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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독한 노사관계로 장기 불황 뚫는다

돈독한 노사관계로 장기 불황 뚫는다



7월 26일 서울 계동 현대중공업 본사에서 만난 민병권(58) 부장의 표정은 폭염에도 밝았다. 7월에 정년연장 대상자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노사가 올해 임금단체협상을 타결하면서 임직원 정년을 기존 만58세에서 60세로 2년 연장하는 데 합의한 덕이다. 민 부장은 “세계적으로 조선업종의 불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동료들도 사측의 배려에 한층 고무돼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현대중공업의 정년연장 대상자는총 900여명. 전체 임직원 수가 2만5000여명인 것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수다. 사내 분위기도 그만큼 좋을 수밖에 없다.



임금단체협상 무분규 타결7월 19일 현대중공업 노사가 2년 정년연장에 합의한 데 이어 대우조선해양도 7월 27일 만 58세에서 60세로 정년을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현대중공업은 18년째, 대우조선해양은 22년째 연속으로 임금단체협상에서 무분규 기록을 세웠다. 현대중공업은 조선업계 최초로 ‘개인별 선택 정년제’를 채택했다. 만 59세부터 2년간 본인 희망에 따라 정년이 연장된다. 59세는 임금의 60~90%를 받고 60세는 50~80%를 받는 임금피크제다.

대우조선해양에서는 만 59세까지 100%임금을 받을 수 있고 60세엔 80%를 받는다.국내 조선업계 2위 삼성중공업은 노동자협의회와 사측이 아직 임금단체협상을 마무리하지 않아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노사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세부 내용을 조율하고 있으며 분위기도 괜찮다는 전언이다.

장기 불황으로 울상을 짓던 조선업계가 최근 잇단 임금단체협상 무분규 타결로 고무된 모습이다. 요즘 국내 조선업계는 이들 빅3의 노사 화합 움직임이 불황을 극복하는 기폭제가 될 지 주목하고 있다.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우리나라의 7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조선업종은 침체의 골이 깊다. 7월 한달간 선박 수출액이 21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49억 달러) 대비 57.5%나 감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로존 재정위기까지 이어져 수주 부진에 따른 실적 악화가 계속됐다. 현대중공업의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은 585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3.1%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기간대우조선해양의 영업이익도 47.5% 감소한162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세계 조선업황이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닌데 왜 정년연장 카드가 나왔을까. 과연 강성 노조의 승리일까. 이에 대해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정년연장이야말로 노사가 모두 만족하는 윈-윈(Win-win)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고령화 사회 도래와 업계 불황으로 고용불안을 걱정하는 근로자들로선 안정감을 갖고 업무에 매진하는 계기가 된다.

아울러 회사도 숙련된 인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장기적 관점에서 이득이라는 것이다.정년 대상자가 오랜 기간 축적한 전문성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무형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예를 보자. 1990년대까지도 글로벌 조선업계에서 최강국의 자리를 지킨 일본이 한국에 밀린 데는 대규모 해고(구조조정)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석제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본이 조선업 1위를 빼앗긴 원인은 인건비 비교 열세가 아닌 설계인력 해고에 있다”고 지적했다.

1973년 석유파동 당시 선박 수요가 70%이상 감소하자 일본 조선업체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타깃은 바로 설계인력. 벌크선과 탱커선 등의 표준 설계가 완성된 시점에서 새로운 선형에 대한 수요가 없었고, 당시 독보적 1위인 일본에 대항할 경쟁상대도 없다는 자만심이 작용했다. 고용상황이 나빠지자 젊은 고급 인력은 자연스레 조선업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일본 조선업계는 만성적인 설계인력 부족과 경쟁력 약화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도 들어 LNG선이나 컨테이너선 등 선형의 다양화가 이뤄지자 우려는 현실이 됐다. 반대로 한국은 일본에 비해 5~10배 많은 설계인력을 보유한 이점을 살려 일본을 누르고 앞서나갈 수 있었다. 이석제 애널리스트는 “그때 일본 조선업체들이 섣불리 설계인력을 해고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일본이 세계 조선시장을 장악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면서 “국내 조선업체들이 2~3년간 극심한 불황에도 설계인력을 해고하지 않은 건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빅3 조선업체들도 경험을 통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골리앗농성’ 등 대규모 노사분규를 겪은 이후 글로벌 리더로 도약하려면 노사 신뢰를 형성하는 게 선결 과제라고 여겼다. 김광욱 현대중공업 부장은 “노사 평화가 우리 조선업계 경쟁력의 한 축이라는 인식이 확고하다”며 “사람 관리도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조선업체들이 선박 계약을 체결할 때 갖추는 문서상의 ‘불가항력 조항’을 예로 들었다. 업계에서 통용하는 불가항력조항에는 ‘태풍 등 천재지변으로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 등이 포함된다. 노사 분규는 과거에는 이 조항에 포함됐지만 지금은 아니다. 각 업체들이 자력으로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좋은 노사 관계를 구축한 업체일수록 호평 받으며 대형 수주를 따낼 확률이 그만큼 높다.

한국은 이 부문에서 1990년대 이후 글로벌 시장의 까다로운 기준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만족시킨 ‘모범생’이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노사 단합이야말로 (선주들이) 몇 년씩 걸리는 큰 프로젝트를 맡길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 중 하나”라며 “노사 관계가 좋은 업체일수록 어떤 프로젝트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조선업계 빅3가 한층 돈독한 노사관계를 ‘불황 타개책’으로 내세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인건비 조금 줄이려다 대형 프로젝트 수주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희 STX그룹 과장은 “숙련된 기술인력이 가급적 오래 남아 후임에게 기술을 전수하면 그 자체로 큰 힘이 된다”며 “STX는 2년 정도의 수주 잔량을 확보하고 있어 당장 구조조정 필요성을 느끼진 않는다”고 말했다.



해양플랜트 등 새 사업으로 버텨이런 정년연장이 빅3 등 대형 업체에만 해당되는 일이라는 시선도 있다. 증권가에서는 사정이 열악한 중소·중견 조선업체는 하반기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빅3도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해양플랜트를 비롯한 새로운 전략사업을 강화해 장기 불황에 맞선다는 전략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하반기 해양플랜트 사업 확장에 집중하면서 해당 기술인력을 확충하거나 양성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다.

삼성중공업은 기존 주력 선종인 드릴십을 강화하는 한편 심해 원유·가스플랜트 엔지니어링 관련 해양사업인 서브시(Sub-sea)사업 진출을 검토 중이다. 현대중공업은 하반기 중 30억 달러 규모의 나이지리아 에지나 FPSO(부유식 원유저장설비)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2009년부터 4년 연속 불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내년 하반기 정도엔 경기가 좋아질것으로 본다”며 “그때 정년연장 효과를 톡톡히 볼 것”이라고 기대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도 “국내 조선업계는 위기 때마다 잘 극복해왔다”라면서 “사람을 자르지 않고 창조적 대안을 내면서 문제를 극복해왔기 때문에 위기에 더욱 강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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