질 수 있도록 애써요.”
졸리는 그런 열정과 솔직함, 진지한 접근법을 자신의 영화 감독 데뷔작 ‘블러드 앤 허니(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12월 미국 개봉)’에 그대로 적용했다. 영화 제작의 기술적인 문제는 “주저 하지 않고 촬영 감독에게 물었어요(I wasn’t afraid to ask the DP [director of photography])”라고 그녀는 말했다. “또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 대다수는 전쟁을 몸소 겪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녹여 넣으려 노력했죠(tried to incorporate it into the work).” 졸리는 전쟁을 배경으로 세르비아 군인과 보스니아 여성의 감동적이고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 영화를 보고 나면 졸리를 칭찬하지 않기가 어렵다(It is difficult not to admire Jolie, particularly after watching her film).
1991년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면서 복잡한 민족·종교에 따라 분리된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가 서로 전투를 벌이면서 약 10만 명이 희생됐다. 그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새벽 3시가 됐다. 그녀의 경호원이 와서는 너무 늦었다고 정중히 알렸다. 8시간 동안 마시며 이야기한 뒤라 지쳤지만 졸리는 나를 호텔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고집했다. “당신이 무사히 호텔에 도착하는 걸 봐야 마음이 놓이니까요(I want to make sure you’re all right)”라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사라예보 포위를 현지에서 경험한 기자로서 무슬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 이전에는 함께 살며 친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등을 돌려 잔혹하게 서로 공격하는 모습을 봤다. 민족 청소(ethnic cleansing), 민가 불지르기, 쏟아지는 난민 행렬을 목격했다. 한번은 절단된 사람 손을 물고 거리를 달려가는 개도 본 적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with an especially critical eye) ‘블러드 앤 허니’를 보러 갔다. 특히 진실이 왜곡된 내용이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I was on the lookout for inauthentic details). 보스니아를 주제로 한 다른 영화들을 봤을 때 짜증과 화가 났었기 때문이다. 왜 감독이 당시 상황을 좀 더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을까? 왜 그 누구도 20세기 말 유럽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잔혹한 전쟁의 진짜 이야기를 하지 못할까?
두 눈을 부릅뜨고 흠을 찾으려 했지만 졸리의 영화는 내게 깊은 인상만 심어 주었다. 1992년 4월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17세에 불과했던 여성으로서 그 참상을 어떻게 그토록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을까? 특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공격에 초점을 맞춘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깊은 이해가 더 놀라웠다. 졸리는 “사실 당시엔 그 고통의 정도를 헤아릴 길이 없었어요(At the time, I had no idea of the extent of the agony)”라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졸리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친선대사(Goodwill Ambassador)로 활동하면서 보스니아 민간인들이 당한 끔찍한 경험을 이해하고 지금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보스니아 동부의 악명 높은 ‘강간 수용소(rape camps)’에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던 여성들은 지금도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 여파에 시달린다. 특히 그 점이 졸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영화에서 늘 맡은 역할에 무서울 정도로 치열하게 매달리는 졸리는 그후로 보스니아 전쟁에 관해 읽을 수 있는 모든 책과 자료를 섭렵했다(immersed herself in reading everything she could about the Bosnian war).
졸리는 현대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포위를 견뎌낸(endured the longest-running siege in modern history) 사라예보를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정확히 재구성했다.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잔혹하게 로켓포로 공격당한 구호 트럭들, 억류된 채 계속 강간 당하며 서서히 미쳐간 젊은 여성, 다리를 뛰어 건너던 아버지와 아들을 표적으로 삼은 술 취한 저격수들(the drunken snipers targeting a father and son running across a bridge).
졸리의 영화는 전쟁으로 고립된 상태(isolation)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전쟁 초기에 나는 사라예보 언덕 위 유대인 묘지 근처에 숨은 세르비아 저격수들을 피해 강 건너편으로 산책 나가곤 했다. 공습과 저격, 굶주림, 추위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전선 부근의 요양소에 버려져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숨진 노인들을 목격했다. 눈사람을 만들며 뛰어놀다가 로켓포에 맞아 숨진 아이들도 봤다.
보스니아 전쟁 초기에 미국은 개입을 원치 않았다. 미국에선 유럽의 문제이며, 옛 숙적들(기독교인 대 무슬림, 크로아트인 대 세르비아인) 사이의 아주 복잡한 싸움으로 유럽의 뒷마당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간주됐다. 그러다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사이에서 전투가 치열해지자 유엔이 개입했다. 결국 1994~95년 나토(NATO)의 공습으로 휴전 협상이 시작됐고, 그 협상에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도 전쟁 초기부터 사람들은 집 창문 밖에 미국 국기를 내걸었다.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오나요(Are they coming to save us)?”라고 그들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미국인들이 언제 와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졸리의 영화는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는 게 어떤 건지 잘 보여준다. 시인, 은행원, 교사, 어머니가 전쟁의 잔혹함과 배신에 의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 말이다. 인간이 살아남으려고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하는지 탐구하는 영화다(It is about what humans do to other humans to survive).
“그곳 사람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잊어버렸다고 느꼈어요(The people felt as though the world had forgotten them)”라고 졸리가 말했다. “끔찍한 고통의 시기였어요.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의 마음에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without offending anyone).”
당시 보스니아인들은 어디서든 누구에게서든 도움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이 아주 복잡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상기시키려면 앤절리나 졸리 같은 유명 인사의 ‘스타파워’가 필요할지 모른다. “모두에게 보스니아 전쟁을 기억시키려고 만든 영화지만 진실로 이해하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할 것(It was made to remind everybody of the war—but only a small group of people will really understand)”이라고 졸리도 인정했다. 그래서 졸리는 먼저 이 영화를 보스니아어(영어 자막)로 개봉하기로 했다.
‘블러드 앤 허니’의 진실성(authenticity)은 세르비아인, 무슬림, 크로아티아인이 고루 섞인 옛 유고 출신의 유능한 배우들에게서 나온다. 대다수가 전쟁을 겪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부상한 배우도 있다. 일부는 전쟁을 바로 가까이서 목격했다. 주인공을 맡은 고란 코스티치는 잘 알려진 군인 가족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행을 강요당하는 세르비아 장교 역을 맡았다. 그의 연기는 정직하며 실제 고통이 배어 나온다. 여주인공 바네사 글로조는 멋진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전쟁으로 그 꿈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녀는 이렇게 돌이켰다. “여러 번 저격 당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학교 가는 나를 맞추진 못했죠. 그러다가 그들이 우리 집에 쏜 박격포에 난 부상을 입고 말았어요.”
젊은 배우 에르민 브라보는 사라예보 포위 당시 어린이였다. 촬영 동안 그는 헝겊 조각으로 덧댄 낡은 전투복 바지(patched, frayed combat trousers)를 입었다. 형이 사라예보 수비대원이었을 때 실제 입었던 그 바지였다. 브라보는 오디션에서 “바나나가 어떤 맛인지 잊어버렸어요(forgot what a banana tasted like)”라고 돌이켰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구호 식량으로 연명했다. 주로 쌀, 파스타, 분유, 액상 치즈였다.
그러나 모두가 잊고 싶어하는 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다(Yet conjuring up memories of a war that everyone wants to forget was not easy for any of them).
여배우 알마 테르지치는 이렇게 말했다. “내겐 특히 힘들었어요. 내가 어머니, 여동생과 살고 있는 동안 아버지가 직접 전투에 참여했어요.” 테르지치의 상처는 매우 크다. 전쟁으로 가족과 친척 28명을 잃었다. “그런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살아남는 여성의 연기가 엄청난 부담이었어요. 최대한 진실하게 연기하는 게 내 임무였어요(It was my duty to play it truthfully as much as possible).”
졸리가 영화에 담은 뉘앙스도 배우들의 진실성 만큼이나 중요하다. 졸리는 세르비아 군인 다수가 전쟁 내내 ‘슬리보비츠(slivovitz)’라는 독한 과일 브랜디를 마셨으며(그녀는 사령관이 책상 위에 한 병을 갖고 있는 장면을 삽입했다), 그래서 ‘저격수 골목’을 통과하는 가장 안전한 시간은 그들이 술에 곯아떨어진 아침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졸리는 또 유엔 평화유지군이 비효율적인 지시 때문에 민간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함도 그려낸다. 그들은 총격 받을 때만 응사할 수 있으며(they could fire only when they were fired upon), 규정에 따르면 민간인이 아니라 구호요원만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었다. 그러나 그런 무능함이 혐오스러워 지시를 독단적으로 거부한 용감한 이도 있었다.
사소하지만 아주 중요한 세부 사항도 있다. 거리 풍경, 가구, 보스니아 여성들의 옷차림과 말투, 그들의 표정 등이다.
졸리는 “대본에 따른 연기가 절반, 즉흥 연기가 절반이었어요(It was half script, half improvisation)”라고 말했다. 그녀는 늘 현지 스태프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입은 흰 셔츠가 강간 수용소 장면을 찍는 동안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고 계속 깨끗했어요. 그게 마음에 걸렸죠. 그래서 계속 그 이야기를 했어요.” 또 그녀는 등장인물들이 전쟁 전에는 풍부했던 음식, 외부 세계와의 접촉, 책, 영화, 시를 갈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주변에 박격포가 떨어지는 와중에 젊은 보스니아 군인들이 벙커에서 함께 식사하는 신랄한 장면이 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먹을지 농담을 한다. 당시 사라예보에 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섬뜩한 블랙 유머와 그들의 웃음(옛 유고에서 사라예보 사람들은 광대 같은 유머로 유명했다), 그리워하는 음식을 끊임 없이 돌이키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논란도 따랐다. 2010년 7월 나는 사라예보에 있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남자·소년 8000명이 희생됐다) 15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열릴 때였다. 그때 졸리와 그녀의 파트너인 브래드 피트가 보스니아 동부 포카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끔찍한 강간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보스니아 무슬림 여성들이 끌려와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계속 강간 당했다. 일부는 무슬림 유전자를 희석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임신시켰다(some were deliberately impregnated to dilute the Muslim gene pool). 피해자 몇 명은 하루 최대 열 번씩 강간 당했다고 내게 말했다. 포카에 끌려 갔을 때 열두 살이었던 한 여성은 어머니와 함께 강간을 당했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일이 그렇지만 당시의 강간 사건은 보스니아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다. 처음에 사람들은 졸리가 유엔난민 친선대사로서 활동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졸리는 1999년 작품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2001년 유엔난민 친선대사로 임명돼 캄보디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세계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빛을 비추는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보스니아에서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언론은 그녀가 쓴 대본 내용이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의 이야기라고 잘못 보도했다(The press inaccurately reported that her script was about a woman who falls in love with her rapist). 비난 여론이 들끓자 보스니아 정부는 졸리의 영화 촬영을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 ‘블러드 앤 허니’는 훨씬 복잡한 영화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만난 커플, 그리고 수용소로 보내진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다. 동시에 배신과 열정, 때론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졸리는 전쟁 전의 사라예보가 다문화적인 도시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웃 모두가 서로 알았고 서로 사랑했고 함께 학교에 다녔지만 갑자기 앙심과 증오로 서로에게 총을 들이대게 되는 가슴 아픈 과정을 스크린에서 보여주려고 했다.
이 영화는 촬영 금지 조치가 해제된 뒤 부다페스트와 보스니아에서 42일 동안 촬영됐다. 촬영 내내 보스니아의 무슬림과 세르비아계 양쪽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브라보는 졸리가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안전하게 느끼고 긴장을 풀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어요.”
졸리가 할리우드 키드(Hollywood kid)에서 인도주의 운동 지도자(humanitarian leader)로 변신한 계기는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정권이 약 200만 명을 학살한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찍은 경험이었다(졸리는 2002년 캄보디아에서 첫 아들 매독스를 입양했다). 그 다음 졸리가 유엔난민 친선대사로 처음 방문한 곳은 역시 잔혹한 내전을 겪은 시에라리온이었다. 그 내전 동안 반군은 툭하면 민간인들의 손과 팔을 잘랐다. 그들은 “긴 소매를 원해 짧은 소매를 원해(Do you want long sleeves or short sleeves)?”라는 질문을 받았다. 손목 또는 팔꿈치 부분을 자른다는 뜻이다.
이런 곳을 누비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졸리는 ‘블러드 앤 허니’의 대본을 썼다. “초고를 쓰는 데 약 한 달이 걸렸고, 그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어요. 브래드 피트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읽었어요.” 하지만 실제 제작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섯 아이를 입양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이런 나라들을 계속 방문한다. 수행원을 많이 대동하지 않고 수수하게 다닌다(traveling lightly, without much security). 내가 전쟁 지역에서 취재할 때처럼 그녀는 울퉁불퉁한 길을 차로 달리고,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를 타며, 여러 차례 검문소를 통과한다. 리비아나 수단 같은 곳에는 레드 카펫이 없다. 그녀는 손전등, 공책, 방수 장비를 직접 챙긴다. 그녀는 ‘블러드 앤 허니’를 13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했다. 유엔난민 친선대사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 그대로 겸허하게 늘 공부하는 학생의 자세로 영화를 만들었다.
“현장 조사를 나갈 때 미 외교협회(CFR)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브리핑을 받았어요”라고 졸리가 말했다. “국제법 과정도 들었어요(And I took a course on international law). 친선대사로서 일할 때와 똑같이 했어요. 열심히 공부했어요.”
졸리는 영화를 찍으려고 보스니아 전쟁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보고, 들었어요. 진실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여러 번 한 말을 또 반복했다. “무엇보다 현지 사람들을 존중하고 싶었어요(I wanted to be respectful of people).” 모르는 게 있으면 “늘 물었죠.”
함께 이야기하며 저녁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엔 관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이라크 유혈 사태가 한창일 때 졸리는 유엔난민 친선대사로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그녀는 난민들과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눈 뒤라 완전히 지친 상태였지만 이라크 현지 유엔 직원들이 자녀를 위해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응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절대 잘난 체하지 않았다(She smiled throughout, and had not an ounce of prima donna to her). “아, 기억나요”라고 졸리가 말했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죠(I would do anything for children). 누가 안 그러겠어요(Who wouldn’t)?”
졸리는 유명인사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Jolie is an unlikely celebrity). ‘블러드 앤 허니’에 출연한 배우들도 그녀에게서 소탈함과 따뜻함(natural ease and warmth)을 느꼈다. 저녁을 들면서 그녀는 사랑과 열정으로 입양 자녀를 이야기했다. 각자의 고유 언어와 문화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세계를 돌아다니기 좋아하지만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일은 매우 힘들다고 했다. 또 “베이비시터를 해본 적은 없지만” 27세의 미혼모로서 매독스을 잘 돌보려고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우유를 도대체 얼마나 먹여야 할지도 몰랐어요”라고 졸리가 매독스의 아기 시절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전화로 물어봤어요.”
졸리는 어머니 마셜린 버트랜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배우와 프로듀서로 일했던 버트랜드는 2007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졸리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버트랜드는 임종시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며 생을 보냈다고 졸리에게 말했다. 자녀 돌보는 일이었다. “그녀의 그런 착한 마음이 내게 큰 영향을 끼쳤어요(Her goodness had a huge impact on me)”라고 졸리가 말했다.
“우리 단골 호텔에 가면 가끔 벨보이들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요. 어머니는 그들의 자녀가 태어났거나 세례를 받으면 축하 카드를 보내곤 했죠. 그런 사람이었어요.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어요.”
‘블러드 앤 허니’는 보고 나면 가슴에 남는다(In the end, Jolie’s film stays with you). 일부 장면은 실제 전쟁 당시처럼 생생하고 끔찍하다. 한 장면에서 바네사 글로조는 이웃에게서 약을 구하지 못하자 어린 아이를 두고 폭탄으로 무너진 약국을 약탈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저격수의 총탄에 맞아 싸늘한 주검이 돼 있다.
아들의 움직이지 않는 작은 몸 앞에서 그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연기가 아니다. 글로조는 직접 전쟁을 겪었다. 그 전쟁으로 어린이 수천 명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그곳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눈밭에 나가 놀다가 죽은 어린이들을 기억한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있다. 어떤 무슬림과 세르비아 커플은 결혼 직후 가족과 친척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손 잡고 다리를 건너다가 저격당했다. 그들의 시신은 다리 위에 며칠 동안 방치됐다. 저격수가 시신을 옮기려는 사람들에게 계속 총질했기 때문이었다.
‘블러드 앤 허니’의 핵심은 결국 사랑 이야기다. 한 남녀가 전쟁 전에 만난다. 사라예보가 미술과 음악, 시가 넘치던 옛 올림픽 도시였던 시절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들의 눈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붕괴되는 모습을 본다(Through their eyes, we see the disintegration of society). 더 중요하게는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사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보게 된다(And more important, the evil that man can inflict on his fellow man).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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