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초식, 여자는 육식
남자는 초식, 여자는 육식
일본에는 베이비붐 세대를 부르는 그들만의 용어가 있다.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다. ‘단카이’는 ‘한 덩어리’를 뜻한다. 당시 태어난 아이 수가 많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통상적으로 1947~49년까지 3년 동안에 태어난 세대다. 이들의 자녀를 ‘포스트단카이주니어’ 세대라 부른다. 현재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해당하는 일본판 에코부머다.
최근 이들 포스트단카이주니어 세대에게서 이상기류가 감지된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성생활이다.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추세이던 미혼남녀의 성관계 경험률은 2000년대 중반 이후로 하락세를 보인다. 일본인구문제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 경험이 없는 청년세대(18~34)는 2005년 31.9%에서 2010년 36.2%로 상승했다. 일본성교육협회가 지난 8월에 발표한 ‘제7회 청소년 성행동 전국조사’에서도 대학생들의 성관계 경험률은 남성 54%, 여성 47%로 2005년 조사에 비해 각각 7%포인트, 14%포인트 떨어졌다.
일본가족계획협회가족계획연구센터의 기타쿠라 구니오 연구원은 “젊은이들은 경제력 저하로 연애를 할 여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일본의 에코부머 세대인 포스트단카이주니어는 어린 시절부터 ‘잃어버린 20년(일본의 부동산 거품 붕괴 직후인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약 20년을 일컫는다)’이라 불리는 극심한 경기침체와 함께 성장했다. IMF를 수 년 만에 극복한 한국이나 지난 수십 년 간 불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중국과는 다른 양상이다.
취업난이 극심했던 1990년대 후반의 ‘취업빙하기’를 보고 자랐으며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찾아온 ‘초(超)취업 빙하기’를 경험했다. 일본의 청년실업률은 2003년 10.1%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2008년 7.7%까지 서서히 떨어졌지만, 2009년부터 다시 9%대로 상승했다. 어렸을 때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던 경기침체는 이제 ‘잃어버린 20년’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런 분위기가 개선될 여지는 적어 보인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 ‘초식남’은 젊은 남성들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교활동 대신 홀로 취미생활에 열중하는 젊은 남성을 일컫는다. 한양대 전영수(국제대학원 일본학과) 교수는 저서 ‘장수대국의 청년보고서’에서 초식남의 출현 이유를 ‘불황 여파’로 꼽으며 이렇게 썼다. “장기 불황이 성격마저 변질시켜서다.
실제 일본의 20대는 호황을 모른다. 이들의 출생 이후 지금껏 일본 경제는 불황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사카부립대학의 모리오카 마사히로(철학과) 교수는 아사히신문 기고문을 통해 “남성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육식계’여야 한다는 인식이 줄어든 결과 남성의 초식화가 진행됐다”고 진단했다.
포스트단카이주니어의 가장 큰 걱정거리도 다른 나라의 젊은 층과 마찬가지로 취업난이다. 일본의 대형 통신업체 NTT의 계열사에서 일하는 요시타케 마유미(26) 씨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 말부터 취업난이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요즘엔 졸업 후에도 취업준비를 계속하거나, 취업이 되지 않아 졸업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들이 졸업을 연기하는 이유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기업이 ‘직전 학기 졸업자’를 주된 채용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취업 재수생’들을 도우려 2010년 10월 일본 정부가 “졸업 후 3년 동안은 ‘직전 학기 졸업자’로 취급해 달라”고 업계에 직접 요청했을 정도다. 취업 이후로도 불안은 끝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2010년 취업한 대졸 신입사원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0만 명이 3년 이내에 회사를 떠났다고 추산했다.
한 교육컨설팅 회사가 직원 수 200명 이상 기업의 신입사원 15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51.7%가 “퇴직을 고려 중”이라고 응답했다. 대학생 취업세미나 ‘반제미’의 반도 교이치 대표는 신입사원들의 퇴직 바람을 “파랑새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였다. “취업난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입사하기란 쉽지 않다. 취업을 하고 나서도 직장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회사 생활이 조금만 힘들어도 견디질 못한다.”
신입사원을 대하는 기업측의 태도도 청년들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리먼 사태 직후인 2009년 4월, 일본의 많은 기업은 채용이 확정된 대학생들의 입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후생노동성이 이런 기업 중 악질적인 사례를 골라 15개 회사를 공개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입사를 취소하는 회사가 크게 줄었다. 대신 직접 해고하지 않고 은근히 퇴직을 권한다는 신조어 ‘신입 자르기’가 등장했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실제 ‘신입 자르기’를 당한 한 여성의 사례를 공개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그녀는 입사하고 몇 달 동안 연수와 수습을 거친 후 시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할거냐”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는 회사측의 압박을 받게 됐고, 견디다 못해 그는 결국 사직서를 냈다.
일본 NPO법인 노동상담센터의 스다 미쓰테루 부이사장은 2010년까지 신입사원 잘라내기 행위가 빈번히 벌어졌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신입 자르기가)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지만 한 달에 세 건 정도는 관련 상담이 꾸준히 들어온다.” 스다 부이사장은 신입 자르기가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사례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지나치게 열악한 환경 때문에 퇴직하려고 해도 회사 측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퇴직을 거부한다.”
한편 남성에 비해 경제력이 높아진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오히려 ‘육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전영수 교수는 일본 젊은 여성의 육식화 배경을 이렇게 분석했다. “같은 20대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사정이 좀 낫다. 정규직 확률은 남자보다 낮아도 사회진출 기회가 늘어났고 결혼연령이 늦춰지면서 행동반경이 다소 넓어졌기 때문이다.” 모리오카 교수도 “여성의 경우 ‘요조숙녀가 돼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줄어들었다”며 “여성은 남성과 다른 방향의 변화를 겪는다”고 설명했다.
일본 여성들은 예전처럼 연애와 결혼을 서두르기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일본의 항공사에서 일하는 오쿠야마 미나미(26) 씨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서 결혼을 미루는 친구가 많다”고 말했다. “예전 여성들은 단순한 일을 하다가 결혼하면 퇴직하고 애를 낳아서 가정에 헌신했다. 지금은 여성도 남성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어서 일을 좀처럼 그만두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으면 번 돈을 전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최근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소비시장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른다. 총무성의 2009년 통계에서 근로자 세대 중 30대 미만 단독세대에서는 여성의 가처분소득이 남성보다 높다고 나타났다. 여성들끼리 어울려 여행과 음주를 즐기는 모임을 일컫는 신조어 ‘조시카이(女性會)’도 등장했다.
마이니치커뮤니케이션이 201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여성의 84%가 남자를 만나기 보다 조시카이를 선호하며, 여성의 3분의 1은 모르는 남성과의 만남을 불편하다고 느낀다. 오쿠야마 씨는 “여자들끼리 노는 게 더 즐거워 친구들과 조시카이를 자주 갖는다”며 “남자가 없어도 뭐든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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