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구학서 신세계그룹 회장
대기업 말로만 윤리경영 그래서 욕 먹는다
[interview] 구학서 신세계그룹 회장
대기업 말로만 윤리경영 그래서 욕 먹는다
매출 2조2684억원→16조2132억원, 순이익 222억원→6780억원, 총자산 2조2390억원→14조3419억원. 신세계(이마트 포함)의 1999년과 2011년의 경영 성적표 비교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를 비롯한 숱한 위기 속에서도 신세계는 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 신세계 대표이사에 오른 후 회사의 성장을 이끈 구학서(66) 신세계그룹 회장은 “50% 이상이 윤리경영 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윤리경영이 곧 글로벌 경쟁력이고 가장 윤리적인 것이 가장 강하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경영이란 도대체 뭘까. 과연 효과가 있는 걸까. 나라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사회공헌에도 힘을 쏟는 재계, 특히 대기업을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건 왜 그럴까. 신세계그룹 본사에서 4월 24일에 그를 만났다.
삼성그룹 공채 13기인 구학서 회장은 1972년 삼성전자 경리과에서 사회 첫 발을 디뎠다. 부푼 꿈을 품고 들어간 직장이지만 회사 생활은 감추고 싶은 ‘불편한 진실’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월급에서 세금을 제대로 떼지 않았다. 구 회장이 세무 담당일 때는 세무서 직원을 접대하는 게 일이었다. 당시 삼성의 생활수칙 1호는 ‘자기 몫은 자기가 낸다’였지만 밥 먹을 때조차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구 회장은 1982년 삼성물산의 도쿄지사 관리부장으로 일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세무조사를 나온 일본 국세청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락을 싸왔다. 그들은 식사는커녕 커피나 과일도 거절했다. 엽차만 갖다 달라고 했다. 외국 기업이라 빡빡하게 군다고 생각한 구 회장은 ‘밥이나 술을 빨리 사야 할 텐데’ ‘돈봉투는 언제 전할까’라고 생각하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고 일을 마쳤다.
직장 초년병 시절 겪은 ‘불편한 진실’ 가슴에 담아구 회장에겐 점심값을 각자 내던 일본인의 모습도 낯설었다. 자기 몫을 정확히 계산하느라 주머니에 계산기까지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곤 ‘좀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어색한 문화가 익숙해졌다. 각자 먹은 만큼 내는 게 합리적일뿐더러 나중엔 더 편하게 느껴졌다.
1986년 다시 한국에 들어온 그는 어느 날 회사 선배의 골프 초청을 받았다. 구 회장은 골프장에 도착해 프런트에서 일본에서 그랬듯 자기 몫의 그린피를 냈다. 라운딩이 끝나고 이 사실을 안 구 회장의 선배는 화를 냈다. 자신이 불렀는데 왜 돈을 냈느냐는 얘기였다. ‘더치 페이’가 몸에 익은 구 회장은 ‘아, 다시 한국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극단을 경험한 구 회장은 ‘언젠가 칼자루를 쥐면 꼭 윤리경영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기회는 왔다. 1996년 신세계에 영입된 그는 1999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그는 국내 기업 최초로 기업윤리 전담조직을 만들고 윤리경영을 선포했다.
예컨대 ‘신세계 페이’를 도입했다. 협력업체 사람 등과 식사를 할 때 회사 영업비로 밥값을 내도록 만든 제도다. 신세계 페이 시행 첫해에 비용이 줄어들었다. 접대비·회의비 등의 명목으로 개인적으로 쓴 비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구 회장은 남은 비용을 신세계 페이 장려금 명목으로 모든 직원에게 똑같이 지급했다. 애초 신세계의 기업문화와 접대 받는 관행을 바꾸는 게 이 제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신세계 페이가 회사에 이익이 되는 제도구나’ 하고 직원들이 느끼는 계기도 됐다.
구 회장은 윤리경영은 고객·주주·직원은 물론 사회와 나라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윤리경영을 3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투명경영→상생경영→사회공헌경영이다. 투명경영은 준법경영과 맞닿아 있다. 꾸준히 이익을 내고 인사관리를 공정하게 해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경영을 하는 것도 이 단계에 속한다. 상생경영은 고객·직원·주주·협력업체 같은 이해관계자와 윈윈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익을 직원·주주와 나눌 때나 협력업체와 거래할 때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공헌경영은 사회·국가·인류처럼 기업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집단 또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윤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1단계는 1단계대로 하면서 2단계, 3단계로 점차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동심원을 넓혀 나가듯 단계별로 서로 오버랩 되도록 진행하라는 것이다.
윤리경영의 절대 필요조건은 공감대 형성그는 특히 “윤리경영의 절대적인 필요조건은 공감대 형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경영진의 솔선수범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기업이나 재벌이 욕을 먹는 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재산을 물려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이명희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법과 원칙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이자”고 건의했다.
2006년 5월 중국 상하이. 이마트 산린점 개점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사장이었던 구 회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의 세금을 내고 경영권을 승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대기업 2~3세의 편법 증여 의혹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어서 재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 이명희 회장 부부가 갖고 있던 신세계 지분(23%)은 시가로 1조9800억원. 재산을 물려주는데 드는 세금만 당시 기준으로 1조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구 회장의 말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재계 일각에선 재원 마련 방법과 경영권 방어 문제를 내세워 ‘대의(大義)’를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해 9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부친인 정재은 명예회장으로부터 신세계 주식 147만주(지분 7.82%)를 증여 받았다. 이듬해인 2007년 3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증여 받은 주식에 대해 당시 시가로 3500억원에 이르는 주식을 현물로 납세했다. 국내 대기업의 상속·증여세 납세 기록 중 최대 규모였다. 구 회장은 당시 상하이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재계에서 있었던) 상속(또는 증여)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불법 상속(또는 증여)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구 회장은 “윤리경영을 당장의 손익과 결부시켜 바라봐선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숫자로 계산하긴 어렵지만 윤리경영은 단기적으로 손해처럼 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론 이익이라고 여긴다. 특히 윤리경영의 2단계인 상생경영의 이해관계자인 직원과 관계 정립 때 이런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신세계그룹은 ‘직원은 내부 고객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고객 제일주의를 실현하는 밑바탕인 직원들이 회사에 대해 감동하고 사기가 올라야 한다고 여겨서다. 구 회장은 2007년 8월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의 비정규직 5000여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현재 이마트 직원 1만2600명, 신세계백화점 직원 3000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한 명도 없다. 이런 과정에서 신세계그룹이 5년간 더 부담한 비용은 800억원. 그러나 고용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신세계그룹은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에게도 연봉제를 실시했다. 상여금·성과급도 정규직과 동일하게 정률제로 지급하면서 5년 새 이들의 임금이 평균 30% 넘게 올랐다. 직계가족의 의료비뿐만 아니라 경조사비와 학자금도 지원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한 캐셔 사원은 갑상선암을 앓아왔지만 2010년 930만원에 이르는 사내 의료비 지원 덕택에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다. 신세계백화점 영등포점의 한 캐셔 직원은 배우자가 직장암을 앓았으나 회사에서 치료비 860만원 전액을 지원했다.
이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되면서 2006년 14.2%이던 캐셔직군 퇴직률은 2011년 8.3%로 뚝 떨어졌다. 업무 숙련도는 크게 올라 이마트에서 점포당 계산 오류 건수는 5년 새 75% 감소했다. 제품 바코드를 찍는 속도는 시간당 220번에서 265번으로 20.5% 빨라졌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으면서 직원들이 더욱 친절해졌다. 이마트에서 점포당 캐셔 부문 불만 건수는 2006년 13.3건에서 지난해 4.6건으로 줄었다. 반면 만족 의견 접수 건수는 0.88건에서 1.47건으로 늘었다. 캐셔 사원들의 근무 만족도가 높아지면서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의 상시 채용 평균 경쟁률은 7대 1에 이르고 있다. 유통업계 경쟁사의 곱절 수준이다.
퇴직 임직원 자녀에게 10년간 학자금을 지원하는 제도 역시 화제가 됐다. 신세계그룹은 2011년 4월부터 재계 최초로 임직원이 퇴직하고 나서도 10년간 자녀의 학자금을 모두 지원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당시 신세계그룹은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 되면서 임직원들이 퇴직 후 노후 대책을 많이 생각하는데 그중 자녀 학자금 걱정이 으뜸”이라며 제도를 도입했다. 학자금 지원 금액은 기존 임직원과 동일해 자녀가 대학생이면 연간 1000만원까지 입학금과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을 수 있다. 지원 대상은 15년 이상 근속한 임원과 20년 이상 근무한 부장급 직원으로 2011년 4월에는 2002년 이후 퇴직한 임직원에 대해서도 소급지원 해서 68명이 혜택을 받았다. 구 회장은 “당장 돈 들어가는 것만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반값 등록금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더 많은 기업이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기업의 경쟁력이 세지고 사회 전체의 이익도 커질 텐데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되물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 더욱 기뻐야구 회장은 당장 예전보다 나은 신입사원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채용면접을 할 때 왜 신세계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절반 가까이가 신세계의 윤리경영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중 일부는 어쩌면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느라 그렇게 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예전과는 다른 변화다. 구 회장은 “누구나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윤리의식이 높은 양질의 사람이 들어오면 전체 직원의 윤리적인 마인드가 강해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아버지가 평생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타이른 말을 가슴에 늘 담아왔다. 그의 노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이와 더불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벤저민 플랭클린의 『덕의 기술』이다.
구 회장은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때만 행복하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게 세상에 있을까’라는 대목을 감명 깊게 읽었다. “경영의 모든 결정은 업의 컨셉트를 철저히 지키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하며, 투입되는 비용보다 창출되는 가치가 반드시 커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윤리경영에서도 분명히 먹혀 들었다.
남승률 이코노미스트 기자 namoh@joongang.co.kr
사진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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