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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er at large] 인권운동가의 겸손한 희망

[reporter at large] 인권운동가의 겸손한 희망

오랫동안 가택연금 생활을 해오던 중국의 시각장애인 인권운동가 천광청(陳光誠)은 얼마전 탈출을 감행했다. 내 오랜 친구이기도 한 그가 내게 탈출 과정을 설명했을 때 난 이런 농담을 했다. “시각장애가 당신의 비밀무기였네요(Blindness was your secret weapon).” 한살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그는 달빛이 비치지 않는 밤을 탈출 시점으로 택했다. 그에겐 어둠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여성과 장애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서는 천은 산둥(山東)성 린이(臨沂)현 둥스구(東師古)촌에서 1년 반 이상을 법적인 근거도 없이 가택연금 상태로(under extralegal house arrest) 지내왔다. 그리고 그 이전 몇 년 동안은 감옥살이를 했다. 천과 그의 부인이 집에서 나가거나 바깥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면 공안원들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들을 방문하려는 사람들 또한 폭행당했다.

지난 4월 22일 밤 11시쯤 감시원들이 잠들자 천은 집의 담을 타고 기어올라갔다. 하지만 역시 감시원들이 지키고 있던 옆집 마당으로 떨어져 탈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던(With nowhere to run) 그는 이웃 사람이 무거운 마당 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이웃집 지붕 위로 기어올라갔다. 이웃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천은 다시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와 자유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started his mad dash to freedom).

탈출의 여정은 정말 험난했다(It was a grueling flight). 그다음 19시간 동안 천은 감시원 수십 명의 눈을 피해가며 여러 개의 담을 더 넘었다. 수없이 바닥에 넘어지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오른쪽 발 뼈가 세 군데나 부러졌다. 그 후 탈출 여정은 한층 더 힘겨워졌다. 천은 며칠 후 병원 침상에서 나와 통화하던 중 “(당시)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일어서거나 걸을 수가 없어서 무릎으로 기었다.” 돌투성이 땅바닥을 몸부림치듯 기어서 움직이던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lost track of time).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있었다(froze in place). 아무도 자신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 때만 몸을 움직였다. “바람이 불거나 감시원이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리 약속했던 장소에 도착한(Reaching an agreed-upon rendezvous) 천은 난징(南京) 출신의 인권운동가 허페이룽(何培蓉)을 만났다. ‘펄(Pearl)’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이 젊은 여교사는 택배원으로 위장해 경계가 삼엄한 그 마을에 들어왔다. 이전에 그녀는 가택연금 중인 천과 그의 부인을 만나려다가 폭력배 같은 감시원들에게 매를 맞고 돈을 털렸다. 그리고 지금은 천을 자신의 트럭에 태워 480km 떨어진 베이징까지 데려갈 구출요원(rescuer)으로 그곳에 왔다(서방의 한 운동가와 함께 천의 트레이드마크인 조종사용 선글라스를 인권의 상징으로 만든 허는 나중에 당국에 체포돼 며칠 동안 구금됐다 풀려났다). 베이징에 도착한 천은 친구들, 그리고 동료 운동가들과 함께 숨어 있다가 주중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는 이 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unwittingly) 미·중 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위기를 촉발했다.

난 2001년 ‘맨발의 변호사들(barefoot lawyers, 당시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떠오르던 중국의 독학 변호사들)’에 관한 뉴스위크 기사를 쓰면서 천을 처음 만났다. 우리의 우정은 뜻밖의 장소(베이징의 스타벅스 매장)에서 시작됐다. 천은 카페라테를 마시는 여피족들 사이에서 자신이 사는 작은 마을의 제지공장이 강물을 오염시켜 물고기와 거북이들이 죽고, 마을 어린이들이 발진을 일으킨 이야기를 들려줬다. 천은 마을 주민 36명이 베이징으로 가서 중앙정부에 탄원서(petition)를 올리도록 도왔다. 제지공장의 뒤를 봐주는 지방 관리들(local cadres)의 징계(discipline)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우리가 베이징에 오는 걸 원치 않았다”고 천은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승리했다. 제지공장이 생산을 중단했다.

천이 주중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89년 중국 반체제 천체물리학자 팡리지(方勵之)의 망명 당시가 떠올랐다. 톈안먼 사태 이후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한 팡은 13개월의 협상 과정을 거쳐 서방으로 떠났다(지난 4월 6일 세상을 떠난 팡은 여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당시 경제력이 약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돼 있던 중국에 미국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하지만 현재 미국 정부 관리들은 그때보다 자신감이 커진 중국 정권을 상대해야 한다. 어쨌든 천의 미국 대사관 피신은 중국과 미국 양측 모두에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미·중 고위급회담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었고, 양국 외교관들은 타결점을 찾으려고 밤낮없이(around the clock) 협상을 계속했다.

6일간의 집중적인 협상 끝에 마침내 합의가 이뤄졌다. 천과 그의 가족은 중국에 남되 해안 도시 톈진(天津)으로 이주해 천이 원한다면 그곳에서 법률 공부를 할 수 있고(내가 알기로는 그가 늘 꿈꾸던 일이다), 당국은 그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천은 휠체어에 탄 채 미소 띤 얼굴로 대사관에서 나왔다. 사진 기자들은 천이 커트 캠벨 미 국무부 차관보와 포옹하고 게리 로크 주중 미 대사와 손잡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고위급회담을 위해 막 베이징에 도착한 클린턴은 이 합의가 “천의 선택과 미국의 가치관(his choices and our values)”을 반영한 결과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천은 내게 나중에 일이 이상하게 꼬이면서(things started to unravel) “대사관측으로부터 내가 그곳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미국의 한 고위관리는 어떤 압력도 행사한 적이 없으며 미국 측은 천이 미 대사관에 ‘장기체류(long-term occupancy)’하게 될 경우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스탈린 시대에 부다페스트 주재 미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해 그곳에서 15년 동안 체류했던 헝가리 정치범 요제프 민드센티 추기경 등의 전례를 논의했다고 했다.]

천은 의학적 처치(medical treatment)를 위해 옮겨진 베이징의 병원에서 부인 위안웨이징(袁偉靜)과 두 자녀(10세의 천커뢰이와 6세의 천커스)를 다시 만났다. 하지만 동네 폭력배들이 그의 부인을 이틀 동안 의자에 묶어놓고 심문하면서 천이 미 대사관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녀를 때려죽이겠다고 협백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재회의 기쁨도 사라졌다. 천은 또 자신이 탈출한 뒤 친척과 지지자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앞서 중국에 남아 있겠다고 분명히 말했다(expressly said). 하지만 병원으로 옮겨진 뒤 미국 관리들이 가버리고 연락도 안 되자 가족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 자신이 중국을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가족과 함께 힐러리 클린턴이 탑승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그는 말했다. 정치적 망명(political asylum)이라는 말은 애써 피했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다. 그리고 좀 쉬고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게 대담한 탈출을 감행한 사람으로서는 겸손한 희망(a humble wish)이었다.

산둥성의 성도 지난(濟南)에서 160km나 떨어진 시골 마을 둥스구에서 태어난 천은 침술사(acupuncturist)와 안마사(masseur)가 되는 훈련을 받은 뒤 독학으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4세가 되던 1996년 베이징으로 가서 중앙정부 당국에 장애인은 법적으로 세금을 면제받도록 돼 있는데도 자신의 가족은 부당하게 세금을 부과받는다고 호소했다. 그의 가족은 결국 세금을 환급받았고(received a tax refund) 곧 다른 장애인 농부들이 천에게 법적 조언을 구하려고 모여들었다.

1990년대 말 천은 독학으로 법률을 배운 농부들(소위 ‘맨발의 변호사들’)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해 폭력적인 지방 관리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1997년에는 다른 시각장애인 농부 류나이탕(61)이 자신의 장애를 근거로 법원에 면세 지위(tax-exempt status)를 신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 당서기는 마을의 확성기를 통해 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류나이탕, 이 쩨쩨한 장님아(you stingy blind man)”라고 시작되는 그의 비난 방송은 거의 한달 동안 계속됐다. “당신네 장애인들은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데 왜 우리가 특혜를 베풀어야 하지?” 천의 가족은 류에게 그가 어떤 권리를 지녔는지 조언했고 세금을 면제받도록 도움을 줬다.]

제지공장을 상대로 한 환경 투쟁 이후 천은 서방의 언론, 외교관, 비정부기구(NGO)들과 접촉해 마을 주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을 펼쳤다. 주중 영국 대사관이 180m 깊이의 새 우물을 파는 자금을 대는 데 동의하자 천은 작은 마을 둥스구가 이뤄낸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그곳은 워낙 오지라 TV 전파 수신도 잘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비가 오면 TV가 안 나온다”).

내가 천을 만났을 때 그는 반체제 인사로 보이지 않았다(그가 반체제 인사가 된 건 나중 일이다). 그런데도 당국은 이미 그가 외국인들과 접촉하는 걸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2001년 8월 우리가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영국 대사관과 함께하는 장애인 돕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1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천은 “영국 대사관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뒤” 자신이 중국 공안원들에게 조사를 받았다고 조용히 내게 털어놨다. “그들은 내게 ‘그들과 어떻게 접촉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몇 년 뒤 천이 다시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는 내게 누군가 자신에게 읽어준 안후이성(安徽省) 농촌 지역의 분쟁에 관한 중국 책 한 권을 읽으라고 요청했다. “그곳 공안원들은 몽둥이로 주민들을 때리고 나서 ‘내가 당신을 때렸느냐?’고 물었다. 한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공안원들이 그를 때려죽였다”고 천은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운동가였다.” 천은 그 책을 읽고 나서 직접 책(중국 농촌의 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원고 내용을 작은 녹음기에 녹음하거나 자신의 동생에게 불러주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컴퓨터가 필요한데 한 대 빌려줄 수 있느냐?”고 그가 내게 물었다. 난 자선단체에 기부하려던 낡은 컴퓨터 한 대를 천에게 주었다. 그와 헤어지면서 컴퓨터의 부피와 무게가 걱정된 나는 “들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천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smiled and waved me away).

2005년 천은 다른 운동을 시작했다. 이번엔 산둥성 린이현 당국의 가족계획 운동에 반대하고 나섰다. 당국은 정부의 한자녀 정책에 발맞춰 주민들에게 낙태와 불임시술(abortions and sterilizations)을 강요했다. 중국법에는 그런 잔인한 조치가 금지돼 있지만 수많은 농촌 여성이 임신 말기에도 낙태를 강요당했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구금돼 고문을 당했다. 천은 이런 폭력을 널리 알리는 운동을 시작하고 피해자들을 대신해 집단소송(a class-action lawsuit)을 제기했다. 린이현 당국은 천이 “반(反)중국” 세력과 결탁했다고 비난했다. 이듬해 천은 ‘기물파손(damaging property)과 군중동원(organizing a mob)을 통한 교통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천의 변호사들은 재판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그는 감옥에서 4년 이상을 보냈다. 2010년 9월 석방됐을 때 그는 당국이 자신의 농가를 또 다른 종류의 감옥으로 만들어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속 시트로 유리창을 가렸고 감시원들이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차단했다. 인권단체들이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천과 그의 부인은 감시원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다. 이런 가혹한 대우는 당국의 보복 의지를 나타낸다고 천은 말했다.

천은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다. 그의 부인과 아이들까지 그의 어둠을 나눠가진(sharing his darkness) 셈이다. 그래서 그는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천은 병이 난 척하며(Feigning illness) 몇 주일 동안 자리에 누워 지냈다. 그가 탈출을 감행할 때쯤엔 감시원들이 그의 몸이 쇠약해져 움직일 기력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천은 친구들과 동료 운동가 후자(胡佳), 그리고 그의 부인 정진옌(曾金燕)에게 연락했다. 유럽의 의원들과 화상회의를 하던 도중 중국의 인권 기록을 비난한 혐의로 3년 동안 감옥 살이를 한 후는 도망자 천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의 부인 정이 트위터에 올린 글에 따르면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들 부부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천은 또 반체제 미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의 친구들도 만났다. 아이웨이웨이는 지난해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베이징을 떠나는 것이 금지됐다. 아이웨이웨이는 천과 만난 적이 없지만 내가 그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자신의 상황이 천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우리 두 사람 다 자신이 한 활동 때문에 박해받았다(suffered persecution due to our work)”고 아이웨이웨이는 말했다. 그의 전화가 도청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그는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최선의 해결책이 뭘까?”라고 그는 물었다. “우리 같은 상황에서는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한 대다수가 중국에 남아서 중국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싶어한다. ... 하지만 천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미국 관리들이 6일간의 협상 끝에 천을 대사관 밖으로 데리고 나왔을 때 그는 미국인들이 병원에서 자신과 함께 있어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병실로 옮겨지고 나서 그들은 모두 가버렸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이 흘러(Hours ticked by) 저녁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다. 천과 위안, 그리고 어린 두 자녀는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병원 직원에게 음식을 달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지만 가져다주지 않았다.” 천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 대사관 관리들에게 서너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고립됐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부인이 받았던 가혹한 대우(harsh treatment), 그리고 최근 자신의 집 주변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전기 울타리(electrified fencing)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천은 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미 대사관에 내 말을 꼭 전해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12시간 뒤 천은 내게 다시 전화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난 여전히 중국을 떠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전보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날 아침 로버트 왕 미국 대사대리가 병원에 다녀갔다. 천과 대화를 나누는 건 허용되지 않았지만 병원 밖에 주차된 대사관 차량에 탑승한 그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천은 외부와 연락이 어렵다는 점을 염려했다. 그는 “외부와 전화 통화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말했다. “내 전화기가 고장났거나 통화가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받는 듯하다.” 그는 새 휴대전화기를 구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미 대사관 측은 중국 당국이 전파방해(to jam his signal)를 시도할 경우를 우려해 천에게 4대의 휴대전화기를 주었다. 그러나 병원 밖에 있던 한 대사관 직원이 천과 두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에 따르면 그 다음엔 아예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천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중국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뒤 그의 목소리는 미 의사당 안에 크고 분명하게 울렸다. 중국 위기에 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는 레이번 의원회관에서 차이나 에이드(미국에 본부를 둔 기독교 비영리단체)의 봅 푸 대표가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마이크에 갖다댔다. 천은 자신의 병상에서 미국 의원들을 향해 직접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말했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쉬지도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 직후 난 천의 부인 위안과 통화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낙관적으로 들렸다. 중국 정부가 천이 법률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을 허락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위안에게 천이 학생 비자를 신청할 예정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으로 와서 이야기해요. 이 전화기로 통화하는 건 안전하지 않아요. 새 휴대전화기를 한 대 구해주세요. 전화 걸 데가 많아요.”

[With DANIEL KLAIDMAN in New York and ELI LAKE in Washington, D.C.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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