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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끝에 혼실어 역사에 美를 더하다

붓끝에 혼실어 역사에 美를 더하다



한국 미술사에 큰 물결을 일으킨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그는 대전고와 서울대 회화과를 나와 1968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동양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89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백은 국전 최연소 추천작가로 데뷔해 제1회 신인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평단에선 그를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예술과 생의 길을 일치한거장”이라고 평가한다.

보통사람은 가누기도 힘든 커다란 붓으로 한국의 자연을 담는가 하면 아주 가느다란 면상필로 수만 개의 점을 찍어 영정을 그린다. 현재 사용되는 5000원권 지폐 속의 율곡 선생과 5만원권 지폐 속의 신사임당 영정 역시 그 가느다란 붓 끝으로 완성했다.그의 수많은 작품은 ‘한국미술의 자생성’에 바탕을 둔다. 우리 미술은 스스로 형성된 자립적인 문화로 발전했다는 게 이 화백의 오랜 주장이다. 실제 그는 평생을 자생성에 대한 탐구와 한국미의 근원 형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9월17일에 찾은 평창동 작업실은 수 많은 자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간신히 사람 한 명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다. 그 곳에서 만난 이 화백은 꽤 수척해 보였다.

작품 준비로 석달 사이에 10kg 넘게 살이 빠졌다. 4년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프로젝트 발표가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바로 시조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의 영정작업이다. 4년 전 전남 해남에서 고산의 종친들이 찾아왔다.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영정 작업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 마치 학자처럼 치밀한 자료 조사는 물론이고 옛 문헌에 기초한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히는 고증 작업도 거쳐야 한다.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는 건 끈질긴 연구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화백은 7번을 거절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오고 또 찾아왔다. 이 화백은 거절할 요량으로 “가족의 해골이라도 봐야 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흔쾌히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마침 고산의 가족묘를 이장할 계획이었던 것.이 화백은 “아무래도 고산 선생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고 들려준다. “2007년 10월 고산 선생의 부모와 형의 묘를 파묘해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두개골 골상을 토대로 고산의 DNA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두개골 골상을 3D 입체 영상으로 직접 만들어 작업했지요. 여기에 고산 선생의 생애를 더듬고 그의 문학 작품집을 읽으며 성향과 인품을 담아냈고요. 이제 거의 완성 단계로 10월이면 고산 윤선도의 영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신사임당·율곡을 화폐에 담다그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가진 게 돈 밖에 없다”고 말한다.돈이 많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국내 유일의 생존하는 ‘화폐 영정’ 화가다. 37세 때 율곡을 그렸고, 다시 34년이 흐른 2009년에 신사임당을 그렸다. 어머니와 아들이 그의 손에서 환생했다. 5만원권의 인물은 그의 스승인 이당김은호 선생의 표준 영정을 밑그림으로 삼았다. 머리 모양과 복식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바꿨다. 현모양처보다 당대의 신여성이었고, 화가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그는 화폐용 영정을 그리면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고 얘

기했다. “한국은행에서도 미리 얘기하지 않고 집으로 찾아와요. 이번에 신사임당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아내에게도 비밀로 했어요. 영정 작가를 만나면 ‘돈복’이 많다고 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요. 돈은 벌고 모으는 것만큼 가치 있게 쓰는 게 더 중요합니다. 돈을 잘 쓰면 100원으로 1만원 값어치를 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그 반대가 되지요.운보 김기창 선생은 이걸 돈의 마술이라고 하더군요.”

독도를 처음으로 화폭에 담은 이도 이 화백이다. 70년대 그는 겸재 정선에 푹 빠졌다. 이 화백은 “한국의 그림은 정선 이후 비로소 우리의 것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선이 우리 땅을 그대로 담은 진경산수화를 느끼기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서해안의 백령도, 강화도, 외포리, 송도 등을 거쳐 제주도를 돌고 동해안으로 올라갔다.다시 울릉도를 향했는데 그 곳에도 못 들어가는 섬이 있었다. 바로 독도다.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할 때였다. 그는 혹시나 독도를 그린 화가가 있는지 알아봤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없었다. 77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군에서 작전을 수행하러 독도에 들어가는 해경선이 한 척 있었다. 민간인은 안 된다는 걸 여러 명의 신원보증을 받는 복잡한 절차 끝에 허락을 받았다.

새벽에 출발한 그가 독도에 도착했을 때 막 해가 떠올랐다. 그는 “붉은 해가 솟으며 물 안개가 퍼지는 광경을 본 순간 독도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돌섬인 독도를 수 없이 그렸다. 이 화백이 80년대 그려온 ‘원형상’ 연작에 담겨있다. 그는 우리 자연이 품고 있는 정신과 역사성을 독도에서 찾아냈다. 그림을 통해 독도가 지닌 의미, 독도의 상징성, 독도가 안고있는 무수한 세월을 표현했다. 독도와 첫만남 이후 그는 문화로 독도를 지키기 위한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를 조직하고 40년 가까이 독도 지키기 운동을 펼쳤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서대문구 통일로 임광빌딩 지하 1층에 독도 무료체험관을 연다. 이곳 기획전시관에 이화백의 독도 수묵화 4점이 전시돼 있다.자연이 품고 있는 정신과 역사성의 탐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97년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루브르 박물관 지하 카루젤뒤루브르에 ‘원형상94111-마니산’ 설치 벽화를 전시했다. 이 벽화는 총 길이 72m, 높이 6m에 이르는 대작이다. 루브르 입구인 유리 피라미드 아래에 반쯤 무너진 성벽이 있는 전시 공간에 그는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문화재를 떠올리는 작품을 설치했다. 규모도 컸지만 그의 실험적인 창작기법이 돋보였다. 두껍고 질 좋은 장지를 여러장 이어 붙여 수십미터에 이르는 대형 벽화를 수묵으로 그리고 뒤에서 조명하는 기법이다. 불이 켜진 순간 무너진 성벽 위에 강화 마니산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관람객들의 탄성이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국내 첫 독도 문화 지킴이그의 탐구와 실험정신은 멈추지 않았다. 10년 뒤 초대형 작품을 내놨다. 전남 보성군 태백산맥문학관의 벽화설치물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다. 민족 분단의 종식과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형상화했다. 지리산과 백두산 등에서 채취한 3만8720개의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나누고 다듬고 굴리는 연마 과정을 거쳤다. 이 작품을 만드는 데 꼬박 1년8개월이 걸렸다. 지난해 6월 한국기록원이 국내 최초, 최대 작품으로 공식 인증했다.그는 50년 넘게 미술과 함께 살았다. 이 화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들린 듯’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한번 몰입하면 시간이 가는 걸 느끼지 못한다. 작업실에 들어간 지 3일만에 나온 적도 있다. 대형 작품을 그릴 때는 아예 화선지 위에서 선잠을 잔다고 한다. 영감이 떠오른 순간 한번에 붓 가는 대로 그린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한그림’이라고 부른다. 한그림이란 한민족의 그림이란 뜻을 담은 순 우리말이다.

그는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한(恨)의 문화’라고 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우리 문화의 근간은 풍류와 해학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선비들은 시조를 읊고 농부들은 농악을 했어요. 막걸리 한 잔에도 덩실덩실 춤을 추는 민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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