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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넘고 기회 잡은 ‘운삼기칠(運三技七)’

위기 넘고 기회 잡은 ‘운삼기칠(運三技七)’

삼성 ‘뭘 하든 1등’, 현대차 ‘최강의 추격자’, SK ‘위기 전에 승부수’, LG ‘더 강한 2인자’
지난해 경기도 수원 디지털시티에 문을 연 삼성전자 모바일 연구소.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 후 성장 둔화 우려에 시달렸지만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견고한 입지를 바탕으로 올해도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8위.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2013년 인터브랜드 발표) 순위다. 1위부터 7위까지는 모두 미국 기업이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모든 기업 중에서 1위다. 아래를 보면 이 순위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도요타·벤츠 등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는 물론 나이키·이케아 등도 삼성에 뒤처진다. 1994년 만해도 상상 밖의 범주에 속한 기업들이다. 1990년대 삼성의 목표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소니는 40위권 밖으로 처졌다. 불과 20년 사이에 벌어진 역전극이다.

주역은 삼성전자다. 반도체와 휴대전화·가전제품이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을 상상하기 어렵다. 1980년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일본을 추격하던 삼성은 1992년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D램 업계 1위로 올라섰다. 1994년엔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하며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 자리를 확실히 꿰찼다. 그 뒤로 20년 간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휴대전화는 더 드라마틱했다.

‘국내에서 모토로라를 잡겠다’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했지만 2012년 삼성은 세계에서 휴대전화(스마트폰 포함)를 가장 많이 파는 기업이 됐다. 소니에 이어 늘 2위였던 TV 시장에서도 2000년대 중반 역전에 성공했다. 시작은 추격자였지만 끝은 언제나 1등이었다. 2004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윌슨 로스만은 “삼성은 모두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내놓는다”며 “삼성은 혁신자(Innovator)”라고 말했다. 자동차가 삼성의 유일한 실패작이었다.



투자·인재·긴장감이 만든 삼성의 성공이 모든 성과는 ‘공격적 투자’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공장 증설에 수 조원을 투자했을 때부터 재계에선 ‘삼성=투자’라는 공식이 통했다. 투자의 방향과 액수부터 남달랐다. 삼성이 지난 20년 간 전년에 비해 투자를 줄였던 건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1998년 단 한 해뿐이었다.

삼성은 올해도 사상 최대인 5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매출의 10%를 초과하는 엄청난 돈이다. ‘투자해야 새로운 게 나온다’는 원칙은 지난 20년 간 삼성을 관통한 핵심 DNA다. 매년 세계 최초로 새 반도체를 내놓은 것, 경쟁업체와의 기술 격차를 벌릴 수 있었던 것, 새로 뛰어든 사업에서 재빠르게 1등을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과감한 투자가 뒷받침된 때문이다.

투자를 혁신으로 연결할 인재를 적절히 확보한 것도 삼성의 성공 요인 중 하나다. 삼성그룹은 인재 영입 실적을 연말 사장단 업적 평가에 반영한다.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특유의 천재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실력이 있다면 학연·지연·혈연을 따지지 않는다.

1980년대 말 삼고초려 끝에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을 영입한 일, 1994년 지방대 출신인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을 발탁한 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황 전 사장은 삼성전자의 반도체 중흥기를 이끌었고, 이 부회장은 애니콜 신화를 쓰며 삼성전자를 휴대전화 1등 기업으로 만들었다. 윤종용·이윤우·최지성 전 삼성전자 부회장 등도 천재론을 현실로 옮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디지털 전환기였던 2000년대 들어 경쟁사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기술인력이 삼성에 많았기 때문이다.

조직 전체에 흐르는 특유의 ‘긴장감’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이 잘한다고 할 때 더 긴장하라’는 이 회장의 리더십은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고 했던 1993년 신경영 선언부터이 회장은 20년 간 말로, 행동으로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했다. 2010년 2년 만에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이 회장은 “앞으로 10

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충격요법을 썼다.



‘세계 5위’ 목표 10년 만에 이룬 현대차애니콜 브랜드 출시 이후 삼성 휴대전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때 ‘휴대폰 화형식’을 연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불량률이 10%가 넘는다는 보고를 받고 진노한 이 회장은 1995년 3월 경북 구미 사업장에서 수거된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웠다. 2000명의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였다. 불구덩이에 던져진 제품은 500억원 상당이었는데 당시 삼성전자 총 영업이익의 7~8%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을 기만하는 것”이라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삼성그룹 전반에 품질경영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됐다. ‘삼성 제품은 믿고 써도 된다’는 신뢰가 퍼지고, 삼성이 애프터서비스에 강한 기업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스마트폰 시장의 경쟁 심화, 신사업의 부진 등으로 삼성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1등을 지키려면 ‘지금 나와있는 것 중 최고’가 아닌 ‘이제껏 없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까지 삼성이 해온 것만 놓고 본다면 ‘그 무언가’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2000년 현대그룹에서 독립한 현대자동차그룹은 주력인 현대·기아차의 고성장을 발판으로 재계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출범 당시 ‘2010년 글로벌 5대 자동차 메이커가 되겠다’던 목표도 이뤘다. 현대·기아차는 2010년 전 세계 시장에서 약 570만대의 완성차를 판매해 포드를 6위로 밀어내고 처음으로 5위에 올라섰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 전통의 강자들이 실적 부진으로 쓰러지는 사이 현대·기아차의 판매대수는 2000년에 비해 오히려 3배 늘었다.

미국 시장 공략에 성공한 게 컸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았던 2008년 이후 현대·기아차의 판매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평판이나 브랜드 가치에 의존했던 구입 패턴이 실‘ 속형’으로 바뀌면서 소위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차’라는 인식이 퍼진 덕분이었다. 원화 가치 약세에 따른 가격 경쟁력, 2009년 도요타의 대량 리콜 사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일본 자동차 업체의 생산 감소 등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

그냥 얻은 결과는 아니었다. 불황에도 해외 생산기지를 늘리는 공격적인 투자 전략을 썼고, 품질 향상에 사활을 걸었다. 1990년대까지 ‘그냥 싼 차’였던 현대·기아차의 이미지를 바꾼 데는 정몽구 회장의 뚝심이 있었다. 정 회장은 2002년 새 경영방침의 핵심으로 품질경영을 들고 나왔다. 미국에서 현대·기아차 품질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쏟아지던 때였다. 이후 매년 신년사에 품질경영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품질총괄본부를 만들어 매달 두 번씩 회의를 직접 주재했고, 부품사들과 협의회를 만들어 개선과제를 내놓도록 했다. 불량이 나오면 담당 임원을 과감히 해고했다. 2002년 6월 전장부품이 주행 중 엔진이 멈추는 결함의 원인이란 지적이 나오자 전수검사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 일화도 유명하다. 센서나 컴퓨터를 달기 전에 일일이 다시 검사를 하라는 얘기였다. 정 회장의 지시로 공장마다 각각 1000억원 이상을 들여 전수검사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후 전장부품 때문에 발생하는 엔진 결함은 크게 줄었다.





섬유→정유→통신→반도체’ 끝없이 변신하는 SK1999년 업계 최초로 시작한 ‘10년 10만 마일 보증’ 서비스와 2008년 선보인 실직자 차량 무상반납 프로그램 등 창의적인 마케팅 전략도 한 몫 했다. 특히 신차를 산 뒤 직장을 잃게 되면 차를 원래 값에 다시 사주는 실직자 프로그램은 미국 내에서 현대·기아차가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12년 말 불거진 연비 과장 논란에 대해서도 발 빠른 사과와 보상으로 피해를 줄였다는 평가다. 미국 환경보호청(EPA) 권고에 따라 연비 하향을 결정하고 즉각 고객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 소비자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 대해서도 약 4억 달러(4200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지난해부터 미국 시장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실제 판매량은 총 125만6000대로 전년(126만1000대)에 비해 소폭 감소했다. 점유율도 8% 초반으로 떨어졌다. 원화 가치 상승에 따른 부담도 크다. 하지만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신형 제네시스, 풀체인지 쏘나타 등 신차 출시 사이클이 좋고, 중국 등 신흥국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어서 사상 처음으로 연간 판매량 800만대 고지에 올라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SK는 ‘성장 정체론’이 불거질 때마다 사업 다각화로 활로를 찾았다. 1950년대 섬유회사로 출발한 SK(당시 선경)는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해 정유 사업에 뛰어들었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마련했다. 한국전기통신(현 KT)의 무선호출(삐삐) 부문 자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은 1980년대 후반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SK가 인수에 성공했는데 1997년 SK텔레콤으로 이름을 바꿨고, 1999년 제2 이동통신 사업자였던 신세기통신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급속도로 성장한 SK텔레콤은 현재 50%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통신업계 최강자가 됐다.

한국이동통신 인수가 최종현 전 회장의 작품이었다면 하이닉스 인수는 최태원 회장의 승부수였다. 2011년 SK가 하이닉스 인수에 나설 때만해도 주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SK의 사업 포트폴리오로는 반도체와 시너지를 내기 어렵고, 너무 큰 인수비용(약 3조4000억원)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SK하이닉스는 그룹의 새로운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로 떠올랐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인 14조원의 매출과 3조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할 전망이다. ‘지난해 반도체 사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업이 부진했다’는 김창근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의 신년사에서 달라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10년 이상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설움을 겪었던 SK하이닉스는 든든한 그룹의 울타리에 들어와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SK그룹으로서도 내수 기업이란 꼬리표를 확실히 떼내고 수출 기업으로 이미지를 바꾸게 됐다. SK그룹은 2년 연속 수출 6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0%를 넘어선다.

횡령과 비자금 조성 혐의로 최 회장이 1년 가까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는 건 걱정거리다. 2003년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과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을 잘 극복한 최 회장이지만 이번엔 쉽지 않은 분위기다. 1·2심 재판부가 모두 유죄를 인정했다. 2월 말 열릴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실형이 선고되면 SK그룹의 오너리스크는 더욱 커진다.



대기업 중 가장 안정적인 지배구조 갖춘 LGLG그룹은 세 차례에 걸친 계열분리 과정을 거치면서도 무난하게 성장했다. 19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면서 럭키금성에서 이름을 바꾼 LG그룹은 2000년대 들어와 LIG·LS·GS그룹 등으로 나눠졌다. 별다른 잡음 없이 분리가 이뤄졌는데 60년에 걸친 구씨·허씨 두 가문의 동업은 우리나라 기업사에 가장 성공적인 동업 경영 사례로 남아있다. 정유(GS칼텍스)·금융(LG화재) 등 굵직한 계열사를 떼주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반도체 사업을 넘기는 아픔도 겪었지만 전자와 석유화학 분야를 중심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주력인 LG전자는 2000년대 들어 ‘가전은 LG’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전 세계에 뿌리 내렸다. LG의 LCD TV·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은 판매량 기준으로 현재 글로벌 톱 수준이다. ‘2015년 글로벌 가전시장 1위’라는 목표가 과하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부진은 걱정거리다. 과도한 마케팅 비용 등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옵티머스’ 브랜드를 버리고 ‘G시리즈’를 선보인 이후 소비자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전망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LG화학도 효자 노릇을 했다. 합성수지·고무 등 석유화학제품을 만들던 회사에서 2000년대 들어 정보전자소재·전지 사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글로벌 화학기업조차 실적 악화로 허덕이던 최근 2~3년 동안에도 위기를 무난히 넘겼다는 평가다. 특히 2차전지 분야의 성과가 좋다. 지난해 일본 기업을 제치고 처음으로 중소형 2차전지 시장에서 2위에 올라섰다.

LG그룹엔 유난히 2등 기업이 많다. 전자·디스플레이·2차전지·화장품이 모두 업계 2위다. 2인자라고 슬플 건 없다. 고르게 잘하니 그룹 경쟁력은 탄탄하다. 2003년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가장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갖춘 그룹이란 평가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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