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족·지금’ 생각하는 선택적 소비 는다
‘나·가족·지금’ 생각하는 선택적 소비 는다
‘수출이 호조를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내수시장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꽁꽁 얼어붙고 있다. 가계마다 소득이 줄어들자 생필품을 제외한 다른 소비를 대폭 줄이거나 거의 중단한 상태. 이로 인해 기업들의 생산현장에는 재고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다… (중략)…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바람에 내수시장이 급속히 침체되고 악화된 기업 경영이 가계소득에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의 고리가….’1998년 2월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일반적인 현상이다.
불황이면 소비자는 지갑을 닫는다. 하지만 불황이라고 길이 없는 건 아니다. 같은 해 5월에 실린 기사를 보자. ‘불황의 골이 깊을수록 효자상품의 가치는 그 빛을 더욱 발하는 법. IMF 체제 이후 불황 극복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는 효자 상품에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경차 마티즈, 삼성전자의 휴대폰, 주류업계의 버팀목이 된 소주 등이다.’
기사에서 지목한 세 가지 품목 중 경차와 소주는 전형적인 불황형 상품이다. 형편이 어려우니 큰 차보다는 작은 차를 선호하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맥주나 양주 대신에 소주를 찾게 되는 심리다. 휴대전화는 경기와 무관하게 당시 급속도로 대중에 퍼지던 상황이었다.외환위기 때만큼의 충격은 아니지만 최근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7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했지만 시장 반응은 차갑다. 실물경제는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8월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2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2분기 실질 소비 지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1% 증가하는 데 그쳤다.불황기에 그렇듯 최근에도 소주와 경차가 잘 팔리고 있다.그런데 최근 가계 소비 지출 동향을 잘 살펴보면 과거와 달라진 소비패턴이 곳곳에서 발견된다.우선 교육비 비중이 줄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소비지출 중 교육비 비중은 7.5%다. 전년 동기 대비 0.2% 줄어든 수치다. 1분기 역시 지난해 11.5%에 비해 0.6% 줄었다. 유학이나 연수비에 쓰는 비용도 지난해 상반기 22억100만 달러보다 9.3% 줄어 19억97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자녀 교육비만은 줄이지 않던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선진국형 선택적 지출 증가반면 문화생활이나 레저에 쓰는 돈은 줄지 않았다. 가계지출 중 오락·문화에 지출하는 비용은 전년 동기 대비 6.8% 증가했다. 전체 소비지출 증가율(3.6%)을 넘고, 해마다 꾸준한 상승세다. 김도균 경희대 체육학과 교수는 “최근 젊은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ACTIVE) 소비 행태를 보이는 경향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기를 떠나 과감히 지갑을 여는게 요즘 세대”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말하는 ‘ACTIVE’란 타인과의 교류를 중시하고(Association) 개인 자존감과 개성이 강하며(Confidence), 트렌드에 민감하고(Trend) 관심 분야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며(Information),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Variety) 즐기려는 성향이 강한(Entertainment)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한다.
다른 지출을 줄여서라도 내가 원하는 여가 활동을 즐긴다는 답변도 20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한 마디로 자신과 가족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은 세대다. 이런 30대 소비계층을 중심으로 불황속 호황을 누리는 산업이 있다. 영화(Movie) 아웃도어(Outdoor), 스포츠(Sports), 여행(Travel) 등이다. 이른바 ‘모스트(MOST) 비즈니스’다.
국내 영화계는 웃음꽃이 피었다. 올해 20% 이상 성장해 역대 기록을 모두 갈아치울 기세다. 전문가들은 “2012년은 한국 영화의 잠재력이 폭발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 영화계를 울고 웃게 했던 20대 여성관객의 비중이 줄고 30~40대 남성과 가족관객이 늘어난 것이 비결이다. 불황 속에 호황을 누리는 건 아웃도어 상품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매년 10~30%씩 성장하고 있다. 관련 업계는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올해 최대 5조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계 1위인 미국의 시장 규모는 11조원. 미국의 인구가 우리나라보다 6배나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스포츠 산업은 나날이 저변을 넓히고 있다. 올해 프로야구 누적 관중은 800만 명 돌파가 유력하다. 다른 프로 스포츠들도 꾸준히 관중이 늘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인 야구 등 각종 동호회 활동 인구가 많아지면서 장비·용품 구입 비용도 증가했다. 올해는 런던올림픽 특수에 종목을 불문하고 활짝 웃게 됐다. 비인기종목으로 꼽히는 펜싱 강좌가 개설됐을 정도다.
‘MOST 비즈니스’ 시장 규모 확대여행 업계도 호황이다. 장기 불황이라는 데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은 넘쳐난다. 인천공항에 따르면 7월 15일 12만5900명의 내국인이 해외로 떠나 공항 개항 이래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항공사 예약률은 90%를 상회하고, 하루 공항 이용객이 10만 명을 넘어선 탓에 출국수속이 지연될 정도다. 업계 관계자는 “시간적, 금전적으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해외를 다녀 오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저가 항공사의 노선 확충과 유류세 인하 등으로 여행여건이 호전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패키지 대신 자유여행객이 늘고 가족여행 수요가 많아진 것도 최근의 변화다. 연령대도 다양해져 30~40대가 자유여행상품으로 떠나는 빈도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물론 영화감상, 레저, 스포츠, 여행 등에 쓰는 돈이 늘어나는 것이 단기적 현상은 아니다. 지난해 말 국회 예산정책처가 낸 ‘가계지출 요인의 구조 변화와 정부정책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0년간 국내 가계는 식음료, 수도, 광열 등 필수경비 지출은 줄였지만, 선택적 소비 지출은 늘려 왔다. 오락·문화, 교통, 통신, 교육비 등이다. 1970~2010년까지 40년간 가계 최종 소비 지출 평균 증가율은 6.1%였다. 식음료는 2.9%, 의류비는 5.2%늘었다.
반면 오락·문화비는 평균 10% 증가했다.교육비(5.3%), 의료·보건비(9.3%) 증가율보다 높았다. 전체 가계 지출에서 오락·문화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1980년대 3.7%에서 2000년대 7.9%로 늘었다. 가계 소비가 꾸준히 선진국형으로 변화해 왔다는 얘기다. 유경원 상명대 금융경제학과 교수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주목되는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4~5년 동안에도 우리나라 가계는 통신·교육·의료 외에 문화·오락비 지출을 가장 많이 늘렸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여러분석을 내놓는다. 금융위기 이후 국내 소비자는 알뜰 소비로 가격 대비 가치를 따지는‘가치 소비’를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동시에 실속형 소비를 지향한다. 아울러 ‘나와 가족, 웰빙’을 중시하는 트렌드도 ‘MOST 비즈니스’가 호황을 누리는 데 한 몫 했다. 이는 1990년 대 후반 미국에서 나타난 ‘덤피(Dumpie)’ 현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덤피는 미국정부의 금융 자유화와 경기 활성화 정책으로 소비가 극에 달해 달했던 1980년대를 보낸 미국 소비자들이 1990년 대 경기침체를 겪은 후 단순한 인생의 즐거움과 가정의 단란함·행복을 추구했던 생활 양식을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동훈 수석연구원은 “금융위기 이후 실질소득이 오히려 줄면서 스스로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점점 지갑을 닫고 있다”며 “하지만 필수품은 최저가를 선택하는 소비자도 자신의 욕구을 충족해주는 상품, 사회적 지위나 개성을 표현해주는 서비스에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소비 트렌드 변화가 허영심을 자극하고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김진국 배재대 아펜젤러국제학부 교수는“‘나중’에 초점을 맞춰 삶을 설계하던 과거 세대에 비해 ‘지금’을 더 알차게 쓰려는 세대가 소비의 중심축이 되면서 나타나는 세계적인 현상”이라며 “오히려 이러한 트렌드 변화가 잘못된 음주문화를 개선하고 한국 사회에 가족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이 자리 잡도록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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