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다해가는 전세, 호흡기 달고 연명
수명 다해가는 전세, 호흡기 달고 연명
또 전세 대란인가.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전세시장에 비상등이 켜졌다. 1970년대 말 이후 때만 되면 반복되는 현상이다. 게다가 집값은 떨어지는데 전셋값은 치솟는다. 일부 지역 아파트는 전셋값이 매매가를 웃도는 기현상도 나타난다.
370만 전세 가구, 350만 월세 가구 상당수가 집 없는 설움에 한숨을 쉰다. 전세난을 막을 해법은 묘연하다. 단순한 수급 문제가 아니다.
경제·인구·부동산시장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정부·집주인·세입자 모두에게 득이던 전세 제도가 순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100년을 이어온 한국 특유의 전세 시장은 사멸할까. 전세 대란 실태와 이 제도의 존폐 가능성을 짚어봤다.
8년 전 구입한 서울 노원구 중계동 85㎡(이하 전용면적, 약 25평)짜리 아파트에서 신혼 초부터 살던 이지영(가명)씨 부부는 2년 전 이 집을 전세 놓고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119㎡(약 34평) 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이사 갔다. 두 자녀에게 각 방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였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살까 고민했지만 아파트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 전세를 택했다. 중계동 집은 1억4000만원에 세를 놨고, 방학동에는 보증금 2억1000만원을 주고 들어갔다. 모아둔 돈 4000만원에 모자란 돈은 은행에서 신용대출 2000만원을 받았다. 1000만원은 시댁에서 빌렸다.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둔 요즘 이씨는 고민에 빠졌다. 방학동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5000만원이나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에 알아보니 “요즘 시세로 보면 그리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는 말을 들었다. 집주인에게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쪽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주인은 고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 강남의 보증금 4억8000만원짜리 아파트에 전세를 산다고 했다. 그런데 강남 아파트 소유주가 보증금을 1억원 올려 주거나 보증금은 그대로 두고 월세를 내는 ‘반(半)전세’로 재계약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방학동 아파트 전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당장 5000만원을 구하기 어려워 중계동 집에 세 들어 사는 신혼부부에게 전세금을 2000만원 올려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혼부부가 더는 대출 받을 여력이 없어 이사해야 할 처지라며 사정했지만 내 코가 석 자라 어쩔수가 없다”며 “왜 강남 전세난이 순식간에 수도권 전역으로 퍼지는지 생생히 체험했다”고 말했다.
전셋값 53개월째 상승 행진이씨 사례는 최근 벌어지는 전세난의 압축판이다. 서울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에서 촉발된 전셋값 급등이 서울 전역과 수도권·지방으로 확산하고, 전세 대신 반전세(보증부 월세)나 월세를 원하는 집주인이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서울 지역 20여 곳의 부동산 중개업소에 문의한 결과 전세난이 과장됐다고 답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서울 잠실동의 A부동산 중개업소 대표는 “한 달동안 아파트 한 채도 거래하지 못했다”며 “그나마 전세 중개로 먹고 사는 데 전세를 월세로 바꾸려는 집주인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인근 업소 관계자 역시 “집을 사겠다는 문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전·월세 상담만 있다”며 “이대로 가면 가을철에 전세난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전국 주택 전세가격은 2008년 말보다 31% 올랐다. 같은 기간 매매가격 상승률의 3배에 이른다. 전셋값은 2010년 7.1%, 2011년 12.3% 오른 후 지난해에는 주춤했지만, 올 들어 다시 가파른 상승세다. 올 상반기 아파트값 상승률은 이미 지난해 수준에 육박했다. 상반기 서울 아파트 전세 가격은 지난해 말 대비 2.2% 올랐다.
지난해 연간 상승률은 2.2%였다. 비수기인데도 고삐 풀린 전셋값 상승은 멈출 줄 모른다. 7월 서울 주택 전셋값은 전월 대비 0.5% 올라 21개월 만에 최대폭을 기록했다. 전국 주택 전세가격은 53개월째 오름세를 이어갔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전국 평균 65%에 이른다. 2003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백약 무효인 정부 전세 대책아파트 매매 가격은 하락·정체인데 전셋값만 오르는 원인은 일단 수급 불균형에서 찾을 수 있다. 아파트 매물은 많은데 사려는 이가 적다. 가격은 뚝뚝 떨어진다. 아파트 입주 물량 자체도 줄었다. 무주택자들은 향후 아파트 가격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아 주택 구매보다는 전세를 선호한다. 집주인은 전세 보증금을 받아 수익을 낼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 보니 월세로 돌려 수익률을 높이고 싶어한다. 전세 물량이 주니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되거나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 제도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으로 내다본다.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이 흔들린 때문이다. 손재영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주택시장 여건을 볼 때 전세 제도의 기반이 유지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며 “집값이 안정되는 시기가 몇 년만 더 지속되면 전세 제도는 예상보다 빨리 사라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세 제도가 사라질 가능성을 따져보려면 이 제도가 왜 한국에만 존재하고 이토록 오래 유지됐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고려·조선 시대에도 오늘날과 비슷한 임대차 방식이 존재했지만 현재와 같은 전세 제도가 정착·확산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직후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전쟁으로 남한은 공업시설 40%, 주택 16%가 파괴됐다. 전쟁 이후 외국 원조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도시로 인구가 몰렸지만 정부는 주택을 공급할 여력이 없었다.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재정은 수출산업 육성에 집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유럽이 재정·조세·금융지원을 통해 임대주택을 대량 공급한 것과는 달랐다. 주택금융도 미비해 집주인들은 월세보다는 목돈이 들어오는 전세를 선호했다. 다소 여유가 있는 임차인은 보다 나은 주거생활을 위해 전세 임대를 원했다. 개인과 개인 간 전세 임대차는 관습으로 굳어졌다.
집값 상승기엔 집주인·세입자·정부 모두에 이익전세 제도는 오랫동안 집주인·세입자·정부에 모두 득이 됐다. 집주인은 집을 빌려주고 무이자로 목돈을 마련해 또 집을 사거나 다른 용도로 썼다. 일종의 사금융 역할을 한 것이다. 전세금을 은행에만 넣어놔도 이자 수익이 짭짤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1970년대 평균 16.5%, 1980년대 10.2%, 1990년대 9.6%다.
주택을 구입할 여력이 안 되는 세입자는 반값 정도에 원하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전세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는 강제 저축 성격이 있어 무주택자들이 자기 집을 마련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정부는 민간이 알아서 임대주택을 공급해주니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었다.
1980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이 제도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파트가 늘고 집값이 뛰면서 전셋값도 덩달아 올랐다. 전세 가격은 소득 증가분의 수십 배까지 상승했다. 6개월에서 1년 이하로 전세 계약이 이뤄지다 보니 주거 불안이 확산됐다. 1980년대 말 정부는 전세계약 2년을 보장하고 보증금 인상을 규제하는 등 시장에 개입했지만 전세 가격은 오히려 폭등했다.
1993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특이하게 존재하는 주거 점유형태인 전세 제도는 국가 전체로 볼 때 비제도권 금융 확대를 초래하고, 주택금융이 미약한 상황에서 주택에 대한 투기수요를 자극할 수 있으며, 잦은 이사를 통한 임차인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주택매매가격은 안정됐으나 전세 가격은 상승하고 있고 주거 불안이 심화되는 등 임차인의 상대적 피해가 점점 커져 왔다는 사실에서 전세 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
1990년 주택 200만 가구 공급 등으로 전세 시장은 안정됐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아파트값이 급등하고 전세 가격도 다시 큰 폭으로 올랐다.
과거에도 전세난은 빈번했지만, 요즘 상황은 ‘전세의 종언·사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심각하다. 부동산 중개업소마다 전세 매물은 줄고 월세가 넘친다. 정부는 ‘목돈 안 드는 전세’, 하반기 매입·전세 임대주택 3만6000 가구 공급, 전세자금 대출 한도 상향 등 대책을 대놨지만 백약이 무효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상반기 수도권 월세 거래는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했다. 전세 거래는 2% 줄었다.
또한 2011년 서울 지역 전·월세 거래 중 월세 비중은 17.1%였는데 올 6월 말에는 20.3%로 늘었다. 올 1월에는 전국 주택 전·월세 거래 중 월세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40%를 돌파했다. 올 상반기 전국 아파트 단지 중 전·월세 거래량 2위를 차지한 서울 잠실의 리센츠 아파트는 월세 비중이 36.3%로 2011년 28%에 비해 대폭 늘었다. 주택 임대 시장이 전세 중심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구조 변화가 이미 시작됐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전세 매력 떨어지자 월세 전환물론 전세 제도가 단기간에 사라지기는 어렵다. 전세가 월세로 바뀌려면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한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국내 전세보증금 규모는 340조원에 달한다. 주택이 여러 채 있고 현금 여력이 있는 임대자는 월세 전환이 쉽지만 대출이나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구입한 집주인은 월세 전환이 쉽지 않다. 또한 월세로 바꿀 경우 집주인은 공실 리스크나 월세 미납과 같은 분쟁을 감내해야 한다. 세입자 역시 월세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국토교통부 ‘2012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무주택자의 80%는 월세보다는 전세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입장에서도 월세 전환을 유도할 이유가 없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세가 월세로 모두 전환하면 연간 15조5000억원의 추가적인 현금 흐름이 생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체로 집주인은 고소득층, 세입자는 중산층 이하일 가능성이 크다.
고소득층은 중·소득층과 비교해 소득에 비례해 소비가 늘지 않는 한계소비성향이 짙다. 오히려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중산층 이하 세입자가 소비를 줄일 수 있다. 내수 침체를 걱정해야 한다. 또한 전세가 월세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양호한 주거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서민층 주거 안정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전세 제도 결국엔 사라질 운명그럼에도 전세에서 월세로의 전환은 대세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일단 전세 주택을 공급하는 다주택 보유자들이 더 이상 전세를 선호하지 않는다. 수지가 맞지 않아서다. 전세 제도는 주택 매매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른다는 전제가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 집값이 하락·정체하고 앞으로도 오를 가능성이 없다면, 전세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집을 팔아 예금에 넣으면 이자 수익을 더 얻을 수 있다. 전세를 반전세나 월세로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최근 월세전환율(전세를 월세로 바꿀 때 기대할 수 있는 이자율)은 대략 6~7%다. 5억원짜리 전세를 보증금 2억원에 월세 150만원인 반전세로 돌리면 집주인은 보증금 차액인 3억원에 대한 투자 수익률 6~7%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서울시 아파트 월세 거래 건수는 2010년 1만2064건에서 지난해 2만7299건으로 늘었다. 주택을 구매할 여력이 있는 세입자들도 전세 시장에 머문다.
과거에는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60%에 육박하거나 넘어서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전환되면서 집값이 상승하는 패턴을 보였다. 하지만 전세값 폭등 뒤 집값 상승이라는 공식은 이미 깨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전환하는 대책 마련을 주문하지만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아파트를 사느니 전세에 머물려는 경향이 짙다.
더욱이 전세 대란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무주택 전세가구는 주택을 구입할 여력조차 없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국내 무주택 전세가구의 평균 보증금은 전체 금융자산의 65%를 차지한다. 전세 보증금이 주요 자산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전국 평균 주택 가격의 5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출을 받아야 집을 살 수 있다. 더욱이 무주택 전세 가구는 이미 전세자금 대출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국토교통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세 가구 중 전세자금 대출을 받는 가구는 전국 평균 13.5%. 이들이 받은 평균 전세 대출금은 40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전체 평균 보증금의 30% 정도다. 저소득 전세 가구는 상황이 더 나빠, 전세자금 대출이 비중이 보증금의 37%에 달한다. 6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전세자금 대출 건수는 71만 건, 대출 잔액은 25조5000억원이다. 전년 대비 22.8% 늘었다. 2008년 말에는 8조6000억원이었다. 전세 보증금 상승을 대출로 해결했다는 얘기다.
또한 저소득층 전세 가구는 전셋값 상승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주택금융공사가 올 초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소득이 낮은 1~2분위 전세 가구 중 87%가 전세금 상승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세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면 금융권 추가 대출을 받거나 반전세·월세로 전환해야 할 처지다. 이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1~2인 가구 증가와 저성장·저금리 기조, 주택 보유에 대한 인식 변화, 주택 수급 전망 등을 고려할 때 향후 부동산 시장은 안정세를 유지할 것이라는 게 부동산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부동산 거래 부진이 이어지면 전세 시장 불안은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 임대주택 시장도 전세에서 월세로 빠르게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이종아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현재 주택시장에서 전세 거주자가 선호하는 아파트 공급은 감소되는 추세지만 월세 중심의 임대형 주택 공급은 증가하고 있어 전세에 대한 수급 불균형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연구위원은 “주택 가격 승상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고 장기간 저금리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자산 여력이 있는 임대가구를 중심으로 월세 전환 요구는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세가구 87% “전세값 상승 대책 없다”손재영 교수 역시 “정부는 전세 가격 상승과 제도의 소멸이라는 흐름을 받아들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분석실장은 “최근의 매매 가격 안정과 전세 가격 상승은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중장기적인 구조변화 가능성을 암시할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며 “장기적으로는 기존 전세주택이 점차 월세로 전환되면서 전세제도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 경우 서민층 주거 비용은 증가하며 주거 불안이 심화될 수 있다”며 “정부의 정책도 이런 주택시장의 구조변화 가능성을 전제로 수립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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