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협에겐 ‘돌려줘라’ 은행에는 ‘책임없다’
신협에겐 ‘돌려줘라’ 은행에는 ‘책임없다’
지난해 8월 이모(85)씨가 경기도 부천의 한 신협을 상대로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고객이 부담한 ‘근저당 설정비(등록세, 신청 수수료 등 부대비용)’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이 소송의 판결을 맡은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이창경 판사는 9월 14일 “이씨가 부담한 근저당권 설정비용 68만여원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근저당권 설정비 반환 소송에서 금융회사에 반환의무를 인정한 법원의 첫 판결이었다.
은행권 “비용 부담” vs 시민단체 “비용 전가”3개월 뒤인 12월 6일. 대출자 270명이 국민은행을 상대로 ‘근저당권 설정비 4억3000만원을 반환하라’는 근저당 설정비 반환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37부 고영구 부장판사는 “은행은 반환 책임이 없어 지급할 필요가 없다”며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날 민사합의33부 이우재 부장판사도 고객 99명이 기업은행과 하나은행, 외환은행,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한국시티은행 등 5개은행을 상대로 낸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 같은 판결을 내렸다. 동일한 취지의 소송이지만 상반된 결과다.
이번 근저당권 설정비 반환소송의 핵심은 근저당권 설정비를 소비자에게 부담토록 하는 것이 맞는지 여부와 소멸시효의 2가지다. 근저당권 설정비는 통상 1억원을 대출받을 때 60만~80만원이 발생한다. 기존 약관은 고객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근저당 설정비를 은행과 나눠 분담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2008년 이런 약관이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은행들은 공정위의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해 대법원이 공정위의 손을 들어주면서 기존 약관은 개정이 불가피해졌다. 이후 소비자단체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근거로 “옛 표준약관은 무효이므로 은행들이 그동안 고객들에게 부담시킨 근저당권 설정비를 되돌려줘야 한다”며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은행들이 고객에게 제시하는 근저당 설정비 관련 약관은 각종 비용을 고객에게 무조건 부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행과 고객이 협의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폭리행위가 없는 한 약정을 무효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실제 대출 계약 중 40% 정도가 설정비를 은행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체결됐고, 고객이 부담한 경우에도 금리와 중도상환 수수료율 등에서 혜택을 준 만큼 은행이 고객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을 강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근저당 설정권 소멸시효는 5년이라고 판단했다. 고객들은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의 소멸시효가 민법상 10년이기 때문에 대출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10년 이내에 소송을 내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원고들의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은 상행위에 기한 것으로 5년의 상사시효가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왜 인천지법이 9월에 내린 판결과 서울중앙지법의 12월 판결이 달랐을까. 은행연합회 여신제도부 김평섭 부장은 “신협은 고객에게 설정비 부담 여부에 따른 대출금리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고, 신협이 부담해야 할 비용도 고객에게 전가하는 등 불공정한 점이 인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소송을 기획한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 등은 은행 상대의 법원 1심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금소연의 변호를 맡은 로고스 한혜진 변호사는 “은행들은 중도상환수수료를 깎아주거나 금리를 낮춰줬다고 하지만 0.2~0.3% 가산금리를 적용시켜 실질적으로는 소비자가 비용을 부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은행권은 1심에서 승소한 만큼 안도하고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국민은행에 이어 12월 20일에는 20여명이 하나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의 1심 판결이 나오는 등 소송이 남아있다. 또 항소한 만큼 앞으로 상급심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항소심에서는 은행이 대출자들에게 근저당 설정비를 부담한 대가로 합당한 보상을 했는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 법무담당부서장들은 12월 11일 소송과 관련한 추가 대응책을 논의했다.
김평섭 부장은 “1심 판결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법원이 판결한 것처럼 은행이 승소할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 소비자 단체들은 대법원이 지난해 근저당 설정비를 소비자에게 부과하도록 한 표준약관을 위법하다고 판단한 사례가 있어 기대하고 있다.
금소연 조연행 대표는 “이번 판결에서는 표준약관이 아닌 개별약관으로 판단했지만 은행에서 대출자에게 개별약관으로 명시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항소심에서는 이를 증명할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번 소송에서 승소할 자신이 있다”고 확신했다.
금감원, 반환 판결 땐 집단구제 가능성도현재 외국계 은행 한 곳을 포함해 17개 은행에 금융소비자연맹 1만명을 비롯해 법무법인 태산 6905명, 한국소비자원 4만2000명 등 6만여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소송가액은 400억~500억원 가량이다. 만약 항소심에서 은행권이 패소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금융감독원은 10년간 근저당 설정비를 부담한 고객이 200만명에 액수는 10조원으로 추산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10조원은 은행권 전체의 연간 순이익과 맞먹는 금액”이라며 “은행들 입장에서는 이번 판결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법원의 판결을 지켜본다는 입장이지만, 만약 은행권이 패소하면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판결 취지에 맞춰 집단구제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소송에 참가하지 않아도 설정비를 반환 받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법원이 반환 취지로 확정판결을 내리면 소송 인지대나 기간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은행이 자율적으로 반환하도록 하거나 조정안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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