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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기름값 어디로 - 휘발유값 ‘L당 3000원’ 기우만은 아니다

고삐 풀린 기름값 어디로 - 휘발유값 ‘L당 3000원’ 기우만은 아니다



천정부지로 오르던 국제 유가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104일 연속 오르던 국내 주유소 휘발유 값도 잠시 상승을 멈췄다.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이르다. 국제 유가는 이미 450일 가까이 배럴 당 100달러를 웃돌고 있다. 고유가 시대가 굳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불안한 원유 시장 수급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란 핵 사태 등 악재가 수두룩하다. 이러다 L당 3000원짜리 휘발유를 넣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 유가 흐름과 전망을 취재했다. 고유가로 더욱 팍팍해진 서민 삶을 들여다 보고,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허와 실을 짚어봤다.

월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SK경일주유소의 고급휘발유 값은 L당 2645원이었다. 보통 휘발유는 2445원, 자동차용 경유는 2245원이었다. 같은 날 영등포구 소재 38개 주유소의 고급 휘발유 값은 2372~2645원에 팔렸다. 보통휘발유는 가장 싼 곳이 2015원이었고, 평균 2160원이었다. 보통휘발유 가격이 2200원을 넘긴 곳은 15곳. 이 중 5곳은 2300원을 넘었다. 이날 서울 전체 주유소의 보통휘발유 값은 L 당 평균 2134원, 고급휘발유는 2289원이었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기름값이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유가정보 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보통휘발유 가격은 올 1월 5일 전국 평균 1933.30원을 기록한 후 4월 19일 2062.42원으로 무려 105일 만에 오름세가 멈췄다. 세계 원유 3대 벤치마킹 유종인 두바이유,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 북해 브렌트유도 3월 중순 고점을 찍은 후 보합 또는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기름값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싱가포르 석유제품 현물시장도 안정세를 찾는 모습이다.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걸까. 전문가들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최근 나온 국내외 유가 전망·분석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국제유가 초강세는 오래 이어질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일 쇼크 수준의 대폭등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국내 휘발유 값이 1L 당 3000원 시대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유가 150달러면 휘발유 3000원국내 사상 최초로 L당 2400원대 보통휘발유가 등장한 것은 4월 16일이다. 이날 서울 강남구에서는 L당 2398원, 관악구는 2395원, 서초구는 2380원, 중구는 2375원이 최고가였다. 약 2주 전 싱가포르 석유제품 현물시장에서 거래된 보통휘발유 값은 배럴당 135달러 안팎이었다. 우리나라 기름값은 정유회사가 싱가포르 현물시장 가격에 환율과 마진을 감안해 공급가를 정하고, 주유소가 이를 공급받아 다시 마진을 붙여 판매하는 구조다. 일반적으로 싱가포르 현물시장 가격은 2주 정도 시차를 두고 국내에 반영된다. 물론 싱가포르 현물 시장은 국제유가에 영향을 받는다. 국내 기름값이 100일 넘게 쉬지 않고, 그것도 가랑비에 옷 젖듯 오른 것은 국제유가가 그렇게 인상됐기 때문이다.

1월 2일 배럴당 109 달러로 거래된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가는 이후 계속 꾸준히 올라 3월 중순 124달러를 찍었고 최근 열흘간은 117~120달러 사이에서 거래된다.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선물가격은 연초 98달러에서 시작해 2월 말 109 달러를 넘어선 후 4월 들어서는 101~105달러로 거래된다. 연초 110달러 시작한 브렌트유는 3월 중순 126달러까지 서서히 올랐다. 싱가포르 현물시장에서 보통휘발유는 1월 첫 주 배럴당 119달러에서 시작해 4월 초에는 136달러까지 올랐다. 최근에는 130달러 초반에서 주춤한 상태다.

국내에서 2400원대 휘발유가 등장한 약 2주 전 국제유가는 120달러, 싱가포르 현물시장 거래 가격이 135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단순 계산으로 국제유가가 150달러가 되면 국내에 리터 당 3000원짜리 휘발유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유가 전망 대부분 상향 조정지난해 말 국내외 기관은 올해 국제유가(두바이유 기준)를 연평균 100달러 안팎으로 전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99달러를 전망했고 우리나라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원, 산업연구원 등은 95~107달러를 예상했다. 중동 사태가 안정되고, 선진국과 신흥국의 원유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현재는 대부분 경제전망기관이 애초 유가 전망을 폐기한 상태다. 정부는 올해 국제유가 전망을 115~120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한국은행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7%에서 3.5%로 수정 발표하면서, 애초 102달러로 추정했던 올해 원유도입 단가를 118달러로 15% 가량 높게 잡았다. 민관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유가전문가협의회 역시 최근 회의를 통해 올해 국제유가를 배럴당 115~120 달러로 전망했다.

이는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았을 때 얘기다. 유가전문가협의회는 전망 보고서를 내면서 “예상치 못 한 충격이 발생할 경우 유가가 급등 혹은 급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달았다.

올 2월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점검한 고유가 시나리오에 따르면 유럽·일본·한국 등이 이란산 원유수입을 일부 감축할 경우 유가는 배럴당 10달러 정도 상승이 불가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미 현실화됐다. 3월 말까지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 11개 국가가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줄였고, 이에 반발해 이란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그리스 등에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여기에 미국이 오는 6월 말까지 이란산 석유 수입을 줄이지 않는 국가에 제재를 가할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어, 동참국은 더 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과 인도, 한국이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줄이며 유가는 더 오를 수 있다. 이란의 원유 수출 국가 비중은 중국이 22%로 가장 높고, EU(유럽연합) 18%, 일본 14%, 인도 13%, 한국 10% 순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양자 협의에서 이란산 원유 수입을 15~20% 감축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심각한 시나리오는 미국과 이란 갈등이 극에 달해 이란이 실제로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경우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이 경우 단기적으로 국제유가는 150~180달러까지 폭등하고, 연평균 135달러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IMF는 4월 17일 ‘세계경제전망(WEO) 보고서’를 통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에 대한 이란의 석유 수출이 중단되고 다른 대체공급원이 없을 경우 국제유가는 20~30% 급등할 수 있으며 이는 전 세계 경제를 엄청난 불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월 7일 유가 전망을 주제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도 배석한 일부 민간 연구기관장들이 이스라엘의 대이란 공격 등 전쟁상황이 발생하면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80~200달러로 치솟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이란 변수가 아니더라도 향후 국제유가가 내려갈 요인보다는 올라갈 이유가 더 많다. 일단, 최근 국제유가가 왜 이렇게 올랐는지 살펴봐야 한다. 리비아 사태로 지난해 4월 배럴당 120달러(브렌트유 기준)를 넘었던 국제 유가는 유럽 재정위기가 확산하면서 오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이 핵폭탄을 개발해 왔다고 발표하면서 유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즉각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조치를 발표했고, 이란은 중동 주요 산유국의 원유 이동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경고하면서 2월 들어 국제유가가 일제히 급등했다. 하지만 이란 사태 이전에도 이미 국제유가가 오를만한 이유는 충분했다는 주장도 있다. 공급이 수요를 겨우 받치는 타이트한 수급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국제유가 450일 가까이 100달러 웃돌아한국금융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수단, 예멘, 시리아 등 중동·아프리카 지역 산유국이 지난해부터 생산 차질을 빚으면서 공급 측면의 가격상승 압력이 작용했다. 내전으로 원유 생산시설이 크게 파손된 리비아도 내전이 끝난 후 원유 생산과 수출이 회복되고 있지만 내전 이전 수준에는 못 미치는 상황이다.

또한 지난해 2~3분기 콜롬비아 시위, 중국 보하이만 원유 유출, 캐나다 호라이즌 유전 화재, 노르웨이·영국·말레이시아 유전 생산 차질 등 비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 등에서도 예상치 못 한 생산 중단이 이어지면서 수급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세계 1위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OPEC 회원국의 증산 여력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불안감을 키웠다. 골드먼삭스에 따르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생산량은 지난 30년 이래 최고 수준이고, 추가 생산여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석유 재고 역시 최근 5년 평균 수준을 밑돌고 있어, 시장의 공급 충격을 완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또한 중국의 원유 수요가 예상과 달리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세계 원유수급에 악영향을 미쳤다. 2011년 중국 원유 수입량은 전년 대비 6% 증가했다. 다시 말해 최근 유가 충격은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란 사태가 기폭제가 돼 발생한 것이다.

고유가 기조가 전례 없이 장기화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가격이 배럴당 146달러까지 치솟았던 2008년 초만 해도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초과한 기간은 147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2011년 2월 초 이후 단 한 차례(2011년 10월 4일)를 제외하고는 450여 일 가까이 100달러 이하로 내려온 적이 없다.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하면, 2008년 상반기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평균 104달러였지만, 올 1~3월 평균은 116달러에 달한다.

관심은 최근 한풀 꺾인 국제유가 흐름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에 쏠린다. 분석과 전망은 엇갈린다. 낙관론을 펴는 쪽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실제 군사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을 작게 본다. 한국은행은 최근 펴낸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중동지역에서의 긴장 고조를 선진국과 이란 모두 기피하고 있어 앞으로 추가적인 유가 상승폭은 제한적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란을 둘러싼 최근 국제 정치 상황은 일촉즉발이다. 4월 14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과 독일(P5+1)이 이란과 핵 협상을 벌인 직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란이 차기 협상까지 5주간 아무 제약 없이 우라늄을 농축할 시간을 벌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17일에는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란과 핵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은 선택 가능한 방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같은 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외국의 개입은 파괴, 갈등, 불안만 불러올 것”이라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 메지시를 남겼다. 이란 핵 2차 협상은 5월 2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열릴 예정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미국과 이란 또는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터지면 유가 폭등은 불가피하다. 국제문제 컨설팅기관인 옥스퍼드 애널리티카는 “이란 전쟁 발발시 전세계 원유 공급의 20%가 차질을 빚어 배럴당 200달러까지 폭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이때 유가 폭등은 단기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1991년 걸프전쟁이나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전쟁 발발 전에는 긴장감 고조로 유가가 폭등했다가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불확실성 해소와 단기간 내 종전으로 유가가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란 사태 외에도 국제유가가 초강세 국면을 오래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최근 유가 상승이 반짝 급등이 아니라, 장기적 추세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정석 국제금융센터 연구분석실 부장은 “현 상승세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장기 상승국면의 한 부분”이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가 상승세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90년대 연평균 10~20 달러 사이였던 국제유가는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해 2008년 7월 140달러를 넘으며 사상최고가를 기록했다. 이후, 유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같은 해 12월 30달러대로 폭락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변동성은 이후 경기회복에 따라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2011년 2월 100달러를 돌파한 후 줄곧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원유 수급 타이트한 상황 지속될 것국제 유가를 올리는 가장 큰 원인은 신흥국이다. 일반적으로 원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고 공급이 늘어 가격이 떨어져야 하는데, 신흥국이 가격 상승과 상관없이 세계 원유를 빨아들이면서 이런 구조가 깨졌다는 것이다. 미국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중국의 원유 수요는 2000년 하루 480만 배럴에서 지난해에는 983만 배럴로 증가해 세계 2위 수요국으로 올라섰다. 같은 기간 인도, 중동, 브라질, 러시아 등도 원유 수요가 20~50%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장기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말 내놓은 ‘2011 세계에너지전망’ 보고서에서 신흥국의 자동차 보급 확대, 승객 및 화물수송 수요 증가 등 수송용 석유 수요가 급증하면서 2035년까지 석유 수요가 13.8%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OPEC은 2010년 하루 3590만 배럴이던 신흥국 원유수요가 2015년에는 4180만 배럴, 2025년에는 5220만 배럴, 2035년에는 6190만 배럴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전 세계 수요 역시 2010년 하루 8680만 배럴에서 2035년에는 1억970만 배럴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EIA 역시 2035년 신흥국 수요가 최대 7000만 배럴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원유 생산은 수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세계 원유 생산은 2000년 하루 7800만 배럴에서 2011년 8700만 배럴로 12% 늘었다. 같은 기간 수요 증가율 15%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국제금융센터 오정석 부장은 “1990년대 저유가 지속으로 생산부문에 대한 석유기업들의 투자가 부진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 계획이 대거 취소되거나 연기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OPEC에 따르면, 2010년 하루 8640만 배럴(OPEC 회원국 3410만 배럴, 비OPEC 5230만 배럴)이던 원유 생산량은 2020년 9800만 배럴, 2035년에는 1억990만 배럴로 늘어날 전망이다. 원유 수요 전망과 비교할 때 타이트한 수급 상황이 이어지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가격이 크게 출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IEA는 2008년 말 세계에너지전망 보고서에서 “값싼 석유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IEA는 2008~2015년 국제유가를 배럴당 100달러 이상, 2030년에는 2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투기자금이 원유시장으로 빠르게 유입되고 있는 것도 불안 요인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뉴욕상업거래소 원유선물 순매수포지션은 최근 두달 간 50%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는 기관투자가들의 원유·원자재 자산운용규모가 2005년 750억 달러에서 지난해에는 4000억 달러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했다. 세계 저금리 기조 속에 1~2차 양적완화로 풀린 유동성이 원유시장으로 유입되면서 국제유가를 올리는 원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초 골드먼삭스는 투기적 수요로 인해 WTI 1배럴에 약 27달러의 거품이 끼어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EFTC)는 헤지펀드와 기타 기관 투자가들이 미국 원유시장에 베팅한 규모가 2억7000만 배럴에 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이치뱅크는 최근 적정유가를 산출한 결과 현재 가격에 배럴당 20~30달러의 프리미엄이 끼어 있다고 진단했다.

박재완 기재부 장관이 4월 18일 라가르드 IMF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유가 급등이 세계 경제의 새로운 위험 요인으로 떠올랐고 특히 원유수입국에 큰 위협이 된다”며 “국제 상품 시장에 투기자금이 유입돼 유가가 오르는 상황을 우려한다”고 말한 배경이다. 이에 대해 라가르드 총재는 “유가 관련 파생상품 규제 등 국제공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가 137달러면 경상수지 적자 전환하지만 국제 투기자금을 제한하는 국제 공조가 원만히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우디, 브릭스(BRICs), 프랑스, 이태리 등은 금융 요인에 의해 유가가 비정상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반면, 미국과 영국 등 파생상품시장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투자자본과 유가 간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시장에서는 유럽 국가채무 위기가 진정돼 안전자산 선호현상이 완화되고, 미국이 3차 양적완화에 나설 경우 투기자금의 원유시장 유입이 더 늘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화되는 고유가 시대에 한국 경제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4월 18일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제유가 상승이 한국 경제의 성장과 인플레이션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라고 밝혔다. 박재완 기재부 장관은 4월 16일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조찬강연에서 “국제유가가 최근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지난해 말 전망보다 훨씬 높은 초강세 국면”이라며 “두바이유가 배럴당 10달러 오르면 무역수지가 70억 달러 악화돼 환율을 통해 물가를 올릴 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원가를 높이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무역액 대비 원유 순수입 비중은 6.7%로 아시아 주요국가 중 네 번째로 크다. GDP 대비로는 6.4%에 이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10% 오르면 GDP는 0.2%포인트 내려간다. 또한 제조업 생산비용은 1.1%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제유가 10% 오르면 소비자물가는 0.12%포인트 오르고 민간소비는 0.12%포인트, 총투자는 0.87%포인트 떨어진다고 밝혔다. 또한 경상수지는 20억 달러 악화하고 GDP는 0.21%포인트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모건스탠리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상승하면,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최대 0.9%포인트 악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도이치뱅크는 우리나라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137달러로 분석했다.

특히 경기불황 때 유가 폭등이 오면 한국경제가 받는 충격은 호황 때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금융센터 김권식 연구위원이 지난해 발표한 ‘국제유가 충격이 경기불황을 심화시키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면, 1980년 대 이후 열 번의 불황기 중 적어도 여섯 번은 국제 유가 상승 충격에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1990년대 초반, 1996~1997년 초반, 2000년 초반, 2006년 초반, 2008년 초반이다.

김 연구위원은 “국제유가 충격은 호황, 불황과 관계없이 우리나라 경기를 위축시키는 데, 특히 불황기 때 받는 충격이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국제유가가 연평균 135달러가 되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에 그치고 물가상승률은 4.3% 이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부랴부랴 고유가 대책을 내놓고 국제공조를 강조하고 있지만, 기름값을 잡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유가 오름세가 진정된다고 하더라도, 값싼 석유 시대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고유가 시대 장기화는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결국 정부가 극구 피하고 싶어하는 유류세 인하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정부는 국제유가가 130달러 이상 5거래일 넘게 지속되면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는 등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가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태윤 이코노미스트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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