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전세시장 구조 변화는 천재(天災), 정부 땜질식 정책은 인재(人災)

전세시장 구조 변화는 천재(天災), 정부 땜질식 정책은 인재(人災)

임대차시장 패러다임 변화에도 전셋값 안정에만 몰두 주택매매 수요 급감, 집주인 월세 선호가 전세대란 주요인



‘가랑비에 옷 젖는다’. 요즘 전세시장에 딱 맞는 표현이다. 주간 상승폭은 작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슬금슬금 오르기만 하더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전셋값이 50주 연속 상승했다. 이 기간 누적 상승률은 6%대에 육박한다. 올 상반기 전국 주택 전세가격 상승률은 1.72%.

지난해 연 평균 상승률(3.52%)을 감안할 때 크게 오른 건 아니다. 하지만 ‘전세대란’ 사태를 빚은 2010~2011년에 전셋값이 너무 많이 오른 탓에 임차 수요자들이 느끼는 체감 상승률은 높다. 2008년 말 이후 현재까지 누적 상승률은 30%가 넘는다. 세입자의 등골이 휠 수 밖에 없다.

전셋값이 오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 전세 찾는 사람은 많은데 물건이 적으니 값이 오른다. 전통적인 전세난 해법은 간단했다. 주택 공급을 늘려 자가 소유를 확대하거나 임대주택을 늘렸다. 요즘은 다르다. 주택 공급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지만 전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세입자들은 매매가격 하락에 대한 불안심리 때문에 집을 사려하지 않고, 집주인들은 저금리 기조에 따라 전세를 월세로 돌린다. 전월세 시장에 구조적 변화가 이뤄지는 중이다.

아직 정부 대책은 변화를 따르지 못한다. 땜질식 처방으로 전세난을 오히려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택 임대차 시장이 전세 중심에서 보증부 월세(반전세)나 순수 월세로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정부 정책은 전셋값 안정에 초점을 맞춰 효과가 제한적이다.

임대주택 공급을 늘리면서 전세 수요도 함께 늘리는 엇박자 정책도 문제다. 작금의 전세난은 주택시장 침체와 저금리에 따른 임대차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불러온 ‘천재(天災)’인 측면이 크지만 정부의 임기응변식 정책으로 ‘인재(人災)’가 보태진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전세가격이 연 평균 10% 이상 급등하면서 전셋값 상승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시기는 과거 두 차례 있었다. 198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는 주택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거나 외환위기 탓에 일시적으로 공급 물량이 대폭 감소한 영향이 컸다. 정부가 서민 주거안정을 위해 주택 공급을 늘리면서 전셋값 상승이 진정되고 집값도 함께 안정됐다.

2009년 이후 이어진 전세난 역시 수급 불균형에서 비롯됐지만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택 공급이 꾸준히 늘었지만 전세가격은 떨어지지 않고 강세를 보였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이유는 전월세 시장의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택구매 수요가 크게 줄었다.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없다 보니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입하기 보다는 보증금을 올려주고라도 그냥 전세로 눌러 앉는다. 아파트를 구입할 여유가 충분한 사람도 나중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전세를 찾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60%를 넘어서면 매매수요로 전환한다는 공식이 깨진 지 오래다. 주택 거래량도 2006년 108만2500건에서 지난해 73만5400건으로 급감했다.

함영진 부동산 114 리서치팀장은 “집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심리가 큰데다 이미 전셋값의 10~20%를 대출받은 세입자들도 많아 주택매입여력도 떨어진 상태”라며 “1~2인 가구가 늘면서 주택구입 실수요자인 젊은층이 전세로 계속 머문 것도 전셋값을 끌어올리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국민주택기금 전세대출 19조5700억원 넘어과도한 레버리지를 통해 주택을 구입한 탓에 빚에 허덕이는 하우스푸어가 급증한 것도 전세난에 한몫 했다. 하우스푸어가 소유한 전세 물건은 자칫 보증금 회수가 쉽지 않은 ‘깡통전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입자들로서는 은행 대출이 많지 않은 ‘안전한 전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융자가 거의 없거나 적은 ‘융무(融無) 전세’가 귀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전셋값을 밀어 올린다는 분석이다.

임차인들은 전세를 선호하지만 집주인들은 갈수록 월세를 선호하는 것도 전세난의 원인이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집주인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활용한 이자수입 보다 월세 수입이 더 짭짤하다. 1995년 14.5%였던 월세 가구 비중은 2010년 21.5%로 증가했다.

김덕례 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저금리 시대에 집주인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통한 재투자수익보다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는 월세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전세보증금 상승분을 마련하기 힘들어 울며 겨자먹기로 보증부 월세나 순수 월세를 받아들이는 세입자가 늘고 있지만 대출을 받아서라도 전세를 유지하려는 이들도 많아 전세가격을 떠받치는 요인이 된다.”

전세가격 안정은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역대 정권이 전셋값이 뛸 때마다 서둘러 안정대책을 내놓는 것도 주거 스트레스로 인한 민심 이반을 우려해서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의 전월세 대책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전셋값을 잡으려면 공급을 늘리고 수요를 줄여야 하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확대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전세난이 불거질 때마다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대책은 공공임대주택 확대와 같은 공급 정책과 전세 및 주택구입 대출자금 지원 확대와 같은 금융지원정책이다. 하지만 건설형 공공임대주택은 공급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당장 발등에 떨어진 전세난을 해소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 보니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정부가 국민주택기금 전세자금대출을 늘리거나 보증 한도를 확대하고, 은행 융자를 더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주요 대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쌈짓돈처럼 사용하는 국민주택기금의 전세대출 규모는 6월 말 현재 19조5700억원에 달한다. 주택금융공사의 보증을 통한 전세자금대출도 크게 늘었다. 서민이 별도의 담보나 연대 보증없이 은행에서 손쉽게 전세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신용보증을 해주는 제도로, 전월세 안정 대책이 발표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2008년 3조5490억원이었던 전세자금보증 공급액이 지난해 10조8679억원으로 급증했다.

올 상반기에도 5조9444억원이 공급돼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2%가 늘었다. 특히 대출가구 수와 기한연장 공급액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셋값이 올라도 자가소유로 전환하지 않고 계속 전세로 머무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대출가구 수는 2009년 19만9128가구에서 지난해 32만7218가구로 증가했고, 지난해 상반기 1조3011억원이었던 기한연장 공급액은 올 상반기에는 2조2511억원으로 73%나 급증했다.

이처럼 전세자금 대출 규모가 증가하면 아파트 전셋값은 덩달아 오를 수밖에 없다. 2010년 1분기 전국 아파트 전세 가격은 3.3㎡당 410만1000원이었다. 올 1분기에는 525만4000원으로 올랐다. 정부가 전세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해주니 집주인으로서는 그만큼 보증금을 올려 받기가 쉽다.

여기에 은행들이 앞다퉈 전세대출 상품을 내놓고 대출 수요를 자극한 것도 전셋값 상승을 부채질했다. 국민·우리·신한·하나·농협·기업·외환 등 7개 시중 은행의 전세자금 대출잔액은 10조3875억원에 이른다. 18개 시중 은행과 제2금융권 등으로 확대하면 대출 규모는 크게 늘어나지만 정부는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전세난 해소를 위해 민간 미분양 아파트를 전세주택으로 활용하면 인센티브를 주거나 매입·전세임대주택을 확대하고, 민간 임대주택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준공공임대주택도 하반기에 도입 예정이다. 상당수가 이전 정부의 전월세 안정 대책에 포함된 내용이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것들이다.

김규정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준공공임대주택이나 매입임대·전세임대는 기존 주택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월세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좋은 자원이 될 수 있다”며 “전월세 시장의 구조 변화에 발맞춰 지역·소득·임차방식별로 보다 근본적이고 중장기적인 주택 임대차 정책을 모색하고 집을 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매입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길을 터줘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가전도 '구독' 시대...삼성·LG 가전 구독 경쟁 본격화

211월 수출 전년比 1.4% 증가...14개월 연속 '수출 플러스'

3서민 지갑 꽁꽁 얼었다 ...소매판매지수 8개월째 '마이너스'

4'스타벅스의 최대 경쟁자' 스페셜티 커피는 왜 특별한가

5메르켈 전 총리가 말하는 자유

6SPC그룹, '변화 혁신' 강조...삼립 황종현·김범수 공동대표 체제

7이상기후가 물가 끌어올린다...초콜릿·커피 가격 급등

8 트럼프, FBI 국장에 '충성파' 카시 파텔 지명

9“미모의 여자 친구...” 유병재 열애 공개

실시간 뉴스

1가전도 '구독' 시대...삼성·LG 가전 구독 경쟁 본격화

211월 수출 전년比 1.4% 증가...14개월 연속 '수출 플러스'

3서민 지갑 꽁꽁 얼었다 ...소매판매지수 8개월째 '마이너스'

4'스타벅스의 최대 경쟁자' 스페셜티 커피는 왜 특별한가

5메르켈 전 총리가 말하는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