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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FORBES KOREA AGENDA - 정직한 삶으로 자유를 얻다

2013 FORBES KOREA AGENDA - 정직한 삶으로 자유를 얻다

해운업계 관행인 리베이트를 과감히 없애고 전문경영인 회사를 만든 박종규(78) KSS해운 창업자. 회사 보유지분(27.1%)도 3분의 1씩 나눠 사회·회사·가족에게 넘길 예정이다.
1935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60년 대한해운공사, 1969년 코리아케미칼캐리어스(현 KSS해운) 설립, 1993년 바른경제동인회 이사장, 1995년 KSS해운 회장, 2011년 제19회 인간상록수(경제 기업인 부문), 2003년~ KSS해운 고문



사랑하는 처와 자식들에게

나는 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도 하였고 물질적으로도 그만하면 모자람 없이 지낼 만 했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키웠고 교육도 잘 시켰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수지맞는 인생을 산 것이다(중략). 내 장기를 기증하는 마당에 시신도 의학도들의 실험 공부를 위해 대학병원에 기증하기 바란다. 나중에 화장을 하고 유골은 내가 좋아하는 동해 바다에 뿌려주기 바란다(중략). 일반적인 제사는 지내지 마라. 어느 집이나 맏며느리 되는 사람의 노고가 너무 크다. 기일 아침에 각자의 집에서 내 사진과 꽃 한송이 꽂아놓고 묵념 추도로 대신하기 바란다. 저녁에 음식점에 모여 형제간의 우의를 다지는 기회로 삼아라. 식비는 돌아가면서 내도록 하여라. 이러한 추도도 너희 일대(一代)로 끝내기 바란다. -1998.8.25 아버지로부터


박종규 KSS해운 창업자가 1998년 미리 써둔 유서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월15일 서울 관훈동 KSS해운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백발이 잘 어울리는 노신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2시간 가량 나눈 대화에는 삶의 경륜과 여유가 묻어났다. 1969년 설립된 KSS해운은 가스·화학 제품 등 특수화물 운송 전문 회사다.

1969년 배 한 척으로 시작한 KSS해운은 가스운반선 8척, 화학제품운반석 6척을 보유한 자산 3200억원의 강소기업으로 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해운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겪는 와중에도 꾸준히 실적을 낸다. 2011년 기준 매출액은 956억원.

유서를 쓴 지 정확히 7년 후 박 고문은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을 받았다. 우연히 병동에서 판매하는 『암백서』를 2만원 주고 구입했다. 암 4기 환자 생존율은 10% 미만이라는 수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엔 기가 막혔지만 곧 받아들였다. 일흔이면 많이 살았고, 더 살지 않아도 삶이 후회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고문은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 대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자녀들에겐 얘기하지 않았지만 생을 마감할 장소를 찾아간 겁니다. 이왕이면 공기 좋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눈을 감고 싶었지요. 하루 하루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숲을 거닐며 책을 읽으며 보냈어요.”

놀랍게도 5년 뒤 위암 치유 판정을 받았다. 생존율 10%에 든 것이다. 유서를 쓸 때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도 ‘이만하면 수지맞은 인생을 살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삶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손해 보더라도 원칙을 지키자는 게 삶의 철학이에요. 원칙을 지켜 정직하게 살다 보니 당당한 거죠.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하고 싶은 소리도 할 수 있고요. 원칙을 지키면 자유인이 될 수 있어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박 고문은 당시 국영기업이던 대한해운공사에 공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선박을 도입하고 매각하는 일과 해운시장을 분석하는 업무를 하며 해운 지식을 쌓았다. 해외 원서를 읽으며 선진기업들의 경영 방식도 공부했다. 자연스럽게 우리사주조합에 흥미를 갖게 됐다.

“직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종업원이 자기 회사의 주식을 갖는 게 도움이 되죠. 앞장서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하고 100주 사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회사가 특정인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실망한 박 고문은 회사를 그만뒀다. 종업원이 주인인 회사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1969년 코리아케미칼캐리어스(현 KSS해운)의 설립 배경이다. 500t 규모의 화학제품 운반석 한 척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일본에서 화학제품 원료를 싣고 와 국내 섬유공장에 납품했다. 안정적인 경영을 하려면 기존 일본 해운사의 장기 물량을 가져와야 했다.

일본보다 운임료를 깎아준다고 해도 고객사들이 흔들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운임료의 2~3%를 리베이트로 주는 게 관행이었다. 박 고문은 은근 슬쩍 요청하는 리베이트를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그만큼 운임료를 낮추는 조건으로 5년간 장기계약을 했다. 계약을 따낸 후 전 직원에게 “빈 배로 가는 한이 있어도 리베이트는 없다”고 선언했다.

리베이트 관행을 깬 것은 투명경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리베이트를 하면 영수증을 못 받아요. 그렇게 하려면 비자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돈은 세무처리를 할 수 없잖아요. 결국 2중장부를 만들게 되는 겁니다. 또 리베이트를 담당하는 직원은 배달사고를 일으키게 마련이에요. 다들 뒷돈을 챙기기 위해 리베이트를 담당하는 부서로 옮기려고 할 겁니다. 직원들 사이에 파벌이 생기고 기업은 부패할 게 뻔합니다.”

투명 거래가 관행이 되면서 직원들이 알아서 회계를 본다. 결산의 최종 결재권자 역시 대표가 아니라 총무부장이다. 그만큼 회계가 투명하다는 얘기다.

1995년 박 고문은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회장을 맡았다. 경영자로 지목한 이는 당시 부사장이던 장두찬씨였다. 업계에서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박 고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두 번째 경영 원칙은 경영은 회사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가 맡아야한다는 것. 회사 설립 때부터 마음 먹은 일이었다. 세 아들 모두 후계자 수업에서 제외됐다.

장 전 사장은 박 고문이 창업 초기부터 눈여겨 본 인물이다.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장 전 사장은 해운업체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가 박 고문을 만났다. 올곧은 성격이 비슷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박 고문은 장 전 사장의 성실한 태도가 맘에 들어 입사를 제안했고, 장 전 사장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문경영인끼리 알아서 승계박 고문이 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로 마음 먹은 것은 1993년부터다. 정치·사회적으로 변화가 생기면서 해운업계 판도도 바뀌었다. 고객사 사장 자리에 그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이 올라왔다. 박 고문은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젊은 인재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갑자기 회사를 물려줄 순 없었다. 2년 동안 알게 모르게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테스트를 했다. 아직까지도 정 전 사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박 고문이 귀띔했다.

“신사업을 추진할 때 담보 없이 투자를 받아오라고 했어요(웃음). 누구나 담보가 있으면 돈을 만들어 올 수 있습니다. 빈손으로 먹거리를 만들 줄 아는 게 경영자의 능력이지요. 그래야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굳건히 버틸 수 있으니까요. 처음엔 곤란해 하더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투자 자금을 받아내더군요. 자리를 물려줘도 되겠다 싶었지요.”

그는 경영권을 넘기고 2선으로 물러났다. 회장실도 본사에서 떨어진 층으로 옮겼다. 정 전 사장이 오너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2003년에는 회장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아예 등기이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고 최대주주(27.1%) 신분만 유지했다. 여기에도 후배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회장 자리에 오래앉아 있으면 장 전 사장은 사장만 하고 물러나겠다고 할 거 같더라고…. 나야 월급만 받으면 되니 고문을 맡겠다고 했지요. 그때 장 전 사장이 찾아와 어떻게 사주가 물러나 냐고 극구 말렸어요. 저는 오히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죠. 여기는 전문경영인 회사니까 당신이 결정하라고 했어요.

2003년 3월 주주총회에서 그만두자 6개월 뒤 장 전사장도 후배 윤장희 사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회장으로 물러났어요. 그 역시 회사 경영에 일체 간섭을 안 하더라고요. 점차 이곳은 사장이 중심이고, 누구나 열심히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게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는 거 같아요. 실제로 윤 사장은 1974년 이 회사 공채 1기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오른 겁니다.”

그는 “딱 한번 원칙을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회사를 더 키울 기회가 있었지요. 그때마다 투자금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역시나 리베이트를 해야만 큰 돈을 빌릴 수가 있더군요. 한번 원칙을 포기하고 기업을 크게 키울 것인가, 아니면 깨끗하고 작은 회사로 끝낼 것인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며칠 끙끙 앓다가 원칙을 고수하기로 했습니다.”

대기업으로 키우지 못했지만 그의 꿈들은 하나씩 실현했다. 20대 때 실패했던 우리사주조합을 만들었다. 경영권을 물려주기 전에 보유하던 회사 지분 가운데 10%를 사주조합에 출연했다. “주가가 오르면 직원들이 주식을 팔 수 있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사주조합이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조합단체 공동 소유로 주식을 넘겼어요. 사주조합을 튼튼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직원 입장에선 경영 성과가 좋아지면 개인 주식은 물론 사주조합 배당금까지 챙길 수 있으니 인센티브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요.”

그에게 남은 것은 회사 지분 27.1%뿐이다. 그는 이것조차도 3분의 1은 사회에, 3분의 1은 회사에, 나머지는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온통 나눔을 실천하는 박 고문에게 아들 3형제가 서운해 하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가장 큰 유산을 물려줬다고 말했다. 바로 고생시키면서 키워 독립심이 강하다는 것. 첫째와 셋째는 미국에서 각각 기술자와 연구원으로 일하고, 둘째는 국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한다.

자식들과 관련해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 고문이 출장 간 사이 세무 직원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세무조사를 하기 위해 불시에 온 직원들이 둘째 아들이 미국에서 보낸 편지를 보고 돌아갔다. 편지 내용은 이랬다. “아무리 아껴 쓰고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도 생활비가 한 달에 100달러 정도 부족합니다. 죄송하지만 100달러 만이라도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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