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 와인의 왕, 왕의 와인
Wine - 와인의 왕, 왕의 와인
“와인을 생산해 시장에 파는데 최소 8년은 걸립니다.” “8년요?” “네, 포도를 수확해 만든 와인을 5년 동안 오크통에 숙성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병에서 3년 더 숙성시킨 후 시장에 내놓죠.”
5월 14일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바르바레스코에서 만난 와인생산업자 피에르 카를로 코르테제. 그는 이제 막 레이블을 붙인 ‘2006년산 바르바레스코 리제르바’를 따르면서 “곧 시장에 출시될 와인인데 너무 ‘어려서’ 마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소 설익은 과일향이 코끝을 스쳤지만 이내 묵직한 타닌이 입안에 퍼졌다. 그는 “앞으로 20~30년이 지나면 더 빛이 날 와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가 따른 와인은 ‘1985년산 바르바레스코 리제르바’. 한국 나이로 29세인 ‘청년 와인’이다. 달콤한 딸기향이 코를 자극한 후, 혀 안에선 와인이 미끄러지듯 넘어갔다. 코르테제는 “30년쯤 지나니 마실 만해졌다”며 “우리는 30~40년 앞을 생각하고 와인을 생산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나마 우리가 바롤로 지역보다는 영(young)한 와인을 만드는 편”이라며 덧붙였다.
바르바레스코에 이어 방문한 곳은 ‘바롤로(Barolo)’였다. 바롤로는 피에몬테의 마을 이름이자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말한다. 바롤로는 오래 숙성할수록 진가가 나타나는 이탈리아 대표 와인으로 ‘와인의 왕, 왕의 와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바르바레스코 와인이 부드럽고 세련된 맛이라면, 바롤로는 묵직하고 고전적인 맛이 특징이다.
저장고를 방문한 후에 와인 시음회를 가졌다. 저장고에서 페노치오가 꺼내 온 와인은 매혹적인 장미향을 뽐내는 2009년산을 필두로 코냑처럼 진득한 2001년산에 이어 구수한 부케가 일품인 1990년산, 아직도 화려한 꽃향기를 자랑하는 1982년산, 그리고 당도와 산도가 조화를 이룬 1971년산, 마지막으로 아직도 묵직한 무게감을 과시한 1964년산까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페노치오는 “이 와인들이 생산된 연도들이 바롤로 최고의 해”라며 “바롤로가 숙성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도 참석자들에게 가장 찬사를 받은 와인들은 다름아닌 1971년산과 1964년산 바롤로. 우리로 치면 이미 불혹(40세)을 넘어 지천명(50세)을 바라보는 와인들이지만 그 맛은 절정에 이르렀다.
한 와인 전문지 기자는 “오래 숙성될수록 진가가 나타나는 바롤로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며 “사람들도 이렇게 나이가 들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기슭’이라는 의미를 가진 피에몬테주.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대도시 풍경을 간직한 주도 토리노에서 차를 몰고 1시간 가량 남쪽으로 가면 차창 밖은 어느새 온통 포도밭 물결이 된다. 로맨틱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구불구불한 포도밭 구릉지대를 헤쳐가다 보면 바롤로·바르바레스코 등이 등장한다.
피에몬테의 ‘와인 수도’라 할 수 있는 알바를 중간에 끼고 수백 개의 양조장이 오밀조밀 몰려 있는 이곳은 이탈리아 전통 포도품종인 네비올로(Nebbiolo)의 최대 산지이기도 하다. 해발 200~400m 지점에서 굴곡진 경사면을 따라 펼쳐진 포도밭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영화 ‘프렌치 키스’ 등 로맨틱 무비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할 정도로 아름답다. 언덕 곳곳엔 렌트카를 세워두고 절경을 감상하는 관광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와인은 기다림의 미덕재배되는 품종은 네비올로뿐 아니라 바르베라(Barbera)·모스카토(Moscato) 등으로, 포도밭은 10m간격으로 토질이 달라지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래서 맛도 향도 생산자의 양조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서 생산자들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품종은 네비올로다. 숙성 기간에 따라 그 맛의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네비올로로 만들어도 2년 동안 오크통 숙성을 거친 와인만 바르바레스코, 3년 이상을 숙성하면 바롤로라는 이름을 레이블에 붙일 수 있다. 여기에 리제르바(Reserva)급 와인들은 최소 5년을 숙성시켜야 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양조장들은 자신들의 저장고에서 레이블을 붙이지 않은 채 2~3년간 추가로 병입 숙성을 시킨다. 와인을 빚어 세상에 내놓는데 7~8년이 걸리고, 그 와인이 제대로 된 맛을 내는데는 30~40년씩 걸리는 셈이다. 피에몬테에선 ‘와인은 기다림의 미덕’으로 통한다.
포도밭 조성까지 포함하면 대를 걸쳐 와인을 생산하는 곳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양조장들은 가족들이 모두 경영에 참여한다. 마르케스에서 홍보를 맡은 안나 아보나는 오너의 딸이다. 그는 “어릴 때 와이너리에서 태어났지만 대학에서 다른 전공을 선택했다가 결국 다시 와이너리로 돌아왔다“며 웃었다.
실제 대부분의 이탈리아 가족기업은 어린 시절부터 온 가족이 함께 경영에 매달리고 가장이 형식적으로 대표를 맡는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다음 대가 대표직을 이어받는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경영상속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편이다.
바롤로는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과 함께 세계 양대 고급 와인으로 꼽힌다. 매년 바롤로의 새로운 빈티지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와인시음회인 네비올로 프리마가 열리면 전 세계 각지에서 와인전문가들이 몰려든다. 특히 대를 걸쳐 양조방식과 철학을 공유하니 브랜드 가치도 그만큼 높다.
바롤로 지역에서 최고의 생산자로 꼽히는 피오 체사레의 경우 양조장 설립 후 지금까지 130여년동안 단 한번도 레이블을 바꾸지 않았다. 피오 체사레를 현재 경영하는 피오 보파는 ”포도 수확부터 제조방법 등 모든 게 그대로지만 요즘은 좀 더 빨리 숙성되는 와인을 만드는 게 차이점”이라며 “그래서 지금은 5~6년 된 ‘어린’ 바롤로도 마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피에몬테는 음식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도 고급 미식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실제 이 지역을 대표하는 것도 와인만이 아니다. 특히 세계 3대 진미로 불리는 흰 송로버섯(White Truffle)을 빼놓을 수 없다. 자극적이면서 흙 냄새 나는 피에몬테의 송로버섯은 그 독특한 향이 특징이다. 신선한 송로버섯을 갈아서 치즈와 함께 구운 빵 위에 얹거나, 신선한 돼지감자·야채와 그라나파다노 치즈를 넣은 샐러드에 좋은 올리브 오일과 함께 섞은 요리가 피에몬테의 대표적인 가정식이다.
10월에는 송로버섯 축제로 유명매년 한정 생산되지만 갈수록 이 오묘한 맛에 빠진 미식가들이 늘면서 그 가치는 수식상승했다. 최고급 피에몬테산 화이트 트러플의 경우 1kg당 무려 5000유로를 호가한다.
워낙 귀하다 보니 이탈리아 사람들도 진짜 송로버섯을 먹기는 쉽지 않다. 대신 파스타에 얹은 작은 조각이나 오일에 섞어 넣은 추출액 정도를 접하는데 만족한다.
송로버섯 오일만으로도 평범한 요리가 고급 미식요리로 바뀐다. 현지에선 달걀을 통째로 신선한 송로버섯 조각과 함께 유리병에 넣어 만든 스크램블용 달걀향도 특산물이다. 와인·송로버섯과 함께 피에몬테 초콜릿도 유명하다. 고급 초콜릿의 대명사로 통하는 페레로의 본사가 위치한 곳도 바로 피에몬테의 알바다.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으로 페레로는 볶은 헤이즐넛과 헤이즐넛 크림이 가운데 들어있고 그 위를 웨하스가 감싼다. 가장 바깥은 헤이즐넛 조각이 든 밀크초콜릿이 둘러싸고, 그 바삭한 식감과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움, 그리고 너트 류의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바롤로 한 주인은 “초콜릿과 달콤한 바롤로의 궁합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사실 바롤로는 초콜릿보다는 묵직하고 진한 소스의 요리가 잘 어울린다.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여행하기 위해선 렌트카가 필수다. 게스트하우스를 갖춘 양조장을 방문해 숙식을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대부분은 이 지역 중심 도시인 알바를 중심으로 여행하는 편이다. 인구 3만명의 소도시인 알바는 전형적인 ‘슬로 시티’다.
반나절이면 동네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레스토랑이나 식자재 전문숍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휴식시간이라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송로버섯 오일은 물론 고르곤졸라 치즈, 헤이즐넛 등 지역 특산물을 쇼핑하는 재미가 짭잘하다.
바롤로 마을의 명물은 중심부엔 위치한 바롤로 성이다. 중세 이전에 지어진 바롤로 성에선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바롤로 와인을 진열·판매하는 숍이 있고, 1층부터 꼭대기까지가 와인 박물관이다. 평소엔 한가한 여행을 즐길 수 있지만 송로버섯 축제가 열리는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까지는 전 세계 미식가들이 몰려들어 호텔이나 레스토랑 예약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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