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PLOMACY - 한일 관계 악화, 답은 언론에 있다
DIPLOMACY - 한일 관계 악화, 답은 언론에 있다
“현재 한국의 치안은 붕괴 직전이다. 경제위기로 인해 실업자와 노숙자가 급증하면서 치안이 급격히 악화됐다. 일부 젊은이들은 무기를 들고 ‘일본인 사냥’에 나섰다. 사기를 쳐서라도 해외로 도피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심지어 최대 야당의 한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암살 위기까지 시사했다.”
한국에 한번이라도 발을 디뎌 본 사람이라면 위 글을 읽고 지나치게 허황되다고 느낀 나머지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할 법하다. 그러나 이 글은 영화도, 소설도 아니다. 일본의 한 언론사 웹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의 도입부다. 이 기사는 한국 주재 일본인들의 입을 빌려 “젊은이들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일본인을 사냥하러 다닌다”거나 “한국에서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한국인들이 대거 필리핀 등지로 도피 중”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사실인 양 전한다.
심지어 기사 말미에서는 박 대통령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 칭하고 남재준 국가정보원 원장을 ‘제2의 김재규’로 묘사한 홍익표 전 민주당 대변인의 말을 자의로 곡해해 “박근혜 대통령 암살 위기”를 지어내는 놀라운 상상력까지 펼쳤다.
문제는 이런 기사를 실은 언론의 영향력이 무시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 기사가 실린 곳은 일본의 일간지 석간후지의 웹사이트다. 석간후지는 2012년 기준 총 발행부수 155만부를 기록한 대형 매체다. 이 기사를 쓴 가가 고헤이 기자는 일본 최대 주간지 ‘주간분 ’과 대형 출판사 ‘신쵸사’를 거치며 제1회 편집자가 선정한 잡지기자상 특종상을 수상한 베테랑 언론인이다.
근거 없는 혐한 기사를 게재하는 언론은 한두 곳이 아니다. 도쿄신문은 10월 5일 특집기사를 통해 일본 언론의 혐한 보도를 집중 조명하며 대다수 기사가 과장과 억지 해석으로 점철됐다고 분석했다. 작은 사실관계를 크게 부풀리고 선정적인 제목을 붙인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판매 부수다.
도쿄신문의 취재에 응한 한 주간지 기자는 일부 언론이 앞다퉈 혐한 기사를 싣는 이유로 “그런 기사가 잘 팔리기 때문”이라며 혐한 보도 지지층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언론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일본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을지언정 한국 언론 또한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기는 마찬가지다. 한 가지 예가 수년 전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김연아 악마가면’ 사건이다.
2011년 1월 25일 열린 아시안컵 한일전 경기에서 일본 응원단이 김연아 선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의 눈을 뚫고 붉은 뿔을 달아 악마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가공했다는 주장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한국인들의 공분을 샀다. 일부 언론은 이 가면을 ‘이시마타라’라는 일본의 풍습과 연결짓기까지 했는데,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시마타라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면으로 만들어 쓰고 서로에게 욕하는 놀이’다. 이에 따르면 일본 응원단은 한국을 저주하기 위해 상징적인 인물 김연아의 가면을 악의적으로 가공한 셈이다.
그러나 이 가면이 사실은 한국 축구팀 ‘붉은악마’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서 제조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오히려 일본 언론의 빈축을 샀다. 언론이 기사에 곁들인 ‘악마가면’ 착용 일본 응원단 사진은 경기 당일이 아니라 2010년 10월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친선경기 때 촬영됐다는 사실도 더불어 알려졌다.
한국 언론에서 거론된 ‘이시마타라’라는 풍습은 오히려 일본에서 혐한감정을 부추겼다. ‘대체 우리 일본인도 처음 듣는 일본 풍습을 한국 언론은 어떻게 알고 소개했냐’는 것이다. 이 풍습 자체가 한국 언론의 날조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한국 언론들은 최소한의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선정적 기사를 내거느라 바빴던 것이다. 대형 언론사부터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까지 대부분 언론이 인터넷판을 통해 ‘악마가면’을 보도하며 일본을 성토한 반면, 그 가면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팀 응원도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알린 매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일 양국의 선정적, 무비판적 보도는 한일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의 혐한 보도와 한국의 반일보도를 저널리즘의 전반적인 질 저하와 연결시키는 이유다. 부울 경언론학회에서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강경수 동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일부 언론의 선정적 반일보도는 저널리즘의 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언론 제작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다 보니 화제가 될만한 건수를 선정적으로 내보내 판매부수나 기사조회수를 늘리려 하는데, 한일관계도 예외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온다. “일본엔 온전한 의미에서 ‘비판적 언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사노 겐이치 일본 도시샤대학 미디어학과 교수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겐이치는 일본 언론이 정치인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서도 비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데 그친다고 지적했다.
일본 우경화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아베 신조 총리 취임 후 불거지는 일본 우경화 논란은 반일보도 일색인 한국 언론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언론은 앞다퉈 일본이 우경화된다고 보도한다. 일본 우경화를 입증하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여지 없이 기사로 쓴다. 이 과정에서 아베 총리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같은 정부 인사들은 물론 2ch(2채녈), 재특회 등 대표성이 없는 우익 세력의 자극적 발언도 종종 인용된다.
아베 총리가 탑승했던 훈련기에 새겨진 731, 시구할 때 입은 유니폼 등번호 96 등 우경화와 연관될 만한 요소는 총동원하며 우려를 표했다. 731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생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쳤던 731부대를, 등번호 96은 개정을 노리는 헌법 96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의혹에 불과할 뿐 숫자의 의미를 추정할 아무런 단서가 없었음에도 한국 언론은 이를 ‘일본 군국주의의 도발’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731이라는 숫자의 역사적 의미를 간과한 일본 정부의 부주의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를 일본 우경화와 연결지으려면 최소한의 근거는 있었어야 했다. 많은 한국 언론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731부대와 아베가 탑승한 훈련기를 연관지은 미국 워싱턴DC 소식지 ‘넬슨리포트’를 인용했지만, 정작 넬슨리포트는 수일 뒤 정정 보도를 내고 “신뢰도가 매우 높은 아베의 한 측근”을 인용하며 “아베 총리는 어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731이 적힌 훈련기에 탑승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넬슨리포트를 인용한 수많은 매체 중 넬슨리포트의 정정보도 소식을 알린 매체는 단 한 곳뿐이었다.
일본 우경화를 강조하는 기사들에 따르면 일본은 아베 총리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우경화하고 있으며, 헌법 개정을 통해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고 심지어는 핵무장 가능성까지도 넘보는 위험한 국가다. 실제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위기 의식은 크게 고조됐다. 동아시아연구소와 언론NPO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국가를 묻는 질문에 한국인의 43.9%가 일본을 꼽았다.
한국이 위협적이라고 응답한 일본인이 12.2%인 것에 비해 4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또 한일 양국 국민의 90% 이상이 언론매체에서 상대국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고 나타났다. 양국 언론이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을수록 언론에 크게 의존하는 국민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보도는 최악의 상황만을 상정해 선정적으로 편집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일본인이 아베의 우경화 행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베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 정책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둔 덕분이라고 대다수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012년 12월 여러 일본 언론사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헌법 9조 개정에 찬성하는 일본인은 30% 안팎인 반면 반대 의견은 절반이 넘는다. 핵무장의 경우는 찬성 24%, 반대 73%로 반대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참하게 패한 아픈 기억을 가진 일본인 대다수는 전쟁이라면 진저리를 친다. 반전과 평화에 너무 심취했다는 뜻에서 일본인 스스로를 비판하는 ‘평화바보(平和ボケ)’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NHK방송문화연구소가 2013년 8월 실시한 ‘평화관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인들의 평화 의식을 알 수 있다.
20대 이상 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 따르면 일본이 인근 해역 등에서 우발적으로 전투에 휘말렸을 경우 ‘방어에 전념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5%, ‘무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대응한다’는 31.2%로 나타났으며 ‘즉시 반격한다’는 13%에 지나지 않았다. 자위대 증강 여부에 대해서는 54.8%가 ‘지금 이대로 좋다’고 응답한 반면 ‘증강하는 편이 좋다’는 응답자는 29.6%로 나타났다. 또 일본이 침략을 받을 경우 직접 나서서 싸우겠다고 답한 인원은 6.3%뿐이었다.
언론은 뭘 해야 하나이처럼 일본 국민 대다수의 생각은 일부 우익 정치인들과 다르다. 일본통으로 불리는 신각주 전 주일 한국대사가 “일본의 정치인과 국민을 일체화해 대응하는 건 일본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는 이유다. 한국의 반일공세가 계속되면 일본 국민도 이에 반감을 갖게 된다.
강경수 교수는 더이상의 갈등을 막으려면 언론이 한일 양국 국민 간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정적 보도 탓에 악감정만 커져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본 관련 보도가 주로 정치면, 외교면에서만 다뤄지는 점은 문제다. 그런 기사들은 아무래도 부정적인 내용일 경우가 많다. 민감한 주제만 다루지 말고 일본의 문화 관련 보도라든지 일반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내용을 전하면 상대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형성에 도움을 준다.”
여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다. 게이오기 주쿠대 SFC연구소의 후루이치 노리토시 연구원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국민들의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후 국제적으로는 연합군 주도 하에 이뤄진 전쟁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유독 일본에서만 여러가지설들이 난립한다. 나치를 정당화하는 발언이 죄로 여겨지는 독일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이 과거의 만행을 수 차례 사과하는 한편 이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는 것도 일본인 사이에 ‘집단기억’이 형성돼 있지 않은 탓이라고 후루이치는 말했다. 자국 내부의 논리가 아닌 국제적 관점에서 사안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의 순기능이 강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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