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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SOCIETY - 여성이여, 완벽주의를 버려라

features SOCIETY - 여성이여, 완벽주의를 버려라

모든 일을 전부 다 잘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욕심 낼 필요 없다



가장 성공한 여성을 생각해 보자. 친구나 동료 또는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우상으로 여겼던 사람도 좋다. 넓게 생각해서 정말로 떠받들고 존경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 이제 이 ‘원더우먼’, 당신이 아는 이 가장 성공한 여성이 얼마나 완벽한 사람인지 평가해 보자. 우리가 마주치는 여성들에게 툭하면 갖다 대는 잣대로 말이다.

당신이 아는 성공한 여성은 이상적인 파트너와 완벽한 관계를 유지하는가? 완벽한 자녀를 뒀는가? 그 자녀들이 신중하게 계산된 간격으로 태어나 지금은 각자 명문대에 다니고 있는가? 그녀가 자기 직무분야의 정상에 서 있는가? 높은 소득을 올리며 투자를 잘 하는가? 세상을 구했는가?

적어도 빈곤 타파, 기아퇴치, 또는 글로벌 기후변화 억제에 중대한 기여를 했는가? 성취감을 느끼는가? 몸매가 날씬한가? 주름살이 없는가? 대학에서 전과목 A학점을 받았는가? 집안 살림을 잘하는가? 식탁에는 손뜨개질한 보가 깔려 있고 정원에서 유기농 근대를 키우는가? 아닐 게다.

하지만 매일, 기사와 블로그에서, 아이들 놀이터와 회의실에서, 여성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끊임없이 재단하며 완벽한 팔방미인상을 기대한다. 개인 특성이나 간헐적인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셰릴 샌드버그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다. 하지만 그녀의 베스트셀러 저서가 직장 여성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 받는다. 야후 CEO 마리사 메이어는 신생아를 돌보면서 회사의 몰락을 막으려 애쓰지만 직원의 재택근무를 금지했다고 지탄받는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직장에서 디자이너 맞춤 정장 차림을 한다고 공격 받는다. 시장 후보 크리스틴 퀸은 여성친화적인 법안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대표는 공격적인 태도와 주름살 없는 이마 때문에, 팝 스타 아델은 출산 후 살을 완전히 빼지 않았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우리 주변의 여성들은 끊임없이 수퍼우먼의 기준으로 재단된다. 아무리 재능 있고 운 좋거나 멋진 여성이라도 아주 특출한 인물이 아니고선 모두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갖가지 목표 리스트를 들이민다.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20세기 초 점잖던 시절 젊은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진로는 한 갈래뿐이었다. 좋은 남편을 만나 곧바로 아이를 갖는 길이다. 아니면 BBC 방송의 인기 드라마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의 상류층 여주인공 레이디 메리가 털어놓는 식이다. “나 같은 여자에겐 삶이 없어. 우리는 옷을 고르고, 사교 방문을 하고, 자선활동을 하고, 패션쇼와 파티에 참석하지. 하지만 사실상 결혼할 때까지 대기실에 갇혀 지내는 셈이야.”

물론 1900년대 초 하류계급 여성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더 적었다. 그들을 옭아매는 사회질서에선 결혼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이었다. 20세기 중반, 내 어머니 같은 여성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소득을 올리고 가정 밖의 삶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대안들은 여전히 흔치 않았다.

관습과 싸울 만한 수단과 의지를 갖춘 여성들에게만 국한됐다. 일례로 내 어머니는 분명 로스쿨에 진학하기를 원했으며 그럴 만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21세에 결혼해 23세에 나를 낳았다. 조부모는 엄마에게 애정을 보였지만 젊은 여성이 왜 가족을 버리고 다시 공부를 하려는지 이해하지못했다.

그에 반해 나는 1970년대 초 성년이 됐다. 당시엔 혁명의 기운이 팽배했으며 처음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무엇이든 스스로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앞선 시대의 모순된 생각이 지배했다. 예뻐야 한다. 사랑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 남자들 앞에서 드러내선 안 된다.

우리 세대 여성들은 우리 대신 싸운 페미니스트들에 편승해 남녀간의 격차를 뛰어넘었다. 우리는 그들이 물려준 권력을 탐욕스럽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더 구태의연한 기대에 둘러싸인 채 페미니즘이 촉구하는 집단행동과 사회적 목표에 다수가 고집스럽게 무관심했다. 페미니스트들이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목표의 대부분을 곧바로 망각했다. 대신 자신의 경력과 자녀, 그리고 자신의 복잡한 출세가 도에 초점을 맞췄다.

그와 같은 망각은 한 가지 부당한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서로 물어뜯으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 지난 1년 사이 샌드버그와 메이어를 둘러싼 소동만 봐도 그렇다. 또는 어떤 여성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인생철학, 부부관계, 또는 자녀교육에 관한 견해를 발표할 때마다 등장하는 비판적인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 여성들은 여성 상사가 최악이라고 수군거린다.

아이들 놀이터의 여성들은 다시 직장에 나가기로 한 다른 엄마들의 결정을 대놓고 난도질한다. 내 경험으로는 여학생들은 특히 여교수에게 까다롭게 구는 경향을 보인다. 여교수들은 특히 남성 위주의 환경에서 나이어린 여교수들에게 유별나게 비판적이다. 그런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남편은 한숨을 쉬며 같은 대답을 한다. “그래서 당신들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거야.” 다소 성차별적이지만 어쩌면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 이 같은 공격과 비교 모드는 실력자 위치에 있는 여성이 여전히 극소수라는 가혹한 현실에서 비롯된다. 남성이 주를 이루는 테이블에 앉아본 여성은 그런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그 테이블에 앉은 여성 한 두 명의 존재가 그들을 ‘여성’으로 부각시킨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간주된다. 다양성 문제가 제기될 때 또는 어떤 사안의 부드러운 측면을 다뤄야 할때 그들을 찾는다. 무엇보다 부당한 점은 그들이 은연중에 끊임없이 비교된다는 사실이다.

앤이 비어트리스보다 발표를 더 잘 하지 않았나? 비어트리스가 앤을 심하게 대한 건 아닌가? 결과적으로 앤과 비어트리스는 의도하든 않든 자신들이 근무하는 조직을 대표하는 여성이 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서열상 그 아래 여성들도 자신들에게 두 자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은근히 의식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쓴다. 그 결과 필요 이상으로 경쟁이 심해진다.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뿐 아니라 자신들끼리도 싸워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여성들 사이에 뿌리내린다.

따라서 여성들이 집단적인 목소리와 영향력을 높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서로 뒷다리 잡기를 일시 중단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힘을 합쳐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의 정신으로 권력 상층부에 여성의 비율을 충분히 높이기 위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다. 일단 여성 숫자가 상징적인 소수를 넘어서면 모든 게 바뀌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전체 여성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또는 다른 (더 젊고 예쁘고 똑똑하고 섹시한) 경쟁자가 나타나 어떻게든 자신들의 자리를 앗아가리라는 개운치 못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50년에 걸친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은 마침내 페이스북 같은 회사나 타임 같은 언론기관들을 이끌 수 있게 됐다. 미국 대법원 판사로 활동하거나 IMF를 총괄할 수 있다. 미국 내 어느 대학 또는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고 지금은 미군에서 전투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피임약과 패치, 그리고 낙태 합법화 판결(로 vs 웨이드 재판) 덕분에 여성들은 자신의 성생활과 출산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자녀를 가질지, 그리고 누구와 언제 가질지를 스스로 선택한다.

그러나 매일 마주치는 주변의 젊은 여성들은 광범위하고 종종 완전히 모순적인 기대의 공세에 노출된다. 무엇보다도 실리콘밸리의 신생 벤처회사에서든 공장 작업현장에서든 직업의 세계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 소득수준 전반에 걸쳐 모든 여성이 평생 동안 꾸준하게 일을 한다(2010년에는 노동연령 여성의 59%가 취업했다).

대체로 상근직(근로여성의 73%)으로 근무하며 집에 어린 자녀를 두고도 직장에 다녔다. 젊은 여성들은 이젠 단순히 취업을 갈망하지 않는다. 취업을 기대하며 또한 대체로 그래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집안 일을 돌보는 가정주부 역할도 기대된다.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담장을 고치며, 어린 자녀의 불가피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같은 요구 중 일부는 바뀌어간다.



신세대 아빠를 비롯한 파트너들이 서서히 자녀양육 부담을 더 많이 떠맡는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가사의 가장 큰 몫을 담당한다. 양말을 꿰매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 등하교길 운전 기사 노릇을 하는 데 한 주 평균 28시간을 쓰는 반면 남성의 경우는 10시간이다. 한편 이 세대는 엄격한 ‘호랑이 어머니(tiger mom)’ 양육방식을 채택했다. 그런 만큼 스스로 떠안은 자녀교육 부담이 끔찍하게 그리고 역설적으로 급증한다.

예컨대 찰리의 피아노 레슨을 점검하거나 주말마다 케이티를 싱크로나이즈 스케이팅 대회에 데려가 참가시킨다. 이를 1960년대 남성우월주의 시대의 여성들과 비교해보라. 당시의 여성들은 자녀를 그렇게 애지중지하지 않았다. 진흙탕에서 뛰어 놀고, 가끔씩 불량식품 트윙키도 먹고, 심지어 숙제도 혼자 하도록 내버려뒀다.

게다가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결혼과 자녀의 세계로 넘어가기도 전에 그 방법에 관해 갖가지 상반된 기대가 쏟아진다. 반가운 소식은 다시 한번 선택이 거의 무한하다는 점이다.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시기에 결혼할 수 있다. 인종, 계급 심지어 성별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남편 없이 아기를 갖고 결혼 부담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나쁜 소식도 있다. 모든 젊은 여성이 인기 드라마 ‘걸스’나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보여주는 자유분방한 라이프스타일을 정말 원하는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그들 중 일부는 애인을 원하기도 한다. 지금은 그런 관계 자체가 드문 듯하지만 말이다. 대부분 결국에는 결혼을 원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룻밤을 지내고 헤어지는 섹스 문화를 모두가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같은 또래 문화가 그들에게 압력으로 작용한다. 거의 어느 인터넷 데이팅 사이트나 대학 캠퍼스 블로그만 봐도 뻔히 드러난다. 여성은 섹스에 개방적이고 파트너가 인터넷에서 보는 온갖 활동에 능해야한다. 모델 같은 몸매에 술을 잘 마시고 하룻밤 상대가 문자 한번 보내지 않아도 개의치 않아야 한다. 그러고도 어떻게든 적당한 시기에 좋은 남자를 만나서, 기이하게 순결한 웨딩 드레스를 입고, 영원히 안락한 일부일처제의 둥지에 안착한다. 정말 힘든 역할이다.

앞선 세대의 여성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현실과 거리가 멀었던 이성관계의 수많은 선택(외도, 이혼, 동성 파트너)에 거의 분명 좌절감을 느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여성은 정반대의 문제에 맞닥뜨린다. 다른 많은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어떻게든 모두를 소유하고 행해야 한다는 기대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주요 여성인사가 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선 주요 여성 인사란 모든 일을 다 하는 여성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시야를 좁힐 필요가 있다. 어쩌면 한 우물을 파서 일가를 이루는 식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모든 일을 다 하는 건 분명 아니다. 남자는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하며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를 보자. 그가 완벽한 아빠이자 남편이었던가? 지역사회 바자회에 수시로 참가해 봉사활동을 했던 구릿빛 피부의 스포츠맨이었나? 나는 모르겠다. 그의 이런 측면을 다룬 스토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이나 버락 오바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일 이외의 삶이 있음은 우리도 안다. 그들에게도 자녀와 배우자가 있고 가끔씩 깎아줘야 하는 잔디밭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실적을 평가할 때 남성성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또는 그들의 집안사정을 너무 깊이 캐물으려 하지도 않는다.

여성이 자신, 그리고 다른 여성의 삶을 생각할 때도 이와 같은 초점, 이와 같은 좁은 시야가 필요하다. 예컨대 마리사 메이어가 야후를 살리는 동시에 직장 내 평등도 이루기를 기대하기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도록 한 뒤 그 성과로 그녀를 평가해야 할지 모른다(내가 아는 최소 한 곳 이상의 다른 대기업도 최근 재택근무를 제한했지만 뉴스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살이 좀 불었다고 아델을 비난하기보다 그녀의 비범한 음악을 즐기는 데 집중하도록 하자(래퍼 제이Z의 몸무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자신에게 비현실적으로 광범위한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시야를 좁혀, 각자의 강점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능력을 기르고, 동떨어진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붓지 않도록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여성이 많다. 그들은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고, 농촌 지역에 작은 사업체를 창업하며, 동네의 이웃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한다. 대다수는 유명인사가 아니다. 완벽하지도 않다. 모든 일을 하거나 소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며, 기술을 연마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되는 재능을 육성한다. 결국 어쩌면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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