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는 낮추고 효율은 높였다
콧대는 낮추고 효율은 높였다
매월 셋째주 수요일 오전 11시가 되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정오의 음악회’가 열린다. 이 음악회는 60여명의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는 국악관현악곡을 비롯해 전통악기가 어우러지는 협주, 추억의 명곡을 국악앙상블로 편곡한 ‘세계음악기행’으로 이뤄져 있다.
이 공연은 국립극장의 대표적인 상설공연으로 자리잡았다. 국립창극단의 ‘완창판소리’, 국립무용단의 ‘정오의 춤’, 국립발레단의 ‘해설이 있는 발레’도 1년 내내 번갈아 가며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장이 연중 다양한 공연을 선보인 건 지난해 1월 취임한 안호상 국립극장장의 시도였다.
이전까지 국립극장 소속 예술단체의 공연은 그야말로 예측 불가였다. 1500여 석을 채워야 하는 큰 규모의 공연이 대부분이지만 한달을 기준으로 새 작품을 발표하고 홍보하는 기존 방식을 답습했다. 예술단체마다 작품을 개별적으로 기획하다 보니 마케팅 효율성도 떨어졌다. 안 극장장은 취임 직후 이런 한계를 지적하며 개혁에 나섰다. 얼마 전 취임 1주년을 맞은 안호상 국립극장장을 3월 6일 만나 그간의 변화를 물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전 세계가 K팝에 열광했습니다. 대중문화로 먼저 한국 문화를 접한 이들은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질 겁니다. 우리가 러시아에 가면 볼쇼이극장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고, 영국에 가면 국립극장에서 ‘오셀로’를 보듯 우리 국립극장에서도 전통문화 공연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린 이렇다 할 대표 레퍼토리가 없었어요. 국립극장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드는데 집중했습니다.”
한국적 간판 레퍼토리 개발안 극장장은 지난해 9월부터 ‘국립 레퍼토리 시즌’을 도입했다. 그의 목표는 서울에 일주일 간 머무는 관광객이 국립극장에서 적어도 4~5개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러시아·프랑스·영국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을 비롯한 공연장에서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두고 전체 프로그램을 미리 구성해 제공하는 시즌제가 보편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 국립극장은 이런 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공연 계획을 미리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장기적인 관객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국립창극단·국립관악관현악단·국립무용단 등 8개 전속 단체를 보유한 국내 대표적인 제작극장임에도 2011년까지 전체 공연의 30%를 대관으로 채웠다. 이 때문에 일반 대중은 물론 공연계 전문가조차 국립예술단체의 대표 작품을 꼽지 못했다.
“과거 극장이 부족한 시절에는 해외 초청 공연을 비롯한 외부 단체 공연을 국립극장이 수용해야 했어요. 수익성보다 공공성을 추구하다 보니 외부 단체보다 제작 여건이 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전용극장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극장을 많이 만들면서 국립극장의 대관 수요가 줄었습니다.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문화 콘텐트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커졌고요. 이런 환경에서 국립극장의 역할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좋은 콘텐트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지난해 레퍼토리 시즌제를 시작하면서 8개 국립 예술단체가 10개월 간 국립극장의 4개 극장에서 엄선한 대표 레퍼토리와 다양한 신작을 선보였다. 이들이 한 해 무대에 올리는 작품만도 79편에 이른다. 티켓 가격정책도 바꿨다. 예컨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6월까지를 한 시즌으로 묶어 시즌 티켓을 구매하면 개별 구매 때보다 최대 50% 깎아줬다.
안호상 극장장은 ‘극장의 백화점화’를 강조했다. 백화점에 가면 여러 물건을 둘러 보는 과정에서 구매 욕구가 생기듯 극장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제공하면 관객의 관람 욕구가 커질 것이란 판단에서다. 여러 공연을 묶어 홍보하면서 마케팅 비용을 낮추고 작품의 질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극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려면 무엇보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고 본다. 안 극장장은 “민간예술단체나 해외 라이선스 공연과 남다른 색깔의 콘텐트가 성공의 관건”이라며 “특히 ‘전통에 기반을 둔 현대적 공연물 창조’가 기본 임무인 국립 예술단체는 예술적인 깊이에 대중적 감각을 입히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즌 개막작으로 공연한 국립창극단의 ‘수궁가’가 대표적이다. 독일 출신의 거장 아힘 프라이어가 판소리 오페라로 각색한 수‘궁가’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창극에 풍자와 해학을 곁들였다. 바다 용왕의 건강이 악화돼 별주부가 토끼 간을 찾아 육지로 떠나는 원전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랐지만 기존 판소리와 달리 용왕의 건강이 나빠진 이유를 환경 오염에서 찾아 관객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던졌다. 무대 위에 길게 늘어진 페트병이 바다에 떠 있는 쓰레기를 상징해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그러자 개막작을 비롯해 지난 연말 국립극장의 많은 공연이 매진되기도 했다. 안 극장장은 “기존 명작과 함께 참신한 신작이 시즌 동안 검증되면 각 예술단체는 더 풍성한 레퍼토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다음 시즌은 더 발 빠르게 준비할 수 있고, 시즌마다 콘셉트를 가지고 작품을 구성하는 것도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국립극장은 앞으로 시즌마다 레퍼토리 70%, 신작 30%로 구성할 계획이다.
젊은층 구미 당기는 실험작 제작관객층을 넓히기 위한 노력도 계속 벌인다. 전통공연을 주로 선보인 국립극장의 특성상 장·노년층 관객이 많다. 전통공연에 흥미가 없는 젊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게 숙제다.
“젊은 관객을 확보하는 게 올해 중요한 목표입니다. 국립극장이 추구하는 예술의 장르나 상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정체성이 지키면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서 젊은 취향에 맞는 연출가나 무대 디자이너를 섭외하고 실험적인 창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4월에 선보일 국립무용단의 기획공연에서는 패션디자이너 정구호씨가 무대·의상·소품·조명을 담당합니다. 소리꾼 이자람씨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의 참여도 늘렸습니다. 새로운 관객을 확보하는 일은 어느 극장이든 절실한 일이니까요.”
안 극장장은 “극장에도 경영이 필수”라며 “극장 수뿐만 아니라 경쟁력을 갖춘 예술작품이 늘면서 경영능력 또한 강조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다만 “극장 경영은 공연의 경쟁력 확보가 1차 목표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극장도 경쟁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는 곧 극장이 더 이상 ‘갑’이 아니라는 뜻이죠. 과거에는 막연히 좋은 공연만 하면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다릅니다. 관객의 요구가 더 명확하고, 세분화됐습니다. 선택의 기준도 까다로워졌고요. 이젠 극장이 프로그램 선택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콘텐트를 계속 만들려면 극장의 경쟁 구도 역시 피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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